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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걸림돌 지나, 나 자신과 온전히 만났을 때”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5-10-30 13:28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26-밴쿠버 여성회 이인순 회장
순탄하기만 했다는 인생은 흔치 않다. 특히 초기 이민자들 중 몇몇의 삶은 크고 작은 걸림돌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낯선 땅 캐나다에 적응하기 위해 애썼던 날들, 하지만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해 마음 쓰렸던 순간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뒤 마침내 만나게 된 자유로움이, 그녀의 40년 이민사(史)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밴쿠버 여성회의 이인순 회장(사진)을 만났다.



“40년 전 캐나다, 영어학교 다니기만 해도 생활 보장”

일곱 남매의 맏으로 자라난 아이는 천성이 쾌활했다. 붙임성도 좋아 대학(이화여대 건강교육)에 들어가서는 학생회장 노릇을 했다. 공부가 적성에 맞아 대학원까지 진학했고, 그러는 사이 남자를 만나 결혼도 했다. 그리고 엄마가 되었다, 세 아이의. 

그로부터 얼마 후 그녀는 자신의 지도 교수로부터 “지상 낙원”에 대해 듣게 된다. 교수는 그 곳을 캐나다라고 했다. 당시 대학의 시간 강사였던 그녀는 별생각 없이 캐나다 이민을 신청했다. 아이 셋과 남편,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평생 모시게 될 시할머니와 함께였다.



그때가 언제였죠?
이민 신청 후 몇 개월만에 캐나다행이 허락됐어요. 1975년, 우리 가족이 처음 정착한 곳은 밴쿠버가 아닌 토론토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외환관리법이 매우 엄격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외로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돈이 1인당 200달러로 정해져 있었어요. 저희는 1200달러까지 환전할 수 있었습니다. 시할머니까지 모두 여섯 명이었으니까.

정착 자금으로는 많이 부족했을 것 같은데요.
800달러짜리 중고차 한 대 사고, 의료보험 신청하니까 남는 돈이 없었어요.

그럼 생활은 어떻게 했습니까?
지금 막 이민 온 사람들에겐 가당치도 않은 얘기로 들리겠지만, 그때만 해도 영어학교에 다니기만 하면 나라에서 돈이 나왔어요. 우리 부부가 챙길 수 있는 돈이 매월 2000달러. 먹고 사는 건 둘째치고 저축까지 할 수 있었지요. 20달러 정도면 원하는 식재료를 마음껏 살 수 있던 시절이었어요.

”지상 낙원”이라는 교수의 전언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군요.
그런데 저희 부부는 영어학교 혜택을 그리 오래 받지는 못했어요. 영어 배우러 다닌 지 3개월 만에 취직이 됐거든요.

일자리를 잡게 된 곳이 궁금한데요.
캐나다 보건부에 들어가게 됐어요. 한국에서 공부했던 것들을 인정받은 거였죠.

이민 오자마자 캐나다의 공무원이 된 거군요. 의사소통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나 봅니다.
웬걸요. 그렇지 않아요. 일하면서 처음에는 쥐구멍만 찾아다녔던 것 같아요. 영어로 읽고 쓰는 건 어느 정도 자신 있었지만 말하는 실력은 거의 바닥이었어요. 은행 가서도 많이 버벅댈 수밖에 없었어요. 은행원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니까…. 이제 막 캐나다에 온 사람한테 뭔 말을 그리 빨리 하는지, 그 은행원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지요.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캐나다 사회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이 점점 달라진 거였지요. 한국에 있을 때는 모든 걸 “빨리 빨리” 처리해야 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이곳 캐나다 사람들은 무척 느긋해 보였습니다. 거리에서 뛰어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고…. 어찌됐건 이 문화에 적응하고 사니까, 결국 살게 되던데요.

다른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식구 여섯 명이 함께 살 집 구하는 것, 이게 가장 버거운 일이었어요. 1년에 이사만 대여섯 번은 족히 다녔거든요. 그러다 정부보조주택에 입주하게 됐습니다. 방 네 개짜리, 새 집이었습니다. 너무 행복했지요. 그 순간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직장에 좋은 집, 누가 보더라도 넉넉한 이민생활이었을텐데 밴쿠버까지 왜 오게 된 건가요?
저는 계속해서 토론토에 살고 싶어 했지요. 그런데 남편 직장이 밴쿠버로 정해지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남편 뜻에 따라야 했으니까요. 1981년, 토론토 생활을 정리했지요.




<▲ >




“이제 상(賞) 받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30여 년 전의 밴쿠버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글쎄요. 제가 옛날 얘기를 해줄 입장은 아닌 것 같아요. 밴쿠버에 온 지 거의 20년 동안은 회사와 집만을 오고가는 생활만 했으니까요. 
(그녀는 1982년 임상병리사 시험에 합격한 뒤 곧바로 BC바이오랩에 취직했다. 당시 직원은 총 500명이었는데, 한인으로는 이인순씨가 유일했다.)  

왜 그렇게 단조로운 삶을 살게 된 거죠?
시할머니를 모시며 살았으니까요. 100세까지 사시다 지난 2000년에 돌아가셨어요. 몸이 편찮으실 때는 제가 병시중을 다 책임졌지요. 어찌됐건 시할머니 장례식까지 모두 마치고 난 뒤 남편과 헤어졌습니다.

이혼했다는 얘긴가요?
그랬어요. 당시엔 충격이 컸지요. 그때까지 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시할머니를 위해서, 세 아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했고, 그걸 잘하는 일로 여겼어요. 그리고 이제 상(賞) 받을 일만 남았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결과는 그게 아니었으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아픔을 겪은 혹은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 줄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2000년 이혼하고 나서 처음으로 세상과 마주하게 됐다고 생각해요. 인생관이 달라졌지요. 가족만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혼 후 3년 간 처음으로 나만을 위해서 살아봤지요. 법정 스님 책을 죄다 읽었고, 그림도 배우러 다녔습니다. 그때 내가 그림 그리는 데 소질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습니다.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재능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 그건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결과적으로 이혼이 내게는 나 자신과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된 거였지요.

나만을 위해 살면서 아픔을 치유하게 된 셈이군요.
맞습니다. 괴롭다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끊게 되면, 그 상처는 온전히 본인 몫이 됩니다. 운동도 하고, 취미 생활도 하고, 친구들도 사귀고 하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자녀들 모두 잘 자라 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지금 마음이 편안한 이유겠지요?
1남 2녀, 딸들은 쌍둥이에요. 큰아이가 아들인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습니다. 딸들 중 한 명은 약사고, 다른 한 명은 밴쿠버암센터 유전자 검사실의 디렉터로 근무 중입니다.

모두 반듯한 직업을 갖고 있는데, 그렇게 키운 비결이 있습니까?
아이들에게 특별히 해준 것 하나도 없어요. 사교육을 시킨 적도 없고 공부하라고 잔소리 한 적도 없지요. 아이들이 진로를 고민할 때도 본인들 선택에 맡겼어요. 완전히 방임인 셈이었죠. 단지 조금 내세울 게 있다면, 집안 자체가 공부하는 분위기였다는 것, 이게 다에요. 당시의 남편이나 저나 집에서는 늘 책이나 논문만 읽고 있었거든요. 이런 분위기 탓에 아이들도 공부하는 걸 자연스럽게 생각했을지 몰라요. 

다시 “나”에 대해서 얘기해 보죠. 노년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일까요?
경제적인 어려움이겠지요. 저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병원에서 통역 일은 하고 있는걸요. 어찌됐건 돈에 집착하지 않는 것, 욕심 부리지 말고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것, 이런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럼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않지만, 마음의 평화는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집착도, 욕심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도 없는 그런 평화 말이죠.

밴쿠버 여성회가 만들어진 게 지난 2012년이죠?
예, 지금까지 간신히 간신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고마운 건 시간이 흐르면서 조직을 꾸리는 능력도 조금씩 키워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데, 회원들의 반응이 꽤 좋습니다. 회원들과 함께 걷기도 하고 미술 교실도 운영 중이지요. 11월에는 음식물 쓰레기를 이용한 퇴비 만들기 강연도 선보일 겁니다. 현재 여성회 회원은 총 200명인데,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면 좋겠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웃는, 그런 삶을 위해서 말이지요.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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