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설악산 조난 3일···77세 노인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곽창렬 기자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0-11-13 15:55

[아무튼, 주말] 설악산 실종자 조모씨의 생존기
지난달 중순, 홀로 설악산을 오르던 70대 남성이 길을 잃었다. 사흘 동안 산속을 헤맸고, 기력이 다할 무렵 기적적으로 119구조대에 구출됐다. 반응은 엇갈렸다. ‘구조돼서 다행’이라는 반응이 다수였지만,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친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가을이지만 밤이면 영하에 가까운 날씨, 강원도의 험한 산속에서 노인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를 직접 만나 당시 상황을 들었다.


◇스스로 지름길 찾다가 길 잃어


서울 잠실에 사는 조모(77)씨는 50대가 되자 본격적으로 등산을 다녔다. 그는 특히 겨울 설악산을 좋아했다. 산꼭대기인 대청봉을 스무 차례 오를 정도였다고 했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으면서, 건강하게 등산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 13일 새벽 4시쯤 잠에서 깨자마자, 그는 출발했다. 예정에 없던 등반이었다.

코스는 설악산 ‘장수대’를 시작으로 서북 능선의 중간 구간인 ‘귀때기청봉’을 넘어 ‘한계령’으로 내려오는 길로 짰다. 약 11km, 10시간 남짓 걸리는 코스였다. 그래도 남교리 십이선녀탕 계곡에서부터 산을 오르는 것 보다는 짧다는 생각에 그날 저녁 서울로 돌아오겠다고 아내에게 알렸다.

곧장 평소처럼 준비물을 챙겼다. 두껍지 않은 검은색 등산복 차림에, 머리에는 통풍이 잘되는 여름 모자를 썼다. 지게 모양 배낭에는 휴대전화 보조 배터리와 머리에 맬 수 있는 랜턴을 넣었고, 가을 추위에 대비해 얇은 패딩 점퍼와 바지도 챙겼다. 음식으로는 아내가 만들어준 새우튀김밥을 0.5ℓ 크기 보온 밥통에 가득 눌러 담았고, 간식으로 9g 용량의 찹쌀 과자 5봉지, 초코파이 2봉지, 견과류 1봉지, 귤 3개, 사과 1개를 넣었다. 1 ℓ를 담을 수 있는 보온 물통에는 따뜻한 물을 담았고, 500ml 크기 생수 3개도 배낭에 넣었다.

지난달 15일, 사흘간 실종됐던 조모씨가 설악산 귀때기골 인근에서 구조되는 모습. 구조당시 조씨는 건강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지난달 15일, 사흘간 실종됐던 조모씨가 설악산 귀때기골 인근에서 구조되는 모습. 구조당시 조씨는 건강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아침 6시 50분. 그는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강원도 인제군 장수대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8시 40분쯤 장수대에 내려 등반을 시작했다. 강원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설악산의 최저기온은 섭씨 2.9도였고, 체감 온도는 영하권이었다. 2시간 정도 지나 해발 1210m 높이의 대승령에 다다를 무렵 배가 고팠다. 그는 새우튀김밥을 반 그릇가량 먹고 다시 산행을 이어갔다. 약 5km를 더 걸어 오후 2시가 되자 그는 귀떼기청봉에 있는 ‘너덜 지대’를 지나게 됐다.

그때부터 서서히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좀 더 빨리 목적지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정해진 등산길이 아닌 다른 지름길을 찾았다. 때마침 그의 눈앞에는 나무에 붙은 안내 표지가 있었다. 다른 등산객이 알려주는 길이라는 생각에, 그는 나무들을 따라 1시간 넘게 걸었다. 그런데도 찾았던 지름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점점 인적이 없는 계곡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고 깨달았다. 온 길 그대로 되돌아갈 생각도 했지만, 힘이 떨어지면서 포기했다. 조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산에서는 자기 멋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정말 잘못했다”고 말했다.

오후 4시가 되자, 주변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조씨는 계곡과 바위를 벗어나 산기슭으로 몸을 옮겼다. 나뭇잎을 모아 잠을 잘 만한 곳을 마련해 배낭에 몸을 기댔다. 그 무렵 ‘어디에 있는지, 왜 연락이 되지 않는지’를 묻는 아내의 문자 메시지가 하나둘 들어왔다. 조씨는 답장과 전화를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왜 문자 수신은 가능한데 송신이나 통화는 불가능하냐는 질문에 KT 관계자는 “산속에 기지국 전파가 안 닿는 음영 지역이 있는데 아주 희미하게 기지국과 연결이 됐다가 문자만 수신된 걸로 봐야 한다”고 했다.

결국 그는 휴대전화를 껐다. 배터리가 방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배터리 용량이 약 60% 남은 시점이었다. 대신 가져온 넥워머와 패딩을 껴입고, 최대한 몸을 따뜻이 하려고 등산 양말 안에 바지를 넣었다.

약 2시간 정도 잠을 청했다. 하지만 추위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체온을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에 오후 8시부터 가져온 랜턴을 모자에 매달아 길을 밝힌 뒤, 돌아온 것으로 생각한 길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 무렵 조씨 가족은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경찰과 소방 당국에 실종 신고를 했다. 조씨는 그렇게 어둠 속을 헤매 다녔고, 다음 날(14일) 아침 6시까지 밤새 걸었다. 소방서와 경찰에서는 조씨 구조에 착수했다.

지난달 15일 밤, 구조되는 조모씨의 모습
지난달 15일 밤, 구조되는 조모씨의 모습

◇휴대전화 배터리 아끼고, 밤새 걸어 체온 유지


날이 밝아지자, 그는 처음 잠을 청했던 자리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사실을 알게 됐다. 날이 어두웠던 탓에 헛걸음한 것이다. 이후 남은 새우튀김밥과 물, 과자, 과일 등을 먹고 다시 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길은 보이지 않았고,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그는 전날처럼 걸으면서 추위를 피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있던 주변이 급경사 지대여서 자칫 추락할 위험이 컸다. 결국 근처 아름드리나무 밑에 배낭을 놓고 잠을 청했다. 선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셋째 날 아침, 그는 다시 길을 찾아 나섰다. 더는 혼자 찾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꺼놨던 휴대전화도 켰다. 그러다 급경사에서 발을 헛디디면서 약 10m를 굴러떨어졌다. 이 사고로 갈비뼈 하나가 부러지고, 하나는 금이 가는 부상을 입었다. 오후 4시가 되자 다시 해가 지기 시작했고, 더는 서 있기조차 힘들어졌다. 조씨는 “젊은 여성이 눈에 나타나는 등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고, 과거 가족에게 미안하게 했던 기억 등이 스쳐갔다”며 “이러다가 목숨을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인근 풀밭에 자리를 잡고 배낭에 몸을 기댔다. 그런데 오후 5시 3분이 되자 갑자기 휴대전화에 ’119에서 긴급 구조를 위해 귀하의 휴대전화 위치를 조회하였습니다'라는 문자 메시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119 소방대가 자기를 찾고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가지게 됐다. 조씨는 5시 22분쯤 ‘현재 계곡에서 탈진 상태로 떨고 있습니다. 구조해주세요’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때부터 7분이 지나 설악산에 있는 ‘백담 기지국’은 조씨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때마침 소방청과 경찰 등으로 구성된 구조대 70여 명은 조씨의 생존 사실을 모르는 채 구조를 중단하고 하산하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특별한 단서 없이 더는 구조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순간 조씨가 보낸 문자 한 통으로 조씨의 휴대전화가 있던 위치가 대강 파악됐고, 구조대원들은 다시 조씨의 휴대전화가 감지된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결국 밤 10시 40분쯤 구조대는 설악산 ‘귀때기골’ 인근에서 조씨를 발견했다.

지난 11일 본지와 만난 조씨. 그는 착용했던 헤드렌턴을 켜고, 설악산 사진을 놓고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지난 11일 본지와 만난 조씨. 그는 착용했던 헤드렌턴을 켜고, 설악산 사진을 놓고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민폐 끼쳐 죄송… 다시는 같은 코스 안 갈 것"

조씨는 “늙은이 한 명이 잘못 판단해서 너무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쳤다”며 미안해했다. 그는 자신의 생존에 대해 “소방청 구조대원의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험한 산에 간다면 반드시 가족에게 시간대별로 어디에 있을 예정인지를 알리고, 정해진 등산로가 아니면 절대 다녀서는 안 되겠다”고 했다.

구조에 참여한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 관계자는 “조씨는 전문 산악인은 아니지만 워낙 설악산을 많이 다녔고, 70대 나이에도 체격이 좋고 음식과 장비를 잘 갖췄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다”며 “일반 등산객이었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씨에게 다시 설악산 등반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설악산 서북 능선(실종 구간)은 더는 찾지 않을 것이고, 설악산 다른 코스를 찾게 된다면 가족과 함께 나서겠다”며 “등반하는 분들은 꼭 119앱을 깔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지인의 부탁으로 한국에서 보낸 약품을 호주에서 받으려다 마약사범으로 몰려 7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한 대학생이 발송인의 책임을 물어 손해배상을 받게 됐다.대구지법 민사13단독 김성수 부장판사는 대학생 A씨가 B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B씨는...
이 남자는 한때 환호 속에서 살았다. 그가 기타에 손을 얹으면 수천 명이 열광했고, 숙소 앞에는 항상 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홀로 택배 상자를...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택을 공개했다가 ‘건물주 논란’에 휩싸인 혜민(47) 스님이 15일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 많은 분들께 불편함을 드렸다”며 “모든 활동을 내려놓고 대중...
코로나 양성 판정 이후 겪인 일을 담은 책 '코로나에 걸려버렸다'를 펴낸 김지호씨.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국내 확진자가 3만명을 바라보는데 언론에 등장하는...
14일 민주노총 등의 집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린 가운데 서울 여의도에서 전국 민중대회가 열리고 있다. 민노총 등은 현행 집회 기준에 따라 99인 이하로 쪼개기 집회를 여의도 및 도심...
[아무튼, 주말] 설악산 실종자 조모씨의 생존기
지난달 중순, 홀로 설악산을 오르던 70대 남성이 길을 잃었다. 사흘 동안 산속을 헤맸고, 기력이 다할 무렵 기적적으로 119구조대에 구출됐다. 반응은 엇갈렸다. ‘구조돼서 다행’이라는...
생후 16개월 입양아 학대 치사 혐의를 받는 모친 장모씨가 11일 오전 서울 양천구 남부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은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동맹과의 관계 회복을 공약으로 내건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가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한미 관계는 보다 안정적인 궤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동맹을 거래 관계로 여겨 한국을 궁지에 몰았던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현안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우리 입장이 더...
원로 배우 송재호(83)가 7일 오후 숙환으로 별세했다.배우 송재호. /연합뉴스고인은 1939년 평안남도 평양 태생으로 동아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해 1959년 부산 KBS 성우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박지선 母 유서엔 ‘딸, 피부병 악화로 힘들어해…딸만 혼자 보낼 수 없다’
개그우먼 박지선(36)씨가 2일 자택에서 모친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된 사건과 관련, 본지 취재 결과 모친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유서엔 ‘딸이(박씨가) 피부병 때문에 힘들어했으며, 최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장 후보 추천위원 위촉식에서 박병석 국회의장의 모두발언을 듣고 있다./국회사진기자단추미애...
추비판 검사 하루새 4배 늘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29일 윤석열 검찰총장을 겨냥한 본인의 잇단 감찰 지시를 ‘감찰권 남발’이라고 비판한 이환우 제주지검 검사에게 ‘보복’을 예고한 것과 관련, 일선 검사들의...
28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선산에 마련된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장지에서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왼쪽부터),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홍라희 전...
80명의 동문이 경기 용인에 한 골프장에서 골프 모임을 가진 자리를 계기로 총 31명이 코로나에 집단 감염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27일 중앙방역대책본부(방대본)가 밝혔다. 방대본에 따르면...
이건희가 남긴 유산
“우리나라 경제 모든 분야에서 1등 정신을 아주 강하게 심어주신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26일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빈소를...
1972년 서울 장충동 자택에서 (왼쪽부터 시계방향)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이명희 신세계 그룹 회장,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이인희 전 한솔그룹 고문, 이재용 삼성그룹...
입력 2020.10.25 13:10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지난 2005년 구미를 방문해 직원들을 격려하는 모습. /삼성의인부용 용인물의(擬人不用 用人勿疑).‘믿지 못하면 맡기지 않고, 일단 맡겼으면...
이건희 회장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 78세.1942년 에 태어난 고인(古人)은 부친인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北 피격 공무원 친형인 이래진씨가 24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6번 출구 앞에서 열린 北 피격 사망 공무원 추모 집회에 참석해 추도사 및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 /뉴시스북한군의...
윤석열 검찰총장은 22일 열린 국회 법사위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라임·옵티머스 관련 '부실 수사' 의혹과 추미애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 및 검찰 인사와 관련해 작심한 듯 비판...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