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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향군인회를 떠나며, 손병헌 회장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2-02-17 10:22

“우리가 한인사회 후세들에게 남겨줄 것은······”

오랫 동안 애정을 갖고 해 오던 일을 그만 두어야할 때, 혹은 그 일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어야 할 때, 사람들은 대개 ‘시원섭섭하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상투적으로 들리는 이 표현만큼 은퇴자의 속내를 정확히 묘사할 수 있는 단어는 찾기 어려울 듯 싶다. 재향군인회 손병헌 회장의 지금 심경도 아마 시원섭섭함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한국인, 그리고 캐나다인으로 살아가기
손병헌 회장과의 인터뷰가 있었던 날, 밴쿠버의 날씨는 모처럼 맑았고 덕분에 석양도 예뻤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손 회장이 얘기한다.


“저 하늘 좀 보세요. 멋지지 않나요? 난 이런 풍경을 접할 때마다 여전히 가슴이 두근두근 떨려.”
손 회장은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밴쿠버의 풀 한포기조차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캐나다인’이라고 부른다. 인생의 베이스캠프를 캐나다로 옮긴 지 40년 가까이 됐으니, 캐나다인이라는 자기소개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캐나다인은 자기 뿌리에 대한 애착 또한 숨기지 않는다. 한국에 대해 그는 누구보다 순도 높은 애정을 품고 있다. 한국에 대해 얘기할 때 손 회장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부터 꺼낸다. 지구 반대 편에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일에도 관심이 높다. 그의 목소리에는 시집 간 딸이 친정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자신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그가 재향군인회 회장을 맡은 것도 한국과 한인사회를 위한 선택이었다. 모국을 너무나도 아끼는 캐나다인으로서 양국간 교류에도 힘을 보태고 싶었을 것이다.


회장으로 선출됐을 당시 그는 “재향군인회가 새 이민자나 유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단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18일 총회를 끝으로 그는 회장으로서의 공식적인 임무를 내려 놓는다. 임기 동안 손 회장은 자신의 소망을 현실에서 만날 수 있었을까.






‘친정’이 잘 돼야 내가 더욱 행복하다
회장으로서 보낸 3년 중 첫 해는 꽤 버거운 일이 많았다. 밤잠을 설치게 할 만큼 성가신 일들을 겪을 때마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마다 오히려 재향군인회가 참 좋은 단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국이 위기에 처할 때 재향군인회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고, 단순히 퇴역 군인들의 모임이 아닌 사회단체로서 한국을 캐나다에 알리는 일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는 이등병의 마음으로 회장직을 시작했다. 재향군인회 정관을 꼼꼼히 습득하고, 이 단체가 어떤 방식으로 한인사회 화합을 위해 힘을 보탤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는 이제서야 일등병으로 한 걸음 올라선 것 같다고 말한다.


“자기가 처한 입장에 따라 고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다 제각각일 수밖에 없지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이 굳건해야 여기 캐나다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도 부각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정체성 확립이 우리 한인들에겐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어요. 좀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재향군인회가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는 선배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이우석 전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은 참 고마운 존재다.


“한인사회의 화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선배들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점을 저도 많이 배우려고 했지요.”


손 회장은 재향군인회를 포함한 한인단체의 존재 이유를 한인사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여부에서 찾는다. 이것은 그가 재향군인회 회장으로서 첫발을 내딛을 때부터 했던 생각이기도 하다. 73년 이민 온 손 회장이 옛날 얘기를 들려준다.


당시 한인들이 캐나다를 정착지로 선택한 이유는 다양했다. 어떤 이는 보다 안락한 삶을 위해 이민을 결심했고, 또 다른 어떤 이는 한국의 군사정권이 맘에 들지 않아 새 터전으로 떠났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낯선 땅에서 만난 한인들은 대부분 서로 가까웠다.


이들 중 상당수가 밴쿠버 이스트에 위치한 한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6가 아파트’라고 불렀다. 아파트 사람들은 주말마다 한국인을 만나고 한국어로 떠들고 노는 것이 마냥 좋았다.


“그 만남을 통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받았던 것 같아요. 직업에 대한 정보를 서로 교환하기도 하고···. 제가 76년에 결혼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결혼 비용은 만만치 않았어요. 하지만 교회 부녀회의 도움이 있어 별 부담없이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무궁화봉사회에서 그때 그 교회 부녀회의 모습을 발견하곤 해요.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우리의 ‘품앗이’ 문화가 한인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의미지요.”


한인 이민사회의 1세대로 기록될 수 있는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평등하게 이 땅에서의 새 삶을 함께 시작했다. 그리고 한민족답게 우리네 품앗이 문화를 잊지 않았다. 한인사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는 한인단체들이 기억해야할 아름다운 전통이다.


한국전참전용사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
재향군인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고국을 위해 헌신했던 한인 뿐 아니라 자신의 젊음을 낯선 땅 한국에 나누어주었던, 그리고 지금은 노병으로 황혼을 보내고 있는 캐나다 참전용사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들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한국과 캐나다 사이에 튼튼한 다리 하나를 연결하는 일일 수도 있다.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위해 손 회장이 계획하고 참가했던 일이 많았지만, 그 중 더욱 기억나는 하나가 대한민국 보훈처와 재향군인회를 대신해 ‘감사의 메달’을 증정한 일이다.


“메달을 받을 참전용사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냈어요. 대부분 인터넷을 할 줄 모르니까 이메일보다는 편지를 보내는 게 낫겠다 싶었지요. 그 편지를 받아본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여전히 당신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거예요.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토피노’도 잊을 수 없는 곳이다. 밴쿠버 아일랜드 토피노의 퍼시픽 림(Pacific Rim) 공원 내에는 가평전투참전기념비가 자리잡고 있다. 매년 이 전투비 앞에서 공원 주최로 한국전 참전 행사가 열린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던 날 박은숙, 표병호, 송요상씨와 함께 그 행사장을 찾았어요. 우리가 그들을 잊지 않고 찾았다는 것 자체가 참전용사들에겐 큰 감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손 회장은 가평에서 공수해 온 돌멩이를 항아리에 담아 토피노에 전달했다. 처음에는 가평군에 흙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으나 통관상의 문제 때문에 흙 대신 돌멩이가 항아리를 채웠다.


“흙이든 돌멩이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요. 작은 상징물을 통해 그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게 더 마음에 와 닿는 일 아니겠어요?”


재향군인회를 떠난 후에도 손 회장은 참전용사들을 챙기는 일만큼은 최선을 다해 도울 생각이다.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대를 이어서 이루어져야 하는 임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인회의 각 행사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이 점이 좀 안타깝습니다. 연속성을 가져야 후세에 남길 수 있는 일들도 많아질 겁니다. 재향군인회도 마찬가지지요. 다음, 또 그 다음 재향군인회도 한국인의 긍지를 보여줄 수 있는 일들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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