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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별 동산
2026.07.03 (금)
영원한 어둠은 없다. 북극성도 움직인다. 우주에 고정되어 있는 자리는 없다. 오래 고정된 자리는 빛을 잃는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지구의 반쪽은 검은 바다처럼 깜깜했고, 행복도시 닻별 동산은 푸른 소나무들 속에 붉은 기도는 보라색 미선나무가 하얀 꽃망울을 머금고 희미한 빛을 기다리고 있었다. 빛과 어둠이 톱니처럼 맞물려 도는 동산에서 수목장 수목들은 바람에 이름표를 흩날리며 빛이 어둠을 삼키기를 기다렸고,...
박병호
말과 생각이 멈춘 시간
2026.07.02 (목)
5월은 꽃의 계절이다. 장미가 피고, 백합이 향기를 내고, 거리마다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른다. 그러나 나에게 5월은 아름다움만으로 기억되는 달이 아니다. 오래전 아내를 떠나보낸 달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5월이 오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리고, 사진첩을 들춰 보기도 하고, 오래전에 써 두었던 글들을 다시 읽어 보기도 한다. 세월은 많은 것을...
우제용
비록, 정상에 서지는 못했어도
2026.07.02 (목)
조금만 더 가 보자며걷던 길에서어느새 우리 부모 돼 있었고 조금만 더 참자며견딘 시간은어느새 우리 이렇게 늙어 있네 산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평범 한 일오르내리는 산길을 걷듯... 오르막 산길은 발 끝에 채이는돌뿌리만 보이는데내리막 산길은죽자고 허둥대는사람들을 보여 주네. 풍경은 말없이 서서우리가 걷는 길이언제나 힘든 오르막 길 만은아니었다고말없이 쌓이는 먼지 같은먼지 같은 위로를 주네바람 불면...
조규남
씨앗이 알려준 시작
2026.06.26 (금)
한 알의 씨앗이 흙으로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누군가에게는 추락처럼 보일그순간을씨앗은 조용히 받아 들이고 있었다.스며드는 어둠은그에게 처음 머무를 자리였다.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씨앗은 묵묵히 숨을 고른다.누구의 설명도, 어떤 손길도 없이그 고요 속에서 제 얼굴을잃지 않는다.나는 그 침묵의 단단함 앞에서오래 멈춰 섰다.그러던 어느 날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틈에서작은 떨림이 흙을 밀어올린다.선언도 , 장면도 없다.잃지...
이봉란
이발사와의 대화
2026.06.26 (금)
우린 살면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과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긴 시간 동안 아무 대화도 나누지 못하거나 날씨 얘기와 경제 동향 이야기를 나누는 둥 마는 둥 보내기도 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인사말과 길을 가다 마주친 사람과 눈인사하는 이상의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될 때 반복해서 만날 경우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야기 속에 추억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어렸을 때 이발소를 처음 간 기억은 초등학교 입학...
이형만
낯익은 이방인
2026.06.25 (목)
고국을 떠나온 지 어언 26년이 되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한국 방문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제는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예전보다 여유가 생겨 처음으로 큰 부담 없이 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설렘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건강에 대한 걱정이다. 예전 같으면 비행기표를 끊는 순간부터 마음이 들떴을 텐데, 지금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나영표
바다
2026.06.25 (목)
처음 눈 마주친 날열다섯 살 봄 어느 날눈이 아파서 다 담을 수 없었던푸르고 파란 또 하나의 세상그 물빛맘에 스미고 스며서사는 동안넓은 척 깊은 척 흉내도 내고한 번 가서 보고 돌아오면서너 달은 귀에 걸린 웃음웃을 수 있는
정금자
마중
2026.06.19 (금)
해질녘철길 너머 논배미로엄마가 밀어 만든국수 꽁다리하나 들고마중을 나간다철길 너머 어디쯤있는 둥 마는 둥살아보지도 못한아기들이 묻힌얕은 봉분들머리가 쭈뼛 서고그 아이들울음이땅을 뚫고나올 것만 같아걸음아 나 살려라숨차도록 달려아버지에게다다른다돌아오는 길아버지 손을잡고흙냄새보다짙은아버지의 땀냄새밤하늘에별이열한 식구밥상 위의 밥처럼하얗게빛났다
김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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