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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자세와 방법 (2)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최종수정 : 2007-09-14 00:00

지난 주에 썻던 “비평의 자세와 방법”이라는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니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이번 주 역시 같은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쓴다.

그렇다. 우리가 어떤 비평을 할 때뿐 아니라 어떠한 말과 행동에 있어서 아무리 그 목적과 의도가 선하고 의로와도 자세와 방법이 바르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대를 끌어내기가 어렵다. 특히, 건설적인 비판과 비평이라면 그 자세와 방법은 더더욱 중요하다.

최근에 불거진 아프가니스탄의 인질사태가 어떠한 행동에 있어 자세와 방법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예인 것 같다. 한국에 가서 직접 느낀 것이지만, 인질들에 대한 여론은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싸늘하다. 나 역시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선교활동에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다. 다만, 일부 크리스찬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선교와 전도를 하는 자세와 방법이다. 우리 한국 기독교문화를 보면 법과 질서를 쉽게 생각하고 달려드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들에게는 사회의 법보다 성경이 더 중요하겠지만, 동시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속에 크리스찬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교회가 사회를 장악한 중세시대도 아닌 근대시대 이후에 사는 21세기 현 시점에는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 합의한 질서안에서 선교와 전도를 해도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천국백성”만들기에 그리 큰 장애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지 못하기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들이 소위 말하는 “불쌍한 백성”들로부터 거꾸로 크게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닌가 싶다.

큰 맥락에서 봤을때 방법과 자세에 있어 음악을 비롯 문화계 역시 그리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지난 주에서도 대충 언급했지만, 특히 음악에 대한 비평과 비판은 굉장히 어렵다. 필자의 지난날의 글을 읽어 본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주관적으로 어떤 음악에 대해서 비판해 본적이 거의 없는 듯 하다. 물론 나름대로의 생각은 있지만, 예술 문화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맞다 그르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모두가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좋은 예로 간단한 “도레미파솔”을 연주해도 그것을 듣는 사람의 각자 경험과 배경에 따라 “도레미파솔”의 느낌은 다르고 그 의미 역시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에 대해 쉽게 각을 세워 평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글쎄… 평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나 역시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떤 예술 문화에 대해 잘 모르고 자신만의 판단기준이 없는 대중에겐 평론가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평론가들은 더 신중해야 한다.

물론 사안에 따라서 냉정하게 평가를 해 줘야 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말그대로 감정적인 평가가 아니라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해야만한다. 여러 평가방법중에 이른바 “샌드위치” 방법이 있다. 비판과 비평의 내용을 가운데 두고 ‘전’과 ‘후’에 장점을 언급 해 보다 유연하고 부드럽게 접근하는 방법이다. 결과적으로 소프트한 접근이지만, 이면에는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언급하는 매우 균형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역시 앞서 설명했듯이 논리적이어야 한다. 적어도 두세 가지 예를 들어 본인의 비판을 논리적으로 풀어줘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예술문화를 비판하는 일부평론가의 글을 읽으면 논리적인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본인이 주관적으로 느낀 것이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개개인의 경험과 배경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개인적인 생각을 언급해야 한다면 반드시 주관적인 입장이라고 언급해야 한다. 아니면 그 주관적인 생각이 객관적이라 확신한다면 다른 곳에서 인용을 해 오는 것이 더 구체적일 수 있으므로 보다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예술문화의 평이라는 것은 시대가 바뀌면서 지속적으로 변해가기에 사실 무척 어렵다. 우리가 잘 아는 화가 “빈슨 반 고흐”를 보자. 우리는 그를 최고의 화가라고 부르지만, 반 고흐는 실제로 살아 생전에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은 무명의 화가였을 뿐이다. 예술의 평이라는 것이 이렇게 늘 변하기에 참 어려운 것 같다.

다시 일반적인 생활 속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하자. 같은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토론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과거 이른바 “침묵은 금”이라는 말 밑에서 교육받고 또 논리적인 사고를 지향하는 사회보다는 힘의 논리가 뿌리박힌 토양에서 자라왔다. 논리적인 사고의 바탕으로 말하고 쓰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약한 논리는 토론을 해보면 금새 알 수 있다. 또, 토론을 통해 상대방의 비판에 응하는 자세와 방법 역시 쉽게 알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일부 우리의 토론자세와 방법이 그리 세련됐다고 말하기 힘들다. 어떤 비판과 비평을 할 때는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구체적인 논리로서 접근하는 것이 기본적인 자세이다. 예컨대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다시 이야기하면 논리가 물리적인 힘보다 강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의견을 말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의견을 듣는 것이다. 말을 잘하려면 먼저 상대방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글을 잘쓰려면 먼저 책을 많이 읽어야하는 것은 언어의 기초적인 상식이다.

민주사회에서 비판과 비평은 반드시 있어야한다. 또 사회는 비판과 비평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다.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성경말씀을 내 세워 비판하지 말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을 보면 그 비판은 부정적인 의미의 “Condemn”이지 긍정적인 의미의  비판인 “Criticize”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다. 보다 더 건전하고 생산성있는 비판과 비평을 위해 우리는 자세와 방법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아무리 의도와 목적이 좋다한들 방법과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좋은 그 비판과 비평이 “Criticize”가 아닌 성경이 말하는 “Condemn”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디 워”의 논란과 국내 외 여러다른 이슈들을 통해, 긍정적인 비판과 부정적인 비판사이에는 그 자세와 방법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생각 해 본다.

이 상 준
intothejazz@paran.com
blog.paran.com/intotheja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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