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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창업, 나는 이렇게 준비했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5-11-27 12:13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 30-스시천국& 서울회관 정재창 대표
처음으로 식당 창업을 염두에 둔 사람이라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있을런지 모른다. 그래서 업계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묻고 또 묻는다. 가게 하나 여는데 보통 얼마 정도 필요한가요? 작은 돈으로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음식 장사로는 뭐가 있지요? 임대료는 얼마나 해요? 그거 팔아서 먹고 살 수는 있나요?

스시롤 딱 두 종류만을 팔던 자그마한 가게를 시작한 후 일식집, 뷔페 식당을 연달아 안착시킨 정재창씨(사진)에게도 창업 희망자들의 질문은 당연히 쏟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물음표를 지워줄 숫자들은, 적어도 그가 제시한 답변집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가려운 곳에 적용할만한 효자손 대신, 정재창씨는 자신의 인생사부터 담담히 털어놨다. 그 안에 식당 창업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혹은 그 반대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숨어 있는 듯했다.



“스스로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식당 창업, 그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자신의 일본 여행기를 먼저 꺼내 들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해외여행 자유화가 추진되면서 공항은 크게 붐비게 됐다. 그 인파 속에 30대 초반이었던 정재창씨도 있었다. 난생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에 적지 않게 떨렸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일본 여행의 처음과 끝을 책임져줄 길동무가 있어서였다. 정재창씨가 한 일이라곤 커다란 여행 가방 두 개를 준비한 게 다였다. 아, 한 가지 더. 주변 사람들을 향해 이제 나도 비행기를 타게 된다는 자랑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은 순조롭지 않았다. 떠나기 바로 전날 안락한 여행을 장담하던 길동무에게 사정이 생겼고, 그는 혼자가 됐다. 여행 자체를 취소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간데다, 일본 여행에 대한 주변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줘야 했기 때문이다. 해외여행 간다는 소문만 내지 않았어도 좋았을텐데, 라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결국 그는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어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영어 실력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대책 없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래도 무사하게 입국 심사대는 통과했던 모양입니다.
그랬지요. 나리타 공항에 내렸는데, 그 후엔 무조건 버스부터 찾았어요. 버스만 타면 목적지인 도쿄로 가게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차창을 바라보니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도쿄와는 전혀 상관 없는 어느 한적한 마을에 내려졌습니다.

준비 없는 여행자가 맞닥뜨린 냉혹한 현실이었군요.
그때가 한여름이었어요. 날은 덥지, 의지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 게다가 말은 전혀 통하지 않지…. 한마디로 방법이 없던 상황이었지요. 그러다 관광 안내소처럼 보이는 걸 발견했어요. 무작정 그곳으로 들어갔지요.

말이 통하지 않았다면서요?
우리한텐 손짓, 발짓이란 게 있잖아요. 외국어하고는 원래부터 친한 처지는 아니었지만, 상대가 내가 원하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안내소 직원이 종이 한 장을 꺼내들더니 뭔가 적기 시작하더군요. 어떻게 하면 도쿄로, 예약해 둔 숙소로 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적어줬을 거에요.


그 종이 한 장을 손에 쥐고, 정재창씨는 길을 나섰다. 버스를, 전철을, 택시를 번갈아 타며 말 그대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다는 도큐 신주쿠역에서는 출구를 찾지 못해 한 시간 이상을 허비하기도 했다. 택시 기사가 자신을 숙소 길 건너편에 내려줬지만, 그 길 하나를 건너지 못해 긴 여정을 복기하기도 했다. 그래도 해냈다. 아침 비행기로 일본에 도착한 뒤, 저녁이 거의 다 되서야 그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애타게 찾아 헤매던 숙소에서 말이다.


왠지 일종의 희열이 느껴집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남들 눈에는 어떻게 비춰질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날 제 자신이 너무 뿌듯했습니다. 중요한 건 이날의 경험이 제겐 적지 않은 깨달음이 됐다는 거에요. 스스로 보고 느껴야 내 것이 된다는 것, 다시 말해 스스로 보고 느끼지 않으면 결코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 깨달음이 자신감으로 표현됐던 것 같아요. 원래는 도쿄만 살짝 둘러볼 계획이었는데 나고야까지 가게 됐고, 그곳에서는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여행 가이드북의 안내대로만 움직였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거에요. 현실과 부딪치고 실수하면서, 여행을 할 수 없는 “몸”에서 여행을 할 수 있는 “몸”으로 바뀐 거죠. 장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장사할 수 있는 "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거, 너무 뜬구름 잡는 얘기인가요?






“내가 모르는 분야에서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한들…”

한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월급을 받기보단 주는 쪽이었지요. 의류유통업으로 시작해서 음식 장사까지, 손을 댄 사업 대부분 잘 됐습니다. 그러는 중에 캐나다 이민을 생각했고, 지난 2004년 나이 오십을 앞두고 밴쿠버로 왔습니다.

안락한 노후를 위해서였나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한국에서 이민을 신청했을 때만해도 경제적으로 매우 괜찮았어요. 그러다 막상 영주권이 나왔을 때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경제적으로 말인가요?
예. 이민을 포기하는 게 맍는 건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결국엔 이렇게 오게 됐지만 말이에요.


초기 정착자금은 풍족하지 않았다. 중고차 사는데 1만달러, 세 들 집을 구하고 몇 가지 물건을 사다 보니 또 1만달러가 나갔다. 가뜩이나 빈약했던 곶감 꽂이가 더 초라해졌다. 그는 불안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커 갈수록 통장 잔고 주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을테고,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싶었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늘 월급을 주던 쪽이었던 그는 49세 나이에 처음으로 구직 전선에 섰다.


직장 구하기가 녹록치 않았을텐데요.
맞아요. 영어도 못하는데다 나이도 많았으니까…. 이력서를 내면 우리하고는 일 못하실 것 같다는 얘기부터 들었어요. 그러다가 한 일식집에 취직이 됐어요. 설거지 담당으로 말이죠. 아마 시간당 8달러 가량 받았을 겁니다. 이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대우는 마찬가지였어요. 아침 11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했지만, 그래서 번 돈으로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었지요.

하루 열두 시간 이상 일했다는 건가요?
근무 시간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11시까지였는데, 제가 한 시간 더 일해 줬어요. 그 다음에도 쉰 건 아니었어요. 새벽 5시까지 밴쿠버 시내 곳곳을 운전하며 다녔습니다. 

왜 그랬던 거죠?
밴쿠버를 알아야 하니까요. 어디에 뭐가 있는 지 정도는 머릿속에 입력돼 있어야 뭔가 시작해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찌됐건 한 달 정도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까, 밴쿠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첫 가게는 코퀴틀람의 한 쇼핑몰에 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거기였죠?
그 쇼핑몰에 대한 주변의 의견은 솔직히 부정적인 게 많았어요. 입지가 좋지 않다, 상권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뭐 이런 얘기들이었지요. 그런데 내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게를 열 때 물론 입지도 고려해야겠지만,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어떤 물건을 팔 수 있는 사람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죠. 내 물건에 경쟁력이 있다면, 입지가 좋지 않아도 사람들은 찾아 오게 되어 있어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흔히들 열심히만 일한다면 다 잘될 거라고 하잖아요.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매달려도, 결과는 항상 같아요. 노력한만큼의 대가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요? 가게 문을 닫는 게 정상이겠지요. 그러니 욕심 부리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 돼요. 그러다 보면 길이 점점 보이게 될 거에요. 일방적인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 경험만 놓고 보면 이게 맞아요.

욕심 내지 말라는 것, 이게 쉬울까요?
첫 가게를 열었을 때, 저희 가게에서 취급한 메뉴는 캘리포니아롤과 다이나마이트롤, 이렇게 딱 두 개 뿐이었어요. 그렇게 한 이유는 단순해요. 제 영어 실력으로는 손님들의 주문을 일일이 소화히기 어려웠다는 것, 하지만 롤 정도는 나도 괜찮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이게 다였지요.

그 메뉴가 어떻게 해서 경쟁력을 갖게 됏는 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민왔을 때만 해도 한국에서 김밥 한줄을 천원에 파는 식당들이 있었어요. 거기에 착안해서 2달러 동전 하나면 스시롤을 먹을 수 있는 그런 식당을 열었지요. 임대료가 1000달러 정도 되는 작은 식당이었어요.

그렇게 받아서 남는 게 있었습니까?
마진에 먼저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아들과 저, 이렇게 둘이서만 하루 종일 일했고 그 결과는 나쁘지 않았어요. 노스로드에 두번째 가게를 연 후에는 메뉴도 늘렸습니다. 각종 분식부터 냉면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팔 수 있는 메뉴에 늘 집중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매우 좋았습니다.


코퀴틀람의 “김밥천국”과 써리의 “스시천국”, 그리고 이른바 핫한 플레이스로 떠오른 뷔페식당 “서울회관” 모두 정재창씨가 키워낸 그의 자식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식 자랑, 그러니까 가게 홍보를 위해 인터뷰를 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식당 창업을 준비 중인 후배들에게 그저 작은 경험담을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가 언급한 식당 영업 허가 절차는 까다로움 그 자체였고, 식당 내부를 개조하는 과정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변수가 여러 차례 등장했다. 그래서 정재창씨의 마지막 얘기가 더욱 울림있게 다가왔다. “식당 창업, 대충 할 거면 안 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겁니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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