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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고 쓸쓸한 이민생활, 무엇이 그대의 위로였습니까?”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5-08-28 11:54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20, 소설가 반수연
그녀의 이민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아니,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접한 문화와 언어 장벽 앞에 한없이 무기력해졌고, 그 무기력함을 한없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위로가 되어준 것이 책읽기와 글쓰기였다. 그녀는 작가가 되었다. 1998년 캐나다에 정착한 소설가 반수연씨(사진)의 이야기다.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것이 가장 힘들었다”


작가로서 그녀의 시작은 순탄했다. 2005년 본국 조선일보 신춘문예, 그해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 <메모리얼 가든>이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후 10여 년간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몇몇 문예지에 자신의 이름이 인쇄되어 나오곤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러다 지난 2014년 재외동포문학상에 대해 알게 됐고, 스케치하듯 써두었던 단편소설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과 수필 <당신의 강한 반닫이>를 서둘러 출품했다. 결과는,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전력을 지닌 그녀가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소박해 보일 수 있는 “가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글쓰기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올해에도 재외동포문학상의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우수상, 단편소설 <박의 귀향>을 통해서였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작가의 길을 희망했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전혀요. 이민오지 않았다면 소설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난 수학강사였어요. 그것도 꽤 인기있었던, 그래서 늘 바쁘게만 살았지요. 한국에선 말이에요.

그런데 왜 이민을 결정하게 된 건가요? 자녀 교육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요, 그때 첫아이가 고작 네 살이었는 걸요. 자녀 교육 때문에 이민을 하게 된 아니에요. 삶의 질을 높이자, 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민 온 이유, 그건 이미 다 잊어버렸어요. 그저 외국에서 한번 살아볼까 하는 마음, 아니면 일종의 객기 같은 게 그 당시 나에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민와서 결과적으론 된통 당했지요.

정착 과정이 순조롭지 않았나 봅니다.
힘들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도 몰랐다는 게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지요. 나는 내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나 열정으로 가득찬 사람인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막상 낯선 땅에 서있고 보니, 호기심은 두려움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흥분은 낯설음으로 바뀌더군요.

정체성의 혼란 같은 거였나요?
내가 보잘것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견딜 수 없었어요. 영어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나의 생각은 나의 말을 통해 드러나는 것인데, 영어로 표현되는 나의 말은 당시의 내가 보기엔 수치스러운 수준이었지요. 거기에서 오는 상실감이 컸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둘째 아이를 갖게 됐는데, 출산이 내가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것, 난 보잘것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런 느낌을 준 것 같습니다.

생계를 꾸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요.
물론이지요. 남편이 현재 교육청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일이 잘 풀린 건 결코 아니었어요. 아이가 자라면서 한국에서 갖고 온 돈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불안한 마음에 샌드위치 가게를 열게 됐어요. 절박함에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먹고 살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어요.

장사는 잘 됐나요?
전혀요. 장사가 너무 안돼서 시간이 늘 남아돌았지요. 그때 자연스럽게 책을 많이 읽게 됐어요. 손님이 기다리는 시간이 고통스러웠는데, 그 고통을 덜어준 것이 바로 책읽기였습니다. 같은 책을 두번, 세번 반복해서 읽다보니 글을 한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가장 무서운 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적당한 실패”


문학에 대한 관심은 예전부터 갖고 있었습니까?
글쓰기는 좋아했지만 문학은 아니었어요. 일기나 편지 정도 쓰는 수준이었지요.

본격적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텐데요.
결국 가게 문을 닫게 됐어요. 말했다시피 장사가 너무 안됐거든요. 어찌됐건 가게를 접은 후부터 몸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하더군요. 여러 차례 수술대에 올랐고, 이때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요. 그냥 생존에 훨씬 가까웠지요. 불치병에 걸린 건 아니었지만, 이러다가 내 인생이 그냥 이렇게 끝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불안했겠군요.
그때 홀로 한국을 나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소중했던 사람들을 모두 만났지요. 영화 제작자로, 극본 작가로 살게 된 친구들이 내게 그러더군요. 글은 수연이 네가 써야 했다고, 너 참 글 잘 쓰는 아이였다고…. 말하자면 친구들이 내가 잊고 지내던 나의 정체성을 새삼 상기시켜 준 거였어요. 밴쿠버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절로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아니었겠지요. 어떤 훈련 과정을 밟았는지 궁금합니다.
애틀란타에 사는 친구를 통해 온라인 창작 캠프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곳에서 3년간 글쓰기에 매달렸지요. 그때 <머나먼 쏭바강>과 <왕룽일가> 등의 소설로 유명한 박영한 선생님의 지도를  받게 됐습니다. 

3년이라면 짧지 않은 시간인데, 그 기간 동안 생활은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간이었어요. 일주일에 30시간 이상 수학 과외를 했고, 하숙도 쳤습니다. 그리고 짬이 날 때마다 글을 쓰곤 했지요. 글쓰기 이외의 다른 것들, 이를테면 취미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던 때였어요.

그 결과가 대단합니다. 2005년 본국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됐지요.
당선 사실이 와닿지가 않았어요. 솔직히 털어놓자면 그때에는 작가로서의 준비가 덜 됐던 것 같습니다. 신춘문예에 글을 보내면서도 상을 받는다는 건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뭔가를 얻고 싶었을 뿐이었지요. 그 실패가 물론 달가울 순 않겠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될테니 말이에요. 

문인과의 교류는 활발했습니까?
그럴 수 없었지요. 등단하고 1년 후 박영한 선생님이 돌아가셨는데, 제겐 너무 큰 충격이었습니다. 함께 글공부 하던 친구들도 흩어지고, 나는 국제미아가 된 듯한 느낌이었어요. 등단하고 약 10년 동안은 대외적인 작품 활동은 할 수 없었습니다.

글을 쓰지 못하게 된 좀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글쓰기에 대한 절실함이 없었던 거죠. 난 살고 싶어서, 그러니까 숨 좀 쉬고 살고 싶어서 글이란 도구를 택한 거였어요. 하지만 등단하고 나서 경제적으로 적당히 살만해졌어요. 넉넉한 건 아니었지만 끼니 걱정할 시기가 지난 거였어요. 달리 말하자면 그냥 적당히 망한 상태였어요.

적당히 망했다, 이게 무슨 뜻이지요?
난 샌드위치 가게를 하며 말 그대로 쫄딱 망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 제겐 오히려 행운이었어요. 만약 그 가게를 통해 겨우 먹고 살 정도의 돈을 벌 수 있게 됐다면, 난 그 일을 지금까지도 놓을 수 없었을 거에요. 모든 것을 다 잃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바닥을 봤기 때문에 다시 일어서게 된 거라고 생각해요. 진짜 무서운 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적당한 실패인 것 같습니다.

작가 반수연이 다른 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꿈”은 무엇일까요?
고리타분한 애기일 수 있겠지만, 내게 남겨진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어요.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도 얘기했잖아요.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다고.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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