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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이민자들의 삶, “45년 넘는 세월 지나 거울 앞에 다시 서니”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5-06-12 12:00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9 김지한·수 김 부부
이민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대개 “다름”과 “싶음”으로 간단하게 정리되곤 한다. “각박함을 벗어나 뭔가 다른 삶을 살고 싶어서”, “아이들에게 다른 교육 환경을 제공해 주고 싶어서”… 이렇게 말이다.

어찌됐건 다름과 싶음을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특히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력이 부족했던 6,70년대 초기 이민자들은 낯선 땅에 들어서자마자 대부분 고된 노동과 마주해야 했다. 그랬기에 생존이란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것, 이를테면 꿈 같은 건 잊고 살았다. 언제부터인지 “김”보다는 “킴”으로 불리는 것에 더 익숙해진 수 김씨 역시 그들 중 한 명이다. 그녀의 남편인 김지한씨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두 사람을 통해 6,70년대 한인 이민사(史)를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이민자의 땀방울부터 성취, 그리고 서로 서로를 위로하던 시절의 사람 사는 냄새가 스며 있었다.







6,70년대 한인들의 땀방울, 열매가 되기까지


김지한씨가 군대를 제대하고 시작한 일은 목장 경영이었다. 서울 압구정동에 터를 잡은 그의 목장은, 하지만 안락함은 둘째치고 생존조차 보장해 주지 못했다. 큰비 한번에 한강물이 너무 쉽게 넘쳤던 시절이었고, 그때마다 그는 삶의 터전을 잃었다. 이렇게 가다간 안되겠다 싶었다. 희망이 없었다.
 

그래서 이민을 결심하게 된 건가요?
김지한(이하 김)_그랬지요. 마침 이민길이 처음 열리던 시기였고…. 1968년 1월 12일이었어요, 제 이민생활이 시작된 게. 만 스물일곱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죠.

왜 밴쿠버였습니까?
김_처음에는 토론토로 가려 했어요. 캐나다에서 아는 도시는 그나마 토론토였고, 그래서 토론토행 비행기를 덜컥 끊었던 거죠. 그런데 장시간 비행기를 타는 게 너무 힘든 거에요. 이민 심사를 받기 위해서 밴쿠버에 내렸을 때 담당자에게 물었지요. “나, 여기서 잠깐 쉬어갈 수 있을까?”


그 잠깐이 결과적으로는 50년 가까운 세월로 이어졌다. 이민 온 그날부터 한국에서 온 청년은 생계를 걱정했다. 여유가 느껴지지 않았던 시절, 돈을 들고 해외로 나가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된 시절이기도 했다.


막막했을 것 같습니다.
김_오자마자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마도 그랬을 거에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민자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대우가 참 후했어요. “맨파워”라고 불리던 정부 부서에서 일자리를 알선해 줬고, 영어를 잘 못하면 학교에도 보내줬죠. 지금과 차이가 있다면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정부에서 생활비를 지원해 줬다는 거에요. 영어학교에만 다녀도 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돈이 나왔고…. 어찌됐건 맨파워 도움 없이도 운좋게 일을 찾을 수 있었어요. 첫 직장이 일본 식료품 도매상이었는데 그곳에서 배달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각 소매점과 가정으로 식료품을 실어 날랐다. 주인 맘에 쏙 들었을만큼 그는 성실했다. 그렇게 일한 덕분에 한국에서 2년간 연애했던 약혼녀를 이곳 밴쿠버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녀가 수 김씨다. 예비 새색시는 밴쿠버에 오기 전 시댁에서 마련해 준 옷감 전부를 파티복으로 만들었다. 외국에 나가면 늘 파티만 하고 살게 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옷들을 꺼내 입을 수 있었던 건 1년에 단 한 차례, 한인회가 송년파티를 열 때뿐이었다. 


밴쿠버에서의 삶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군요.
수 김(이하 수)_원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화가에 대한 꿈이 늘 있었지요. 밴쿠버에 오면 그 꿈이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부부가 모두 일하지 않으면 안정된 삶은 보장받기 어려웠지요. 

이민자 여성이 당시에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수_저는 운이 좋았어요. UBC에서 공부하던 한인 유학생 부부가 했던 일을 제가 맡게 됐거든요. UBC 직원들에게 커피 타주던 일이었는데, 아이 낳을 때까지 일하다 그만뒀어요.


아이가 태어나니, 김지한씨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더욱 절감했다. 일본 식료품점 배달부로는 생계를 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월급을 줄 수 있는 그런 회사가 필요했다.


직장을 옮기셨나요?
김_우유회사에서 또다시 배달 일을 하게 됐는데, 무엇보다 대우가 참 좋았습니다. 각 집에 우유를 배달하고(그때만 해도 가정에서 우유를 배달시켜 먹었다), 그 댓가로 적지 않은 월급과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요. 이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내 가게도 열게 됐습니다. 새마을 식품점이라는 그런 가게였어요.

배달일과 가게 운영, 둘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 가능했습니까?
김_우유배달은 아침 여섯 시에 시작해서 보통 오후 3시면 끝나요. 하지만 저는 남들보다 훨씬 빨리 일을 마쳤지요. 1시 30분이면 가게에 갈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는 아내가 가게를 보곤 했습니다.


가게는 밴쿠버 메인가와 16번가 근처에 있었다. 당시 살던 집(버나비 홀던에 있던)에서 이곳까지 가기 위해선 버스를 세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하지만 수 김씨는 그 일이 전혀 번거롭지 않았다고 했다. 이 뿐만 아니라 가게에 매달려야 했던 삶 자체가 전혀 고생스럽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도 꽤 힘들었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찌됐건 이 때의 땀방울은 금새 열매로 맺어졌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것이다.


첫 집은 어떻게 마련했습니까?
수_어느 날 은행을 찾아갔는데, 그곳 매니저가 자기 집이 있냐고 묻더군요. 아직 없다고 했더니 무턱대고 사라는 거에요. 다운페이할 돈도 빌려주겠다면서 말이죠. 
김_그렇게 산 집이 효자 노릇을 했어요. 1년만에 가격이 두배로 올랐거든요. 덕분에 리치몬드로 건너가 새 집을 짓고 살게 됐습니다.

내 집이, 그것도 새 집이 생겼다. 김지한씨는 너무 행복했다. 고된 하루 일을 마치면 그는 집이 지어지고 있는 현장을 매일매일 찾았다. 그리고 골격만 갖춘 그 집 마루에 벌렁 누웠다. 바깥 바람을 그대로 받아도 그는 웃음기를 잃지 않았다. 한국에서 아내 될 사람을 불러들였고, 아이는 어느새 둘로 늘어나 있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을지, 자신도 밴쿠버에 잘 적응해 살아갈 수 있을지, 김지한씨는 이런저런 문제로 늘 긴장하며 살았다고 했다. 리치몬드의 새 집은 그런 그에게는 하나의 큰 위로였을 것이다,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 살았던 것에 대한.


오랫 동안 접었던 화가의 꿈, 7월 4일 포트무디 시청에서 전시회


결혼식을 이곳에서 올렸다고 했는데, 그 풍경이 궁금합니다.
수_당시만 해도 한인사회에는 교회가 한인연합교회, 단 한 곳 뿐이었습니다. 그곳 부녀회에서 결혼식을 준비해 줬어요. 주례는 이상철 목사셨고, 심선식 박사(한인사회 최초의 의사)가 제 친정 아버지 역할을 해주셨지요. 저희 부부에겐 모두 고마운 분들입니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민생활엔 큰힘이 됐겠습니다.
수_여덟 가족이 매 주말마다 모였어요. 당시엔 밴쿠버 8가 아파트가 우리들의 아지트였는데 만날 때마다 직장에서 실수한 일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지요.


이민생활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시간. 여덟 가정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모이다 보니 이웃으로부터 시끄럽다는 불평에 늘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엄마들과 아빠들은 행복했다. “남 얘기”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며 게임도 시작했는데, 그것도 좋았다. 놀라운 것은 이 만남이 45년이 지난 지금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세월을 살아온 여덟 부부 모두 건강하다. 김지한, 수 김 부부는 이것을 “축복”이라고 얘기했다.

계속해서 사업을 확장해 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_식료품점을 했다가 그 다음부터는 주로 음식점 사업에 관심을 두고 있었어요. 이것 말고는 손댄 것은 참 많아요. 그러다 83년인가 그때 한인타운 조성에 동참하게 됐어요. 지금 한인신용조합이 위치한 킹스웨이에 웨스턴마켓을 열었어요. 


당시 킹스웨이와 웨스턴마켓은 하나의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90년대만 해도 새 이민자의 대부분이 킹스웨이를 찾아 첫 외식을 하고, 웨스턴마켓에서 쌀이나 고추장 등을 구입하곤 했다.


승승장구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김_늘 그랬던 건 아니죠. 실패도 여러 번 겪었고 손해도 많이 봤지. 하지만 그때마다 툴툴 털고 일어났어요. 다만 바쁘게 살다보니 한 가지 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어요.

그게 뭐였습니까?
김_아이들에게 늘 미안했지요. 장사하느라 바빠서 잘 챙겨줄 수 없었잖아요. 그런데도 잘 자라주었어요. 큰아이는 카이로프랙터로 자리를 잡았고, 둘째 아이는 마케팅 전문가로 활동 중인데 정치에도 뜻을 두고 있어요. (그의 둘째 아들은 C3 전(前) 회장인 스티브 김이다.) 그때의 미안함 탓에 2005년 은퇴한 이후로는 손자들을 대신 돌봐주고 있어요. 자식들에게 못 해 준 것, 손자들에게는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거든요.


두 명의 아들들에게 늘 마음의 빚 같은 게 있었다. 그런 부모에게 어느 날 아이들이 말했다.
“엄마, 아빠가 우리한테 잘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늘 그렇게 얘기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너무 잘해 주셨어요. 그래서 감사해요.”


2005년 은퇴했다고 하셨는데, 이후의 삶이 궁금합니다.
수_캐나다의 자연 풍광이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느라 주변 풍경을 돌아볼 틈이 별로 없었거든요. 아, 그리고 또 한가지. 제 꿈과 마침내 마주하게 됐습니다. 그림을 시작했거든요. 환갑 때는 첫 작품전도 열었습니다. 칠순을 앞에 둔 지금에는 두번째 전시회를 준비 중이에요. 포트무디 시청 안에 전시 공간이 있는데, 7월 4일(금) 그곳에서 제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예정이에요. 

좀 더 일찍 그림을 시작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까?
수_그림은 늘 그리고 싶었지요. 밴쿠버에 오면 그 꿈이 쉽게 이루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어도 내 지난 날은 행복했어요. 남들 눈에는 힘들어 보였을지 몰라도 우리 부부는 늘 즐겁게 일했고, 모든 일에 긍정적이었어요. 결과적으로 그림도 그릴 수 있게 됐으니, 이게 행복이지요.
김_이 나라에 살려면 일희일비해선 안 됩니다. 한 가지 일에 꾸준해야 하지요. 이게 이민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에요.

마지막 질문인데, 솔직히 아까부터 궁금했습니다. 이민 온 것 후회스럽지 않나요? 한국에서 목장주로 살았더라면 손쉽게 거부가 됐을텐데 말이죠.
김_글쎄, 그랬을 거에요. 목장이 있던 압구정동 땅값이 어마어마하게 올랐으니.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할까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이사람 저사람한테 술 사주고 같이 마시느라 건강까지 잃게 됐을 것 같은데요.
문용준 기자 myj@vanchso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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