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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가 고맙다, 너무 고맙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5-06-19 13:19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10, 6·25참전유공자회, 박영길옹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는 건 그의 몸이었다. 60년도 더 지난 일인데 그는 그 때의 혈투를 떠올리면 여전히 구역질이 난다고 했다. 세월도 그의 상처를 온전히 보듬지 못한 것이다. 전쟁 당시 반쯤 잃었던 그의 청력 역시 회복되지 않았다.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그의 몸은 저절로 욱신거린다. 전쟁은 그토록 비참했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설명해 줄 형용사는 세상에 없다. “6·25참전유공자회”(회장 정용우) 자문위원 박영길옹(사진)의 얘기다.








“찬란해야 할 10대에 군인이 되어…”

1945년 광복 후 얼마 되지 않아 “조선경비대”가 만들어졌다. 일제의 압제를 경험한 사람들은 “우리에게도 강한 군대가 필요하다”는 얘기에 동의했고 자연스레 조선경비대를 찾았다. 박영길옹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찬란했어야 할 10대 후반 그는 군인이 되었다.


조선경비대에는 언제 입대하셨습니까?
46년에 입대를 했지, 사병으로 말야. 군에 자원한 별다른 이유는 없었어. 군에서 장병을 구하러 다녔고 난 거기에 응했을 뿐이었지.

그곳에서 6·25를 맞게 되신 건가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조선경비대에서 만기 제대한 뒤 전남 광주의 조선대학교를 찾아갔더랬어. 평소 인연이 있던 조선대학교 총장이 내게 체육과 전임강사직을 제안했거든. 그런데 당시 체육교육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어.  체육시간에 권투를 가르치거나 배구시합을 하기도 했지만, 학생들과 장난치며 그저 놀 때도 많았어.

학생들과 사이가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학생들이 나를 무척 따랐지. 나이 차도 거의 나지 않았는데 말야. 그때의 우리 모습은 선생 제자간이 아니라 그냥 왈패에 가까웠던 것 같애.”


한가롭고 평화로운 교정의 풍경은, 하지만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38선이 허물어지면서다. 이 날 이후 약 3년간 한반도는 전쟁터가 되었고 500만명 이상의 목숨이 사라졌다. 숫자 몇 개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참혹함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어떻게 하셨습니까?
계속해서 광주에 있다가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 살기 위해선 우선 부산 쪽으로 몸을 피해야 했지. 

일종의 피난생활이 시작된 거군요. 
그런데 나 혼자가 아니었어요. 내겐 나를 따르던 학생들이 있었는데, 아마 90명 정도 됐을 거야. 


전쟁통에 함께 생활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끼니를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당시 마산 무학산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24사단이었다.



“힘든 시기, 먹여달라고만 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처음부터 임무가 주어진 게 아니었어. 무턱대고 찾아가 우리가 무학산 경비를 책임지겠다고 했지. 다른 건 다 필요하고 그냥 먹을 것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했어. 학생들도 기초 군사훈련은 받은 상태였고.

그랬더니 뭐라고 하던가요?
마산 진동 쪽으로 가서 다리 하나를 폭파하고 오라는 거야. 그 일을 처리하면 우릴 믿어줄 수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학생 열다섯 명과 함께 길을 떠났어. 군용 차량 두 대를 나눠 타고 갔는데, 그 안에 80kg 분량의 다이나마이트가 있었지.

임무는 성공적으로 마치셨습니까?
진동에 도착하고 보니 지서(파출소) 하나가 보였는데, 그곳 근무자가 어딘가 수상했어. 우릴 보더니 갑자기 벙어리 시늉을 하는 거야.


총성이 울린 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도 학생들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퇴각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도망치고 보니 바닷가였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이미 학생 둘을 잃은 그는 낙담했다. 그때 바다 저편에서 쾌속정 소리가 들려왔다. 


적군이었나요?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여기가 끝인 줄 알았지. 그런데 알고 봤더니 미군이었어. 미군이 계속해서 우리의 움직임을 지켜봤던 거였어요. 그때 깨달았지. 적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미군이 우리를 총알받이로 활용했다는 걸. 어찌됐건 차량 두 대와 폭탄을 잃었는데도 미군은 이를 문제삼지 않았고, 미 24사단이 북진을 하기 전까지 무학산 경비를 서게 됐어.

24사단이 북진할 때 같이 움직이셨습니까?
전쟁의 시작과 함께 군에서는 나를 소위로 임명했는데, 무학산 경비를 마칠 때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어. 이후엔 난 대구에 있던 육군 본부로 갔지. 군의 명령대로 대구에서 남원으로, 또 남원에서 광주 등으로 옮겨 다니다 나중엔 중부 전선에 배치됐어.



“전쟁은 비극이야, 다시는 일어나선 안되지”


중부전선 향로봉…, 박영길옹이 전쟁의 민낯과 마주한 곳이다.  하룻밤 사이에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고, 그때마다 피바람이 불었다. 정용우 6·25유공자회 회장도 “향로봉 전투”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귀가 안 좋은신 것 같은데 그때 전투의 후유증입니까?
그렇지. 포탄을 쉴 새 없이 주고 받았으니까…. 입에 담기도 싫은 기억이야. 우리가 고지를 점령하면 인민국과 중공군이 교대로 공격해 왔고, 반대의 상황에선 또 우리가 치고 올라갔지. 중대장이 전사해서 내가 그 역할까지 떠맡게 됐는데,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겨눠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어.


한밤 중 정적이 흘렀다. 병사들을 챙긴 뒤 쪽잠을 청했는데, 갑자기 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주변을 돌아봤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물줄기가 느껴졌다. 그곳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물을 떠 마셨다. 그러고 나서야 한 시간 정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어두움이 가실 때쯤 그는 다시 물줄기를 찾았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물줄기 윗쪽으로 인민군 한 명이 눈을 뜬 채 숨져 있는 게 보였다. 그가 마셨던 것은 물이 아니라 이 병사의 피였던 것이다. 전쟁 도중에 그의 감각은 완전히 마비된 모양이다. 그는 피맛을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의 갈증을 해소시켜준 것이 피였음을 알았을 때, 그는 구역질이 났다. 이 일이 생각나면, 지금도 구역질이 난다. 


큰 부상은 입지 않으셨나요?
글쎄…, 포탄에 바윗돌이 깨져나가면서 그 중 한 조각이 내 등에 박혔어. 그 일이 있고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됐지. 3주 동안 입원했었을 거야. 퇴원과 동시에 다시 군으로 돌아왔는데, 몸이 성치 않았어. 귀는 잘 들리지 않고 기억력도 현저히 나빠졌거든. 몸이 불편하고 힘들 때는 향로봉 전투 때의 일이 생각나, 그때 피물을 마셨던 일 말야. 

전쟁 후에도 군에 남아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66년에 중령으로 예편했어. 이후에는 삼학산업(당시 매우 유명한 양조 회사였다) 서울 공장장으로 있다, 75년 캐나다에 정착하게 됐지. 여기 와서는 버섯농장도 했고, 일본계 수산물 회사의 구매 담당 이사로 오랫동안 일했어. 러시아로, 알래스카로, 동부의 할리팩스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 됐네. 내 나이 곧 아흔이야. (그는 29년생이다.)

한국전 참전용사에게 캐나다는 어떤 나라였습니까?
그냥 모든 게 고마울 뿐이야. 지금 내가 하는 보청기, 이것도 캐나다 정부에서 무상으로 해 준 거야. 이 뿐만이 아니지. 매달 식사비를 지원해 주고, 약값 부담도 전혀 없어. 어딜 가도 유공자로서, 6·25전쟁을 함께 치른 동료로 인정해 준다고. 그런 면에서 내 고국에겐 섭섭한 마음이 많아. 캐나다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이유로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별로 없지.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냐. 그냥 우리를 이렇게 대한다는 게 속상할 뿐이야.


전쟁은 굳이 설명을 보태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비극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작된 전쟁 때문에 어떤 어미는 자식을 잃어야 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지 못한 청년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갈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전쟁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박영길옹이 후세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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