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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기대어 2026.03.19 (목)
살면서 줄일 것이 늘어만 간다.많이 가지려고 한 것도 아닌데 꼭 필요한 걸까 생각해보면 추려낼 것 투성이다. 책과 LP를 사 모으는 건 때마다의 즐거움이고행복한 취미 생활이었다. 그렇게 쌓인 책더미를 보면 뿌듯했는데 그것도 지금은짐스럽게 느껴져서 정리대상이 되고 있다.전공어로 된 소설책을 이민오면서왕창 처분했다.남긴 책들도 한번씩 더 읽게 된 것 이외는중고서점에 팔고 나눔도 했다. 그렇게 남은 책은 나름 내게 인생...
고희경
봄을 기다리다 2026.03.19 (목)
얼레에 감긴 실처럼길고 긴 겨울더러 추운 몇 날은시린 손 비비며온기를 만들고그래도 몸이 녹지 않으면따뜻한 기억을 불러가만히 껴안고 잤다올 듯 오는 듯하면서도더디기만 한 봄남녘 여기저기에 매화꽃 피워 놓았다는데그 바람 얼른 올라와섬강 뒤덮은 얼음 녹이고언 내 몸에도 온기 나눠 줬으면
정금자
고독한 그녀 2026.03.13 (금)
고독한 그녀 오늘 그녀가 생각나네 언제가 되어야 나는 그녀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들 틈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웃고 얘기하는 그녀 잘 익은 과일 속의 아주 작은 씨앗 모양 사람들 홍수 속 태풍의 눈 중앙에서 빈짝반짝 거리는 그녀 도심 한가운데서 너무나도 태연히 존재하는 병원 부속 화장터 마냥 당연한 하지만 동시에 짧은 수수께끼 같은 그녀의 모습 화장터 연기 모양 슬프게 자신의...
박락준
나의 천사들 2026.03.13 (금)
 3년이면 탈상을 한다는 말이 실감 나던 어느날, 나는 아들이 사는 밴쿠버로 이사 왔다. 살던 집을 정리하고 처분하고  미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형제들과 한국, 그리고 유럽으로 성지 순례를 다니며 40여 년 함께 살았던 남편과의 삶을 조금씩 정리하게 되었다.  임종이 가까워 오면서 그는 아이들 걱정은 한 마디도 없었고 다만 나에게, ‘어떻게 살래?’ 를 혼잣말처럼 되뇌이곤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글이나 쓰며 살아라’ 고 유언 같은...
김춘희
   누군가의 철없는 행동에 자꾸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 정도는 눈치껏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불평을 멈추고 행동해라', '예의를 갖추고 어른스럽게 굴라'며 나는 주위 사람들을 끊임없이 판단하고 못마땅해 한다. 십 대가 된 아이들에게, 혹은 서툰 신입 교사들을 향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의 비난과 질책을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나도 완벽한 어른이 되지 못한, 여전히 서툴고 모순된 존재라는 사실에 종종 가슴이...
권은경
암모나스 2026.03.13 (금)
군용 담요로 막아둔 겨울 창숲 사이로 스며든 별빛이내 몸에 점자처럼 박혔다 그 빛을 따라 떠오른 언덕에서흰 여우 털의 왕자가 산토리를 켰다흩어지는 음표마다내 눈 속에서 작은 우주가 흔들렸다 여섯 다리의 암모나스가평평한 등에 나를 올려외할머니의 숨결 같은낮은 자장가를 흘렸다 소나무 잎 위에서 터진박하 냄새의 별 열매가내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보이지 않는 무지개 길들이시간의 틈을 열었다 머물 수 없다는 걸...
강애나
<집으로 데려다줘> 윤경란                                                                                “방게야! 빨리 나와! 멋진 웅덩이를 찾았어. 같이 가자!”모래 굴 속에서 자고 있던 방게는 농게의 들뜬 목소리에 깨어났다.‘또야?’방게는 몸에 붙은 모래를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며칠 전에도 농게는...
윤경란·황정현
 <베링기아의 밤>  김미선 곧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보고 있던 잡지를 덮고 창문 덮개를 올렸다. 구름 아래로 만년설 덮인 산맥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윽고 고도가 낮아지자 뭉뚱그려져 보이던 실체가 하나둘 드러났다. 언뜻언뜻 보이는 에메랄드색은 호수 아니면 바다일 것이다. 비행기는 위로 자라지 못한 침엽수 군락에 둘러싸인 물 위를 선회한 뒤 착륙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공항 건물 두어 채가 고작이었다....
김미선·이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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