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아침, 집을 나서기 전 나는 거울 앞에 선다. 짧은 회색 패딩에 검은색 츄리닝 그리고 전형적인 머리 스타일. 밖에 나가면 나와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겠지만 괜찮다. 그게 유행이니까.

 

하지만 밴쿠버에서의 아침은 다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어떤 집단의 ‘멋’에 맞춰 꾸며야 할지 모르겠다. 다양한 인종이 저마다의 신체조건을 가지고 취향껏 꾸미는 밴쿠버에서는 내 멋을 판단할 잣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결국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었는가?’ 라는 오로지 ‘나’에게 초점을 맞춘 질문만이 남는다.

 

한국에서만 살아온 나로서는 매일이 경탄의 연속이었다. 손을 잡고 걷는 레즈비언 커플, 장애인의 버스 탑승을 위해 운전석에서 일어나 도와주는 버스 기사,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는 교수, 이민 2세 친구의 6개국이 넘는 혈통 소개.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내가 짧은 기간 느꼈던 자유로움을 오랜 기간 느껴왔을 이곳 사람들은 자신답게 살아도 괜찮다는 안정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과 다른 삶의 형태가 있음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면서 말이다.

 

캐나다는 외국인과 자국민의 외연이 불분명하다. 캐나다는 1971년 세계 최초로 다문화주의를 표방한 이래 적극적인 포용 정책을 펼쳐왔다. 현대의 캐나다는 여러 인종의 수용에서 그치지 않고 장애인, 성소수자, 소수민족 등 다양한 정체성까지 아우르는 공존의 가치를 추구한다.

 

물론 다양한 형태의 삶이 보인다고 해서 그 사회가 성숙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일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하는 사회에서 성숙을 논할 수 있을까?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고, 단 한 사람만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는 근대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말처럼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숙고와 노력의 가치가 값지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연세대 문헌정보학과 2학년(UBC 컴퓨터 사이언스) 최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