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갑식 선임기자 꿈도 시작은 소박했다 그런데 욕망이 불타오르는 순간 그것은 늪이 돼
아버지·어머니와 임금님마저 삼켜버렸다 계절은 이렇게 아름다운데…옛날에 잘사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의 헌법(憲法)은 딱 두 줄이었습니다. '모든 백성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단, 임금보다 덜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임금님은 자기가 나라 다스리느라 고생했기에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나라엔 관리들이 많았습니다. 누군가 의무를 어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임금님은 그래도 못 미더워 몸소 궁성(宮城) 밖을 다녔습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자기보다 더 행복한 촌장(村長)을 발견했습니다. 임금님은 그 벼슬을 빼앗았습니다. 그래도 사내가 행복해하자 그의 예쁜 아내와 착한 아들·딸을 죽였고 다음에는 사내를 거지로 만들었습니다. 임금님도 스스로 너무 모진 게 아닐까 뉘우쳐 보았습니다. 그래도 결론은 같았습니다. "헌법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어!"

임금님은 마침내 사내를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거기서 고운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이 궁금해 가 보니 지푸라기, 나무젓가락, 밥풀이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행복하구나!" 임금님이 떨며 독배(毒杯)를 건네자 사내는 오히려 즐거워했습니다. "잘됐군요. 하늘에서 가족을 만나게 됐으니…." 질투에 몸 단 임금님은 "너에게 질 순 없다"며 독배를 빼앗더니 냉큼 자기 입에 부었습니다.



서울 운현궁 터 근처에 한의원이 있었다. 세상을 고통에서 구하자며 할아버지가 세워 3대(代)째 내려오던 그곳이 얼마 전 사라졌다. 부지런하고 불우이웃 돕기에도 남달랐던 주인이었다. 그의 때아닌 영락(零落)이 궁금해 수소문해봤다.

퀭한 눈빛의 50대가 털어놓는 스토리가 허무했다. "아내와 두 아이를 미국 보냈잖아. 손님은 주는데 타지(他地)에서 처자식 고생할까 봐 빚을 썼지. 넘어갔어, 경매(競賣)로." 사나이 실패,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지만 결말이 괘씸했다.

"마누라와 아들은 연락도 없어. 딸만 몰래 전화해 울더군. 자기들은 잘 지낸다며…."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기러기 아빠'의 말로(末路)를 이렇게 목격했다. 그에게 건넬 수 있는 건 쓴 소주 한잔, 말 한마디뿐이었다. "꼭 재기하십시요."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박완서(朴婉緖)의 소품 '마지막 임금님'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남을 못 이기곤 못 배기는 우매한 임금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욕심이 너무 커 그걸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삶을 용납하지 못한다." 평론가 박덕규의 해설이다.

한의(韓醫)의 꿈도 시작은 소박했을 것이다. '남보다 조금 더 앞서보자'는 그 작은 욕망이 괴물이 돼 가족을 손익(損益)이란 차가운 관계로 만들고 말았다. 만일 그에게 이리 말했던들 들었을까. "사실…, 김치찌개 한 그릇에 온 식구가 숟가락 꽂고 다투는 게 행복인데요."



'아버지의 마지막'을 목도하며 '마지막 임금님'을 떠올리다 보니 주변이 온통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군상(群像)투성이다. 한 대학 후배는 갓 부장된 자기 회사 상사의 말에 통음(痛飮)했다고 한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그의 말은 이랬다고 한다.

"내 3년은 더 해먹어야겠는데…. 아무래도 네가 걸리적거리니 나가 달라!" 그 말을 한 이는 자신의 삶만이 영생불사(永生不死)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다. 어디 '마지막 부장님'뿐이랴, '현대판 임금님'은 연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날 위해 몸 던지는 이는 없고 다 제 살 길만 찾는다" "내가 기업 있을 땐 안 그랬다" "남 탓하는 사람 성공 못한다"…. '현대판 임금님'은 자신이 허무(虛無)에 젖어 있는 동안 주변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4·27 재보선에서 여당이 참패하자 특히 한나라당 수도권지역 의원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그중 한 의원이 딸이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 때문에 아내가 울먹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의 아내는 매일 관내 복지관을 돌고 있다. 그 수가 열개가 넘으니 식모(食母)도 이런 식모가 없다. 그게 벌써 3년째다. 물론 목표는 남편의 재선, 몇 표 더 얻자는 '소망'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저녁때만 되면 팔다리가 퉁퉁 붓기 일쑤인데 딸이 앞치마를 넣어둔 핸드백을 보고 한마디 던졌다는 것이다. "엄마, 너무 냄새나." 앞치마 빨아주겠다는 '효도'까지 기대한 건 아니지만 격려는커녕 '짬밥 냄새' 타박하는 철부지의 말에 아내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보고 뺨 한 대 올려붙이려다 겨우 참았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오월이다. 가정의 달이고 계절의 여왕(女王)이다. 그렇게 소중한 하루하루인데 임금님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두터운 욕망의 담장 속에 틀어박혀 세월을 잊고 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햇빛 좋은 이 봄이 오히려 애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