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생활, 그대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순간은…”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6-01-22 13:00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36-진영란 무궁화 여성회 회장
이민 와서 기뻤던 일을 추억할 때도 혹은 쓰린 경험을 들춰낼 때도 그녀의 웃는 얼굴은 거의 한결 같았다. 지나간 일에 얽매이지 않는, 지금 주어진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었다. 진영란 무궁화 여성회 회장(사진)의 이야기다.



“지금 생활에 온전히 만족할 수 없다 해도”


진영란씨의 신혼 생활은, 지난 1977년 캐나다 이민과 함께 시작됐다. 낯선 땅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선택한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남편의 뜻을 따랐을 뿐이다. 어찌됐건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시절, 캐나다라는 나라가 어색하기만 했던 새댁과 새신랑의 수중엔 두세달치 생활비가 전부였다.초기 정착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던, 정확히 말하자면 넉넉할 수 없었던 대부분의 70년대 이민자들은 캐나다에서의 시작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70년대면 한국의 외환관리법이 매우 엄격했던 시기였지요. 해외로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돈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제가 이민 왔을 때만 해도 한 사람당 1000달러 이상은 반출이 안 됐어요. 

정착 자금으로는 많이 부족했을텐데요.
쉽진 않았지요. 남편은 원래 공부를 좀 해볼 생각이었는데, 학비가 워낙 비싸서 학교 가는 건 엄두조차 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대신 이민자를 위한 무료 영어학교를 다니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6개월 동안 이른바 생존 영어를 배웠지요. 정부로부터 생활비를 받아가면서 말이죠. 당시만 해도 영어학교 재학생들을 정부가 많이 챙겨줬어요.

보조금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했습니까?
얼추 그랬던 것 같긴 한데, 학교 마친 밤 시간에는 남편과 일을 시작했어요. 모두가 퇴근한 빈 건물을 청소하는 일이었지요.

그 일을 하면서 이민 온 게 혹시 후회되진 않던가요?
글쎄요, 후회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왕에 온 이민이니까 빨리 자리잡아야겠다는, 그런 마음 뿐이었지요. 지나간 것은, 그러니까 한국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지금을 사는데 별 보탬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해 과거와 지금을 비교해선 정착이 어려울 거라는 얘기죠. 지금 생활에 만족할 수 없다 해도 적응하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는 게 제 의견이에요.

70년대 후반의 구직시장은 어땠습니까? 일자리를 잡는 게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나요?
말 서툰 이민자에게 누가 그리 쉽게 일자리를 주겠어요. 하지만 그땐 사회 전반적으로 인력이 많이 필요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캐나다에 이민 오는 것도 지금과는 달리 무척 쉬웠습니다. 여하튼 영어학교 6개월 과정을 마친 후에는, 여기저기 이력서를 보냈지요. 지금 생각해도 참 짧은 영어 실력이었는데, 그냥 부딪쳤어요. 그래서 얻게 된 게 공장일이었어요.

공장일이요?
저의 부부의 첫 정착치가 토론토였어요. 당시 토론토 초기 이민자들의 주된 일터가 바로 공장이었구요. 저는 생산 라인에 서서 리모콘 조립하는 일을 했고, 남편은 자동차 배터리 제조 공장에 취직했지요.

신혼 살림이 많이 나아졌겠네요.
그렇긴 한데 금방 집도 사고 새차도 마련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은 아니었어요. 그저 먹고 살 걱정 없는, 그런 정도였지요. 그때는 물가가 참 저렴했습니다. 20달러, 많아야 30달러면 쇼핑카트를 한가득 채울 수 있었으니깐. 맥도널드 햄버거가 60센트 가량 했을 거에요, 아마.

그럼 밴쿠버에는 언제 오게 된 건가요?
그 전에 에드먼튼 얘기를 먼저 해야 해요. 남편이 틈틈이 용접 기술을 배워뒀는데, 그 덕분에 에드먼튼에서 일할 수 있게 됐어요. 꽤 좋은 조건으로 말이죠. 저는 그 무렵 태어난 아이들을 키웠고, 남편은 하루 열두시간을 송유관 건설 현장에서 일했지요. 저녁 여섯시부터 다음날 아침 여섯시까지, 늘 철야를 했어요. 제 남편 뿐 아니라 당시의 한국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너무 일에만 매달린 건 아니었을까요?
즐길 때도 있었지요. 아니, 즐겼다기보다는 그냥 산 거였지요. 아이들 데리고 캠핑은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남들처럼 큼지막한 캠핑카 살 여력은 없어서 대신 밴을 구입했더랬죠. 그 차 내부를 마치 캠핑카처럼 꾸며서 쉬는 날이면 여기저기 다녔어요. 에드먼튼에서 가까운 재스퍼와 밴프는 수시로 다녔고, 호수에서 낚시도 하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캐나다 곳곳에 살아보니, 밴쿠버가 가장 좋더라”


행복한 기억이네요.
그랬지요. 그런데 남편이 일터에서 해고되면서 다시 한번 이사를 가게 됐습니다. 이번엔 캘거리였지요.

해고된 이유가 있었습니까?
1982년이었을 거에요. 미국과의 송유관 공사가 중단되면서 용접사들이 필요 없게 된 거에요. 대량 해고 사태가 났고, 노조에선 파업에 나섰지요. 남편도 노조원이었는데 파업 시위에 나서면 시간당 10달러 정도를 받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걸로는 생활이 어려웠고, 그래서 캘거리로 옮기게 된 거죠. 신기하게도 남편이 일자리 하나만큼은 잘 잡았어요. 용접 기술이 있어서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토론토, 에드먼튼, 캘거리, 그리고 밴쿠버 생활을 모두 경험했는데, 어떤가요? 어느 도시가 살기에 가장 좋다고 생각하세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밴쿠버지요.환경도 좋고, 한국도 가깝고, 무엇보다 밴쿠버에 정이 많이 들었어요.

밴쿠버에서의 삶이 가장 안정적이었다는 얘기처럼 들립니다.
아니요, 처음에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어요. 밴쿠버에 정착한 것이 1983년이었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밴쿠버의 조선소들이 문을 닫던 시절이라 용접사에게 주어진 일자리도 많이 없었지요. 이때 시작한 남편의 사업이 잘 안됐어요. 크게 실패했지요. 캐나다에서의 첫 실패였어요.

어떤 사업이었는데요?
어업이었어요. 세 명이서 배를 하나 사서 성게 같은 해산물을 채취했지요. 그런데 아무도 BC주 해상법에 대해선 이렇다 할 지식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여긴 어업 허가 지역과 그에 따른 보험 적용 범위가 해마다 달라져요. 그걸 아무도 몰랐던 거죠. 

그 점이 문제가 된 거군요.
배가 사고로 침수됐는데, 보상을 받지 못했어요. 어업 허가권만 헐값에 넘기고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낙심이 컸겠습니다.
그렇긴 한데, 쉽게 무너지진 않았어요. 남편이 마음을 많이 비웠고, 저 역시 일을 하고 있었으니 다행이었지요.

어떤 일이었습니까?
한국에서의 제 일터가 상업은행이었어요. 그곳에 다니다가 결혼과 함께 퇴직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선 결혼한 여성이 은행에 다닐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그 일을 이곳 밴쿠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1983년 9월 15일, 캐나다 외환은행이 밴쿠버에 문을 열게 되면서 말이죠.

한국에서 했던 일을 밴쿠버에서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겠는데요.
만족감 같은 게 있었어요. 드디어 내 자리를 찾았다는 그런 기분도 들었고…. 지금 생각해도 참 열심히 다녔던 것 같아요. 1983년에 시작해서 2008년 10월 말까지 꼬박 25년을 일했습니다. 외환은행 코퀴틀람 지점장이 제 마지막 직책이었지요.

은행을 그만둘 때 어딘가 많이 허전했을텐데요.
조금 섭섭하긴 했지요. 그래도 할 만큼 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 세월 동안 남편 역시 열심히 일했어요. 덕분에 빚도 다 갚고 내 집도 마련할 수 있었지요. 아이들도 잘 자라 주었고…. 그래서 비교적 홀가분하게 은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가 환갑되기 몇 년 전이었어요.

은퇴 생활의 시작이었군요.
나만의 시간이 너무 많아지더군요. 집에서 멍하니 있기도 뭐해서 이때부터 일주일에 세 차례 산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밴쿠버시온선교합창단에 가입해서 노래도 불렀구요. 이 두 가지를 통해 몸과 마음 모두 즐겁게 단련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해요.

봉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09년 무궁화재단이 만들어졌을 때 함께 할 수 있게 됐어요. 한인 양로원이 필요하다는 재단 이사장(오유순씨)의 얘기에 많이 동감했지요. 이후 양로원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부터 탈북 동포 돕기 운동까지 여러 일을 해왔습니다.

지금은 무궁화 여성회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이 단체를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요?
무궁화 여성회는 뭔가 거창한 것을 내세우는 조직이 아니에요. 누군가를 돕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그게 다지요.

무궁화 여성회는 확실히 순발력이 좋은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늘 무궁화 여성회가 있는 것으로 보여요. 예를 들어 아이티 대지진 당시 모금 운동에도 상당히 적극적이었지요.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우리가 할만한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그냥 보탬이 되려고 할 뿐입니다.

은퇴 후의 삶이 상당히 편안해 보입니다.
제게는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소중해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지난 날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으려 해요. 때문에 뭔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지요. 지금 주어진 위치에 만족하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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