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옥 남편 오승근, 사업한다며 70억 썼지만

조선일보=유슬기 기자

최종수정: 2012-03-29 10:09

◇오승근, 이제야 부르는 사랑노래


“야심작으로 내놨는데, 모르죠. 여러분이 좋아해야지. 가사는 탤런트 오욱철 씨가 썼어요. 가사를 보는데 이 나이까지 살면서 내가 해바라기 사랑을 했던가 싶은 생각이 드는 거야. 해바라기는 해만 보니까 딴짓을 안 하거든. ‘과연 나는 집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했나?’ 그런 생각도 들고. ‘앞으로는 계속 한 곳만 보며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노래를 하니까 녹음할 때 눈물이 나서 좀 쉬었다 하자고 했어요.”

11년 만의 앨범이다. 2001년, 5년 만에 낸 앨범에서 ‘있을 때 잘해’가 두루 사랑받는 애창곡이 되면서 가수 오승근의 건재함을 알렸다. 그리고 다시 공백이 있었다. 50대 후반, 환갑을 준비하는 의미로 아내와 함께 받은 종합 건강검진에서 두 사람 모두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오승근은 경미한 수준이었지만, 아내 김자옥의 상태는 다소 심각했다.

“3, 4년 전에 우리가 나이 60을 바라보니 종합검진을 해보자 해서 갔는데 나는 그렇게 많이 나쁘지는 않았고 집사람은 나빴죠. 올해가 지나면 수술한 지 5년째 되는데, 그럼 완쾌한 거나 마찬가지라 괜찮아요. 그때 이후로 많이 달라졌죠. 식생활도 많이 바뀌었어요. 집사람은 매운 거, 짠 걸 너무 좋아했거든. 내가 ‘매운 거 너무 먹지 마.’ 그랬는데,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면서 즐겨 먹었어요. 요즘은 밥도 심심하게 먹고, 술은 우리 두 사람 다 못 마셔요. 집사람이라도 좀 할 줄 알면 좋겠는데 같이 못 먹어. 한번은 분위기 잡는다고 와인 한 병을 마셨다가 둘 다 도저히 못 버티고 쓰러져 잤어요.”

부인이 수술실에 들어갈 때 손을 잡고 눈물을 쏟았다는 오승근의 이야기, 그 후로 건강식으로만 식단을 짜 매일 손수 밥상을 차렸다는 이야기는 두 사람의 발병설만큼이나 화제였다. 사람들은 ‘순정파’라고 불렀지만, 본인은 손을 내젓는다.

“내 평생 ‘사랑한다’ 소리도 한번 제대로 못 했어요. 그게 목구멍까지는 나오는데 입 밖으로는 안 나와요. 그래도 요즘은 어깨가 아프다고 하면 주물러주고, 등도 두드려주고, 어디 간다고 하면 데려다주기도 하고 그래요. 그러면서 ‘내가 사랑한다고 말은 안 해도 이게 다 표현이야.’ 그러죠.” 아무래도 말로 하긴 쑥쓰러웠나 보다. 오승근은 아내에 대한 사랑을 담은 노래 ‘해바라기 사랑’을 타이틀로 앨범을 냈다.


 
젊음도 사라지고 열정도 사라진 뒤에 사랑을 말한다. 아마 그 사랑, 온도는 높지 않을지 몰라도 순도는 분명 높을 것이다. 듀엣 ‘금과 은’, 노래 ‘처녀 뱃사공’으로 알려진 가수 오승근이 새 앨범을 냈다. 타이틀곡은 ‘해바라기 사랑’. 한 곳만 바라보며 당신만 사랑하리라는 이 노래는 부인인 배우 김자옥에게 바치는 노래다.


 

◇아플 줄도 모르는 채 모든 걸 내게 준 당신은 정말 바보야

1968년 투에이스 1집 ‘비둘기 집’으로 데뷔, 1975년 듀엣 ‘금과 은’을 결성해 ‘처녀 뱃사공’, ‘빗속을 둘이서’ 등을 히트시켰고, 이어 MBC 10대 가수상, KBS 최우수남자가수상 등을 수상했던 오승근은 1984년 배우 김자옥과 재혼한 뒤 공백기를 갖는다.

‘가수 오승근’이 ‘사업가 오승근’의 삶을 살던 시절이다. 그의 노래를 좋아했던 팬들에게는 여러모로 서운한 시간이었고, 부부에게도 평탄한 시절은 아니었다. 건축 인테리어, 여행사, 광고회사 등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가던 그의 사업은 시기가 약간 이르거나 늦는 식으로 경기를 빗나갔다. 얼마 전 부부가 함께 출연한 아침 프로그램에서 그가 사업에 쓴 돈이 70억 원대였다는 게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액수 때문이 아니라 김자옥의 노고 때문에 말이다.

“여자는 남자에게는 없는 지혜가 있어요.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나한테 먼저 물어보고 상의했으면 좋았을 거 같은데 도통 말을 안 해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요즘 뭐해?’라고 물으면 꼭 일이 생기더라고요. 비록 돈은 잃었지만 그보다 더 값진 경험을 얻었다고 생각해요.”(김자옥 인터뷰 중)

오승근·김자옥 부부는 작년에 함께 환갑을 지났다. 1984년 결혼 후 27년 동안 함께한 서로의 수고를 도닥이는 시간이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두 번째 결혼이었다. 양가는 물론 지인들의 반대도 심했다. 당시 오승근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그 딸은 2010년에 시집을 갔다. 엄마 김자옥은 결혼식 내내 눈물을 훔쳤고, 아빠 오승근은 막내아들 영환과 함께 축가를 불렀다. 친딸이 아니었기에 더 정성껏 준비해주고 싶었다는 김자옥의 마음은 딸에게도 전해졌다. 이제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두 사람, 오승근·김자옥 부부. 궁금해졌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을까.

“명동에 친한 형이 한 분 있었어요. 집사람도 좋아하는 오빠였죠. 그 양반이 미용실을 했어요. 유지승미용실, 유명했지. 그분 밑에서 배운 사람이 박준, 이런 사람들이에요. 웬만한 연예인들은 다 그 형한테 머리를 했으니까. 이 파마도 그 형한테 끌려가서 처음 한 거예요. 형이랑 친하니까 놀러도 자주 갔는데, 한번은 집사람이 명동에 놀러왔어요. 물론 서로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따로 본 건 처음이었죠. 형이 어느 날 저녁식사를 같이하자고 해요. 남한산성에 있는 한정식집으로 드라이브 겸 해서요. 형하고 형수, 나하고 집사람 넷이 가려고 했는데, 친구가 ‘너 임마, 그러다 소문나’ 그래서 ‘그럼 너도 같이 가자’ 해서 친구까지 다섯이 갔죠. 나는 그다지 알려진 얼굴이 아니지만 집사람은 금방 보면 아니까. 그때 같이 밥을 먹은 게 인연이 돼서, 약속을 몇 번 하고 그랬어요. 한 달에 한 서너 번은 본 거 같아요. 앞에 영양센터에서 닭을 사와서 같이 뜯어먹기도 하고요.”

아침방송에서 밝혔듯 프러포즈는 김자옥이 했다고 한다. 서로 마음은 알겠는데, 말을 안 하니 답답한 마음에 먼저 한 거다.
“결혼식은 좀 급하게 했어요. 당시 집사람이 드라마를 하던 중이라 신혼여행도 못 갔어요. 결혼식은 여의도에 있는 공군회관에서 하고, 내가 직접 운전해서 유성온천에 갔다가 다음 날 바로 올라왔죠. 아니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억이 선명하게 잘 나지? 내가 기억력이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닌데. 우리 집사람은 결혼했을 때부터 나를 ‘아빠’라고 불러요. 막내를 낳기 전부터 부르는 애칭이 ‘아빠’야. 나는 ‘여보’ 아니면 ‘엄마야’ 그러지.”

◇자옥이 가는 길에 아픔이 없어라
김자옥의 진짜 아빠, 그러니까 부친은 김상화 시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을 만큼 그녀에게는 기둥 같은 존재였다. 김상화 시인 역시 셋째 딸 김자옥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 시로 남겼을 정도다.

‘콩알만 한 우리 자옥이/ 쪼그마한 내 딸 자옥이/ 바람이 불면 어쩌나/ 굴다가 구르다가 다칠라/ 자옥이 가는 길에 아픔이 없어라/ 사뿐사뿐 꿈을 밟고 가거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김자옥은 ‘공주는 외로워’(1996)라는 노래를 불렀다. 음반은 6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본인은 밝은 노래 덕분에 슬픔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쥐면 깨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공주처럼 키워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외로울 만도 했다. 지금도 김자옥의 가족사랑은 진하다. 각자의 생활이 바쁜 와중에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가족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거나 차를 마신다. 딸이 결혼한 뒤로는 사위도 함께다.

“집사람은 권사예요. 나는 (신앙심이) 좀 덜해서 집사로 있고요. 주일은 항상 지켜요. 우리 애는 주일교사여서 유치부 아이들 가르치고요. 예배를 드리고 나면 온 가족이 모여서 식사를 해요. 다들 바빠도 이 시간만큼은 꼭 지키려고 하죠. 캐나다에서 공부하다 온 우리 막내아들은 지금 공익근무 중이고요.”

두 사람이 서른여덟에 얻은 막내 영환 군은 음악을 좋아한다. 게다가 재능도 있다. 가수의 아들이 또 가수하는 게 좋아 보이지 않아 권하지는 않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재능은 아빠보다 낫다고 한다.

“우리 아들도 음악에 재능이 있어요. 본인이 그렇게 좋아해. 한 번 들으면 그걸 바로 연주할 수 있다는 거예요. 목소리도 매력 있고 가진 게 많아요. 근데 제가 그랬죠. ‘그건 한때다. 악기 만들어서 연주하는 것도 한때다. 그러니까 뮤지션이 되지는 마라. 악기를 조금씩 다룰 줄 아는 건 좋지만 거기 빠지지는 마라. 최고 일인자가 아니면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먼저 작곡과 편곡을 배우고 녹음 믹싱도 할 수 있는 엔지니어가 돼라. 그러면 프로듀싱도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대학에선 그걸 공부했어요. 내가 볼 때는 나보다도 귀가 더 좋아요. 굉장히 예리해요. 내가 노래를 할 줄 알아야 남이 노래하는 걸 들을 줄 알게 되는 거거든. 악기도 지금 한 네 가지 정도는 다룰 줄 알아요. 드럼, 기타, 피아노, 베이스. 기술이 여러 개 있어야 하나가 안 되면 다른 걸 하죠.”

지금 오승근이 아들을 향해 하는 이야기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했던 이야기다.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 하는 걸 극구 반대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공업학교에 진학했는데, ‘먹고 살려면 한 가지 기술은 꼭 있어야 한다’는 부친의 뜻이 워낙 강경했다.

“집에서 무지하게 반대했지. 아버지한테 억지로 끌려서 공업학교에 갔어요. 아버지도 나랑 똑같이 ‘남자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나중에 커서도 그걸로 먹고산다’ 하셨죠. 하지만 끝내 기술은 못 가졌지. 난 노래가 더 좋았으니까.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남자가 가발을 쓰고 신발도 캉캉구두라고 높은 거 신고 무대에서 광대짓하는 건 봐줄 수가 없다. 그러려면 나가라.’ 저는 공업학교 토목과에 다녔어요. 그런데 몰래 기타를 배우고 음악을 배워서 음대에 갔죠.”

없는 자식으로 생각하겠다던 아버지는 처음에는 아들이 TV에 나오면 “돌려, 돌려!” 하셨다. 그런데 말로는 다른 데로 돌리라 하면서도 몇 번 나오니 곁눈질로 보곤 하셨단다. 어머니는 아들의 꿈을 감싸주셨고, 아버지는 반대 안 하고 화를 안 내시는 것만도 감사했다. 2남1녀 중 막내인 오승근은 연년생인 형이 40대 초반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의 장남이 되었다. 아버지를 도와 사업에 뛰어든 것도 그때 즈음이다.

“처음 기타를 친 게 중학생 때예요. 매일 치고 또 쳐서 두 달 만에 마스터했어요. 그때 나온 게 비틀즈 음악인데, 영상으로 보기는 힘들었으니까 라디오를 끼고 살았죠. 노래하면서 계속 기타 치는 게 취미였고, 팝송을 많이 부르다 보니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그룹을 만들게 됐어요. 그게 소문이 나면서 미8군에 들어가 공연도 하게 됐죠. 머리는 못 기르니까 가발을 쓰고 미군에 들어가 노래하기 시작한 게 1967년. 고등학교도 다니는 둥 마는 둥 해서 졸업하고 대학교에 들어갔죠. 학교를 많이 등한시했지. 서수남, 하청일 이런 분들도 다 미8군 출신이에요. 그때 그 그룹이 그대로 나와서 공연을 했는데, 그게 ‘영 에이스’예요. 제가 직접 작사, 작곡도 하고요. ‘사랑을 미워해’를 남자들이 기타 치면서 노래하면 음악다방에서 여학생들이 “와-!” 하고 쳐다보기도 했어요. 지금도 작곡을 계속해야 하는데 꾀가 나서 그런지 잘 안 돼. 사람도 계속 노래하지 않으면 소리가 기계처럼 녹이 슬거든요.”

◇Epilogue
이날 이태원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카페에 도착해 외투의 눈을 털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킨 후 오승근은 아이패드를 꺼냈다. 검은색 퍼 코트와 후드 니트, 수납공간이 넓은 가방은 아내 김자옥이 코디해준 것. 아이패드는 아들이 선물해준 보물이다. 스마트폰을 쓰고 싶어도 화면이 너무 작아 볼 수가 없다는 그는 안경 안에 돋보기를 하나 더 끼워넣고는 아이패드 여기저기를 두드려본다. 원래 흰색을 좋아하지 않지만, 얼마 전 1층으로 옮긴 집의 벽과 소파, 쿠션, 침대보 등을 모두 화이트 톤으로 바꾸었다. 아내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수로 데뷔한 지 44년, 지난 세월은 그에게 젊음을 가져갔고 때로 돈도 많이 잃게 했다. 얼굴만 가리면 여전히 마음은 20도 되고 30도 된다며 웃음 짓던 그는, 문득 10년 후에도 노래할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했다. 하지만 괜찮다.
이미 많은 걸 얻었으니까. 뭘 얻으셨나요? 내 자식들. 그리고 우리 가족. 사랑을 말할 수 있는 나이는 이제부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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