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백 명을 상대할 자가 누구인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군인 백 명을 상대합니까.”
작지만 야무지던 석순 언니가 따지고 들자, 중대장이 병사들을 시켜 석순 언니를 앞으로 끌어냈다.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군인들은 닭 껍질을 벗기듯 석순 언니의 몸에서 옷을 벗겼다. 석순 언니의 몸은 깡말라 사내아이의 몸 같았다. 겁에 질린 소녀들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소녀들을 한 명 한 명 씹어먹을 듯 바라보는 중대장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얼른 고개를 떨어뜨렸다. 막사 뒤에서 수십 개의 못을 동시에 박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곧 끔찍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김숨 작가의 <한 명> 中
위안부 피해와 참상을 알린 김숨 작가의 소설 <한 명>이 역사상 처음으로 영문판으로 번역 및 출간되어 화제다.
“One Left”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번역본은 UBC에서 한국 문학 및 번역 교수로 재직 중인 브루스 풀턴(Fulton) 교수와 그의 아내 윤주찬 씨가 번역한 많은 책 중 한 권이다. <한 명>을 비롯해 여러 한국 장편집과 단편집을 번역한 풀턴 부부는 10년에 걸쳐 한국의 역사 관련 많은 주제들을 바탕으로 한국문학의 영문 번역에 있어 힘써오고 있다.
풀턴 교수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을 했으며, 윤주찬 씨와 ‘PEN/Heim Translation Grant’와 더불어 여러 번역 문학 기금을 수상한 바 있다.
<한 명>은 위안부 소녀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장편 소설이다. 세계 대전 이후 시간이 흘러 단 한 명의 위안부 생존자가 남은 시점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담는다.
주인공 할머니는 자신이 위안부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살아간다. 집 근처 강가에서 다슬기를 잡다가 끌려간 13살부터 위안소에서 지낸 끔찍한 7여 년, 그리고 스무 살에 한국땅에 겨우 돌아와서 겪은 갖은 수모와 역경을 담아낸다. 90세 할머니로서 살아가는 현재와 전쟁 당시 13살 소녀였던 과거를 오가며 괴리감을 강조하고, 여러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고스란히 담아낸 수많은 각주들이 인상적인 책이다. 윤주찬 씨와 풀턴 교수는 이러한 각주들을 최대한 자세하게 번역하려고 노력했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첫 장편소설 <한 명>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제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된 ‘소설 아닌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혹한 전쟁터의 참상과 어린 소녀들의 트라우마들을 집중적으로 다룬 김숨 작가의 소설은 풀턴 교수와 윤주찬 씨의 이목을 끌었다.
김숨 작가는 오랜 조사를 기반으로 각 소녀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는데, 윤주찬 씨는 책의 제목처럼 한 명 한 명 각자 다르고 특별한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취지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최종으로 이 책을 번역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번역과 출판 과정에 있어 어려움도 많았는데, 이는 풀턴 교수뿐만 아니라 위안부 관련 내용을 번역하려 시도한 다른 번역가들 또한 겪은 문제였다. 풀턴 교수와 친분이 있던 샌프란시스코 대학의 모 교수가 처음으로 번역을 시도하려 했으나 몇몇 한국인 학자들에 의해 질타를 받았으며 심지어는 번역 활동을 중단하라는 무언의 압박까지 있었다고 한다. 위안부의 참상과 역사를 활발히 연구했고, <한 명> 번역본의 말머리를 쓴 오봉완 교수(조지타운대 한국학 교수) 역시 한국 학우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넘어야 할 난관들이 많았다. 한국 문학이 미국에서 마이너한 장르인 만큼 출판사를 찾는 게 어려웠으며, 한국 출판사 역시 수익이 적다는 이유로 번역본 출간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소속된 출판사가 없는 번역가 출신으로서 출판사 측과 갈등도 잦았지만, 어렵사리 김숨 작가와 직접 만나 번역본 출판을 강행했다고 전했다. 풀턴 교수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별세하시기 전에 최대한 빨리 번역본을 출간하는 게 목표였지만 출판사와의 문제로 인해 몇 년 늦어진 것에 깊은 아쉬움을 표했다.
번역본 출간 이후에도 기대만큼 화제가 되지 못했다. 큰 영향력을 가진 한국 문학 번역원 및 언론사들은 민감한 주제라고 회피했고, 평소에 풀턴 가족과 친분이 있던 언론사마저 비슷한 이유로 기사를 쓰는 것을 꺼려했다. 풀턴 교수와 윤주찬 씨는 이들의 수동적인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실망감을 표했다.
풀턴 부부는 <한 명> 번역의 취지가 일본과 한국의 대립과 갈등이 아니고, 이 책을 번역함으로써 위안부 소녀들을 비롯한 다른 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릴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위안부는 역사에 이어져 오던 수많은 인신매매와 성착취 사건들의 일부이고, 단순히 두 나라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함과 동시에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전범을 단절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전했다.
또한, 풀턴 교수는 <한 명>을 번역함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참사를 통해 무작위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희생된 이들을 통계의 일부로만 여기지 않고 전쟁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피해를 당한 개개인, 또한 그들 가족과 친지의 이야기를 깊숙하게 파고들면서 그들의 관점과 비애를 이해하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풀턴 교수와 윤주찬 씨는 내년 2월에 UBC에서 대대적으로 <한 명>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이 행사에는 오봉완 교수와 UBC에서 한국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로스 킹(King) 교수도 참석하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행사인 만큼 위안부에 관심 있는 한인이라면 참석해도 좋을 것 같다.
UBC KISS 하늬바람 8기 학생 기자단
김현정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