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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란(托卵)* 2020.05.26 (화)
아침에 일어나보니 책 보따리가 또 사라졌다. 이건 분명히 할머니 짓이다. 이른 새벽이지만 어제저녁 쌓아 둔 책 보따리를 찾으러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집 안에는 어차피 더는 숨길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까. 벽장에서, 헛간에서, 사랑방에서 며칠째 찾아냈으니 오늘은 할머니가 밖에다 내버리신 게 분명했다.“여태껏 배웠으면 됐지, 무어 그리 배울 게 많나. 학교는 인제 그만 다녀라.”  할머니가 잔소리하실 때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가족을...
박병호
에돌아 가는 강 2020.05.18 (월)
한밤내 강이 흐느낀다 어쩌다 고요와 평정을 잃었을까   무참히 유리파편처럼 일상이 깨어진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이기와 불신의 응벽이 단단했던 거야 문명과 재물에 너무 집착했던 게지 정의 물길이 막혀 사람들이 스스로 섬이 되어버린 탓이야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탁한 강물 속 그림자도 제 가슴을 친다   신새벽 동백꽃 멍울 울컥울컥 토해놓은 강이   동틀녁 고요와 화평을 싣고 이섬 저섬 에돌아...
김해영
       내가 캐나다에 이민 와서 처음에는 직업도 없이 일 년 반을 무위도식하며 지냈다. 하는 일이 없으니 캐나다 특히 밴쿠버 아일랜드섬 전체와 밴쿠버, 이웃 나라 미국 씨애틀, 마운틴 올림픽 등을 돌아다니며 캐나다 생활을 즐겼다. 그러다가 일시불로 받은 연금이 거의 바닥이 났을 때쯤 자그마한 편의점(연로한 캐나다 노인이 운영하던 곳)을 인수하였다.          편의점이 위치한 곳은 막다른...
이종구
사랑의 거리 두기 2020.05.18 (월)
벚꽃이 활짝 웃고 있는 화사한 이 봄날 난 혼자입니다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는 사랑마저 갈라놓은 사회적 거리 두기 참 얄밉습니다 벚꽃이 간간이 날리는 가슴 뛰는 이 봄날 난 허전합니다 만나도 안 되고 만나면 탈이 나는 사랑보다 더 무섭고 지독한 코로나 바이러스 참 얄궂습니다 벚꽃 향기 바람에 날리는 기분 좋은 이 봄날 난 답답합니다 바람에 실려 오고 바람 따라 떠도는 전대미문의 전염병 때문 마스크 쓰고, 장갑 낀 내 모습 참...
나영표
                                   봄꽃처럼 달콤한 게 있을까.   해맑은 날 청신한 모습으로 피어 난 연보라 빛 라일락 꽃처럼 달콤한 게 어디 있을까. 민들레 꽃씨가 새털처럼 날리고 씀바귀 꽃과 애기똥풀 꽃이 누가 더 노란가 다투고 있을 무렵, 라일락 꽃은 조용하게 피어났다.   이맘때면 그리운 얼굴이 있다. 유난히 웃음이 하얗고 키가 늘씬한 남자다. 그 때 내 나이는 23살,...
박성희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한 지 벌써 두 달,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그의 속성답게 방콕, 집콕 등 달갑지 않은 새로운 단어들과 함께 우리들 언어 속에도 끼어 들어와 살고 있다. 처음엔 사회적 거리 두기가 낯설고 두렵기까지 했는데 인간은 본디 사회적 동물이라서 그사이에 나름 적응해 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러려니 했던 것들이 무너지고...
김춘희
봄은 없다 2020.05.11 (월)
    나는 아직 너를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늑장 부리는 찬바람에 언 볼이 찢길지라도 남의 신발로 봄마중 가지는 않으리   삼월이 가고 사월이 가고 꽁꽁 얼어붙은 오월의 들판에서 터진 발바닥으로 서로를 확인할 머나먼 동행   그래 봄은 없다 봄은 이미 죽었다 그날 이후   겨울강 한복판에서 강태공처럼 구멍을 뚫는다 그리고 깊이 잠수한다  
백철현
수필은 그물이다 2020.05.11 (월)
살아가는 모습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뉜다. 그냥 사는 사람과 어떻게 든 살아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살아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삶은 하나의 서커스다. 한꺼번에 접시를 세 개 돌리거나 허공에 몸을 날려 공중그네를 타는 서커스 단원처럼, 그날 하루의 공연이나 무사히 마치고 싶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오랫동안 배를 탔다. 비바람 불고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로 남편을 내보낼 때마다 두려웠다. ‘우리가 무사히...
정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