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례를 남기지 않겠다

영미법에는 선결례(先決例)를 중요시하는 ‘doctrine of stare decisis ‘라는 원칙이 있다. 특히 영국에서는 엄격한 선례구속성의 원리가 확립되어 있으며 상급재판소의 선례는 하급재판소를 구속하는 전통이 강하다. 영국 국왕에 충성하는 왕당파(Royalist)를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된 캐나다 또한 예외가 아니다.

선례의 중요성은 역으로 잘못된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 같은 경향은 비록 법원 뿐만 아니라 행정부의 결정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최근 한국인들이 관여된 캐나다 난민신청의 기각은 이런 면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며 예견 가능한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난민신청 수용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이민부의 입장을 먼저 유추해보자. 재판이나 판결은 아니지만 법리(法理)라는 관점에서 보면 가정폭력의 위험과 장애에 대한 편견을 이유로 하는 난민신청을 허가할 경우 부메랑으로 돌아올 선례가 될 것이라는 점을 당국이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도적 차원에서 고려하고 구제해야 할 사안이 얼마나 많을까? 난민신청의 기각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난민을 신청한 한인들의 그 안타까운 사정도 헤아려 보자. 가정폭력이나 장애자에 대한 처우문제가 캐나다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거나 극히 열악한 환경이라는 사실을 한국인이라면 전혀 부인할 수 없으며 난민신청까지 해야 했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또,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신청이라도 해보겠다는 심리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기각의 가능성보다는 희망의 동아줄이 더 크게 보일 수 있다.

반면, 제 3자적 입장에서 볼 때 아프리카나 북한도 아닌 한국에서 난민을 신청한다는 자체가 납득이 가질 않으며 기가찰 노릇이다. 개인적 욕심 때문에 국가의 명예와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다는 일각의 비난은 차치하고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성과는 별개로 기대감만을 악용하거나 제도상의 맹점을 이용해 자신들의 배만 불리려는 사람들은 없는가 하는 점이다. 이점과 관련해 한 변호사의 말은 시사하는 바 크다.

그는 “언론 보도의 배경과 저의마저 의심스럽다”면서 “가능성은 없다고 조언하는 것이 일반적임에도 불구하고 인도적 차원이라는 난민신청 절차상의 최후 수단까지 활용해 보자는 무모함이 능력 혹은 가능성으로 둔갑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고 꼬집었다.

<이용욱 기자 lee@v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