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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작 만났어야 할 사람들..."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7-06-28 00:00

밴쿠버에서 재회한 6·25 참전 학도병 소설가 이호철씨·김재상 박사 특별대담

◇ 아보츠포드 김재상(좌)씨의 집 정원에서 만난 김재상 박사(왼쪽)와 소설가 이호철씨.

2007년 6월. 6·25 한국전쟁 57주년을 맞이했다. 시대적 상황은 변했어도 우리 민족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57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분단은, 지난해 북한의 핵 실험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그 멍에를 함께 짊어질 것조차 강요당한다.

그래서 분단의 아픔과 고통을 글로써 표현하는 작가들과 이북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들에게 6·25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처와 아픔으로 다가온다.

6·25가 일어나던 50년대로부터 반세기를 훌쩍 넘긴 2007년 6월 25일. 17세와 18세의 나이에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소설가 이호철씨와 김재상 박사가 캐나다 밴쿠버에서 만났다. 반가움과 회환에 젖어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의 소식과 고향 이야기를 나누며, 아직은 요원해 보이는 통일에 대한 생각까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김재상 박사(이하 김)=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이호철 작가(이하 이)=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20년 전쯤 젊은 날 진작 만났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김=그러게 말입니다. 이선생은 고향이 원산이지요? 저는 평양입니다. 마지막으로 언제 북한엘 다녀오셨습니까?
▲이=98년 8월에 다녀오고, 지난 5월17일 금강산역과 제진역을 오가는 열차를 시승했었지요. 감나무가 많았던 고향 원산은 콘크리트 건물만 있고 폐허가 되어버렸어요.
▲김=나라가 발전된 것도 아닌데 옛모습은 다 사라졌지요? 북한에도 감나무가 있었나요?
▲이=원산까지 감나무가 있었지요. 김선생님과 제가 한 살 차이니까 시대적인 배경이 비슷하겠지요? 아마 평양과 원산이 멀어서 잘 못보셨던가 봅니다. 이런 자리에는 술이 딱 한잔 있어야 하는 건데…그래야 뭔가 편안하고 부드럽지 않습니까?
▲김=하하… 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좋은 복분자 술이 있습니다. 한 병은 여기서 드시고 양주는 가시는 비행기에서 드시라고 선물로 드리지요.

"메이플 종묘 북한에 보내"

두 사람은 술 이야기만으로도 한껏 대화가 무르익으며 서명이 담긴 서로의 소설책을 교환했다.
▲김=제 책은 6·25 참전 이후 이야기를 담고 있지요. 17년 전 설탕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문을 구하던 북한에 메이플 종묘를 심어 20년 후에 설탕을 수출하라고 조언했더니 구해달라고 해서 자비로 50만주를 보냈었죠. 이때 김일성 주석이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왔던 것처럼, 북한에 메이플 시럽시럽 종묘를 보낸 제게 영웅훈장을 수여한다고 해서 극구 말렸던 적이 있었죠.
▲이=저는 인민군 학도병으로 차출됐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전쟁터로 끌려나가 동해 선을 타고 내려온 게 가족들과 생이별하게 되었죠. 그래서 전쟁 이전의 원산과 그 시대는 제 문학작품에 가장 많이 투영되면서 제 작품과 삶의 무대로 존재하지요.
▲김=한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선생의 책을 읽었어요. 6·25를 모르는 세대들에게 분단이라는 현실을 이해시키는데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언제 또 북한을 방문하실 생각이신지요.
▲김=이북에 두고 온 첫사랑도 챙겨야 하고……하하하. 농담입니다. 가야죠. 저는 단순 관광과 친지 방문차 가는 것이 아니라 북한당국에서 개 홍역 백신을 개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이=제 누이도 폐결핵이 걸렸다고 해서 약을 사먹으라고 미화 300달러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북한의 결핵이 그렇게 심각합니까?
▲김=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들에게도 대단히 많습니다. 결핵은 특히 전염성이 강해서 웬만한 항생제로 잡을 수가 없지요. 북한이 당장 해결해야 할 일로 굶주림과 함께 이 결핵입니다.

"가족끼리 왕래 길 열리기를"

북한을 다녀 온 두 사람 모두 환하게 고향이야기를 하다가 북한의 심각한 굶주림과 전염병을 걱정하는 표정에서 침울해졌다. 항생제 부족으로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시체 훼손을 염려해 바로 땅에 묻지도 못할 만큼 굶주림이 심각한 현실 앞에서 막막함을 느끼는 듯하다. 이런 굶주림과 질병이 6·25 당시보다 더욱 심각하다고 염려하던염려하던 그들은 다시 금강산 열차 시승을 다녀온 이야기에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이=지난 5월 17일 금강산역과 제진역을 오가는 열차를 시승했습니다. 이날 낮 12시 18분이 남북전쟁 군사분계선이 처음 열린 시각이지요. 원산역에서 떠나면, 갈마·배화·안변역에 닿아, 그곳에서 석왕사, 신고산, 삼방 쪽으로 곧바로 남행을 하는 경원선과 갈라져 동쪽으로 꺾어지면 오른쪽으로 바로 태백산맥이 시작되는 황룡산(黃龍山) 북쪽 끝머리의 낮은 산자락을 끼고 안변평야와 오게역, 상음역, 다시 자산, 흡곡, 패천, 고저, 통천, 남애, 장전, 외금강을 거쳐 고성에 종착역인 양양까지 닿았었지요.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역들의 60년 전 이름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달달 외우고 있는 게 나도 참 신기해요.
▲김=그렇게 고향을 못 잊고 계신 것 아닐까요. 저도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이북에 남아있는 우리 둘째 형님 이야기를 구상해 보다가, 마치 얼마 전까지 이북에 살았던 사람처럼 기억이 생생해서 놀랐습니다.
▲이=저도 서울상대를 졸업하고 좌익을 이끌고 있던 이종형님이 한 분 계십니다. 통일이 되면 좋기도 하지만 또 서로의 다른 이념과 문화로 가족들간에도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겁니다.
▲김=통일은 아직 때 이른 바램이지만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 사람은 사람끼리 서로 왕래해야 하지 않을까요? 북한을 다녀오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가난과 굶주림에 고통 받고 있는 이북의 가족들 생각에 통일은 제쳐두고 가족들끼리 서로 왕래라도 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램이 간절합니다.
▲김=통일은 아직 때 이른 바램이지만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 사람은 사람끼리 서로 왕래해야 하지 않을까요? 북한을 다녀오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가난과 굶주림에 고통 받고 있는 이북의 가족들 생각에 통일은 제쳐두고 가족들끼리 서로 왕래라도 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램이 간절합니다.
▲이=통일! 남북 통일! 아직은 멀었습니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서 저절로 때 되면 알맹이가 차 올라야 되는 거지요. 분단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처럼, 통일도 어쩌면 먼 훗날 우리의 바램이 아니라 해도 저절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말씀처럼 가족들끼리 또 민족끼리 일부 제약이 따르더라도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난 50년간 분단과 이산을 소재로 글을 써 왔습니다만, 역사는 머리로 기획을 세우는 일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김=그러게……아무런 교류가 없으니 누굴 통해서 돈을 보내고 소식을 전해야 할 지 답답해요. 언젠가 사람을 통해서 보냈던 돈이 행방불명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먼저 형제들에게 돈을 보내고, 다음은 사촌들, 그리고 조카들 순서로 보내고 있죠. 자랄 때 사촌들과 친형제처럼 지내서 그런지 조카보다 사촌이 우선순위가 되더군요.
▲이=저도 이북의 누이와 형제들에게 미국을 통해서 보냈다가 사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김=요즘은 보낸 물건이 가끔 사라질 때, 북한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고 이해를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비타민을 보낼 때는 아예 두 병을 보내곤 하지요.
▲이=저도 돈을 쓸 일이 생기면 ‘이 돈이면 형제들이 북한에서 얼마나 요긴하게 쓸 텐데’ 망설이고, 맛있는 음식을 남기면 ‘굶고 있을텐데’ 하며 북한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생각합니다.

기쁜 기억과 고통스런 기억까지 공유하며 공통분모가 큰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겨 3박4일 동안 대화를 해도 시간이 부족할 듯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서로의 말끝마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한마디가 있었다.
“저도… 저도 그랬습니다.”
그 사이 언제 비워질까 염려스럽던 복분자 술 큰 병이 말끔하게 비워져 있다.

이재연 기자 jy@vanchosun.com

소설가 이호철씨는…

1932년 북한 강원도 원산 출생. 원산고등학교 3학년이던 만18세에 6·25 전쟁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오대산 월정사 부근에서 포로로 잡혀 남한에 정착했다. 부두 노동자, 제면소 직공, 미군기관 경비원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5년 ‘탈향’이 황순원에 의해 <문학예술>에 추천되어 등단했다. 남북 분단으로 인한 인간 내면의 아픔을 그려내고, 시대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스스로의 바램을 주로 그리면서 현실을 폭넓게 수용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 속에는 현실적 조건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모습이 집중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73년 개헌청원 100만 명 서명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른 후,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61년 ‘판문점’으로 현대문학상, 62년 ‘닳아지는 살들’로 동인 문학상, 96년 연작소설 ‘남녘사람 북녘사람’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고 9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2002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96년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던 그의 연작 소설 ‘남녘사람 북녘사람’은 미국, 폴란드, 멕시코, 중국, 일본, 스페인, 독일, 프랑스에서 번역판으로 출간됐다.

김재상 박사는…

1933년 평양에서 출생, 평양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7세에 6·25전쟁에 징집됐다. 전쟁 중 후퇴하는 인민군에서 낙오, 남한에 정착해 배재고등학교와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했다. 1966년 캐나다로 이민, 75년부터 토론토대학 부속 ‘코넷 메디컬 의학연구소’ 개발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서부 뇌염백신’ 개발에 성공. 이후 BC주정부 농수산부 소속 가축질병연구소에서 바이러스 수석연구원으로 일할 당시, 세 차례 북한을 방문하고 평양인민대학에서 수의과대학교수 및 수의학자들에게 가축질병진단에 관련된 강연과 백신개발을 지도하고 돌아왔다.
90년에는 북한당국의 요청으로 설탕대체 생산을 위한 메이플 종묘 50만주를 자비로 평양으로 보내,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문익점’에 준하는 칭송을 받으며 ‘영웅훈장’수여를 제안 받았으나 거절한 바 있다. 93년 프레이저밸리 한인회 초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프레이저밸리 한국어학교와 밴쿠버 한인장학재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 6월 8일 모교인 성균관대학교와 전주대학교에서 동시에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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