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각만이 그들의 언어… 장애인 부부의 삶, 3월 세상을 울린다

조선일보=변희원기자

최종수정: 2012-01-30 11:00

암스테르담 다큐영화제 아시아 첫 대상 '달팽이의 별'
시·청각 장애인이 감상할 수 있는 '배리어 프리'로 개봉

느릿느릿 세상과 소통하는 시청각 중복 장애 남편과 척추 장애 아내의 일상 담겨
"2년간 서두르지 않고 촬영… 동정의 시선은 담지 않았다"

이승준 감독
밥상을 차려놓은 아내는 남편의 손을 반찬 위에 올려놓는다. 아내는 손가락으로 남편의 손등을 톡톡 친다. 반찬마다 돌아가며 이 과정을 거친 뒤에야 부부는 손을 놓고서 밥을 먹는다. 남편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시청각 중복 장애인. 척추 장애로 어린아이만한 키의 아내는 밥을 먹을 때마다 '점화(點話·기존의 점자를 손등이나 손가락 등에 찍어 대화하는 방식)'로 남편에게 밥과 반찬의 위치를 알려준다.

이승준(41) 감독의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의 한 장면이다. 남편 조영찬(41·시각 1급과 청각 5급 장애)씨와 아내 김순호(49·지체장애 3급)씨 부부를 다룬 이 다큐는 지난해 11월 제24회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IDFA)에서 장편부문 대상을 받았다. '다큐멘터리계의 칸 영화제'에 비유될 정도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IDFA에서 한국 최초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최초의 대상 수상이다. 이 다큐는 3월22일 국내에서 개봉한다. 일부 영화관에선 장면을 음성으로 해설해주고 한글 자막도 넣어 시·청각장애인도 감상할 수 있는 '배리어 프리(barrier-free)' 영화로 상영된다.

29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이승준 감독은 "세계에서 3000여편이 출품될 정도로 영화제 규모가 크고, 거장들의 작품들도 많아 기대도 안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본 사람들마다 '부부가 아름답다, 사랑스럽다'며 칭찬을 했다. 상을 받은 건 이 부부의 힘인 것 같다"고 했다.

'달팽이의 별'은 조씨·김씨 부부가 밥을 먹고, 산책을 하며,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일상을 담았다. 조씨는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을 완전히 잃었고, 청각은 서서히 없어진 탓에 듣지는 못해도 말은 할 수 있다. 촉각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나무를 껴안고 거친 겉면을 쓰다듬는 것이다. 일명 '나무와의 데이트'다.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의 한장면. 시청각 중복장애를 가진 영찬(왼쪽)씨와 척추장애인 아내 순호씨는 남들보다 느리지만, 특별한 삶을 살아간다. /영화사 조아 제공

조씨는 점자 단말기를 통해 글을 읽을 때를 제외하고는 의사소통과 일상생활을 아내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어릴 때 사고로 생긴 척추장애 때문에 키가 성인 남성의 허리춤에 겨우 닿을 정도인 김씨는 언제나 남편의 곁에서 눈과 귀가 돼준다. 조씨가 대학(나사렛대 점자문헌정보학과)에서 강의를 들을 때도 김씨는 점화로 그의 손등에 수업 내용을 전달해줬다. 조씨는 2006년 일본에서 열린 시청각장애인 대회에서 점화를 접했고, 한국인으로는 이를 처음으로 배워 아내에게 가르쳤다. 조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현재 미국 헬렌켈러 국립센터에서 재활 및 자립생활 프로그램을 연수받기 위해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이 감독은 2008년 EBS의 의뢰로 다큐멘터리 '원더풀 사이언스-제2의 뇌, 손'을 만들면서 점화를 하는 시청각중복장애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중복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반 대학에 입학한 조씨였다. 감독은 2009년 휴먼 다큐 작품을 만들려다 조씨를 떠올렸다.

"영찬씨를 만나본 뒤로는 완전 빠져들었어요. 세상을 느끼는 다른 촉수가 있는 것 같았고, 문학적인 재능도 있어 언어 표현도 남달랐거든요. 사람이 매력이 있으니 충분히 다큐로 만들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생겼죠."

조씨는 처음에 이 감독의 다큐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남들 눈에 우리 부부가 어떻게 보일지 걱정이다. 기존의 다큐멘터리와 언론에선 장애인이 동정의 대상으로 비쳐졌다"는 게 이유였다. 이 감독은 "동정의 시선으로 찍지 않겠다"고 설득한 끝에 조씨의 동의를 얻었다. "시간 싸움이었습니다. 2년 동안 촬영했는데 서두르지 않았어요. 조씨가 촬영할 기분이 아니라고 하면 그냥 같이 놀기도 했죠."

다큐 제목을 '달팽이의 별'로 붙인 이유는 뭘까. "영찬씨와 인사를 나누고 이름 하나를 물어보는 데도 몇 분이나 걸렸어요. 다른 사람보다 느리게 살아가는데다가, 촉각에 의존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 달팽이를 연상시켰죠.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진 그가 '어린 왕자'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별'을 떠올렸어요."

문학을 좋아하는 조씨는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글로 쓴다. 영화에는 그가 평소에 썼던 글들이 내레이션으로 들어 있다. '가장 값진 것을 위해 잠시 눈을 감고, 가장 참된 것을 위해 잠시 귀를 닫고, 가장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해서 침묵 속에서 기다린다.' 이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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