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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을 이기고 늙어가면서, 내가 만나게 된 행복”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5-08-21 13:48

문용준 기자의 차 한 잔 합시다-19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 유원덕씨
오래 전의 한 포크 듀엣은 <사랑과 자유에도>라는 노래를 통해 “기쁨은 1등만 갖는 건 아닐 걸”이라고 읊조렸다. 신문 기사를 굳이 검색하지 않는다 해도, 이 노랫말은 우리의 일상에서 곧잘 “참”으로 증명되곤 한다. 1등이 아니어도, 비싼 차를 굴리진 못해도, 마당 딸린 넓직한 집에 살진 못해도, 행복하다고 말하고 실제로도 행복한 사람들을 쉽게 접할 수 있어서다. 지난 2012년 봄에 만들어진 비영리 모임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의 유원덕씨(1939년생)도 그 중 한 명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1970년대의 한국은 풍족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흔치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때 결혼했고, 몇 년 사이 세 딸의 아버지가 된 유원덕씨는 40여 년 전의 한국에서 생존한다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이민을 결심했다. 30대의 그는 “나처럼 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막노동이라도 할 수 있다면 가장의 역할에 충실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76년, 첫 정착지는 캐나다 토론토였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이민을 생각하게 된 이유였군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목사의 길을 걷고자 했어요. 그래서 대학(고려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이후 감리신학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제 그릇으로는 목사직을 수행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어요. 대학원을 중도에 포기한 이후엔 할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변변한 일자리도 없었는데 덜컥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가졌죠. 상황이 썩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민을 오게 된 거에요. 달리 말하자면 그 당시의 이민은 생존을 위한 선택인 셈이었어요.

이민 와서는 어떤 일을 하게 됐습니까?
처음 1년간은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어요. 나 뿐만 아니라 당시 토론토에 자리잡은 한인들 대다수가 공장 생활을 하던 때였어요. 지렁이 채집도 꽤 인기 있는 일이었지요. 양쪽 무릎에 깡통을 차고 밤새도록 지렁이를 잡으면 일당으로 200달러까지 챙길 수 있었죠. 내 아내도 그 일을 하고 싶어 했죠. 그런데 내가 반대했습니다.

왜죠? 살림에는 적지 않은 보탬이 됐을텐테 말이죠.
당장은 돈 버는 재미가 느껴졌겠지요. 하지만 길게 보면 지렁이 채집 같은 고된 노동에 매달리는 것은 결코 옳은 결정이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돈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도 그 노동이 낯선 땅에 뿌리내릴 수 있는 일종의 동력 아닐까요?
물론이지요. 그렇지만 내 모든 전부를 일에만 바친다는 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어째서죠?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은행이었는데, 내 앞쪽의 누군가가 가족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이유로 돈을 빌리려 하더군요. 그 모습이 처음엔 너무 어이 없게 비춰졌습니다.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돈을 빌리려는 그 사람을 마냥 손가락질 하는 건 아니라는 판단이 섰어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알다시피 정해져 있잖아요. 그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과연 정답일까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내내 일만 하다 가는 건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일은 해야겠지요. 세금을 내는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또 가장으로서 말이죠. 하지만 일은 일주일에 닷새만 해도 충분해요. 나머지 이틀은 나와 가족을 위해 쓰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가족과의 시간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큰 돈 들여 논 건 아니었어요. 주말이면 아이들과 캠핑을 떠났지요. 또 1년에 6주는 일을 접고 북미주 이곳저곳을 다녔어요. 미대륙 횡단만 대여섯 차례 했습니다.

닷새만 일해도 캐나다에 정착하는데는 무리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자동차 공장에 다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 사고를 입어 공장을 나와야 했어요. 지금도 매월 보상금이 조금씩 나오고 있긴 하지만, 다른 일을 찾아야 했지요. 그때부터 “가나안”이라는 인테리어 사업체를 운영하게 됐습니다. 26년 동안 성실히 일했어요.

여가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사업 실적이 좋았겠군요.
처음 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모두 말렸어요. 당시의 내 영어 실력으로는 사업이 불가능할 거라는 거였죠. 누가 아시아계에게 일거리를 주겠냐는 얘기도 있었어요. 실제 처음엔 손님들 전화받는 것조차 두려웠지요. 하지만 신용이 쌓이다 보니까 고객이 또다른 고객으로 연결됐고 차츰 자리를 잡게 되더군요.





 유원덕씨가 동갑내기 아내인 유근수씨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캐나다로부터 받은 혜택, 돈으로 환산해 보니”


그 사업을 접고 밴쿠버로 오게 된 이유가 궁금한데요.
언제부터인지 목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는 만성 후두염이라고 했어요. 약을 먹으면 붓기가 가라앉고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목이 아파오는, 그런 일이 반복됐지요. 약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할 수 있다는 게 당시 내 상태를 본 의사의 판단이었어요. 그 의사의 권유대로 토론토 보다 공기가 훨씬 더 좋은 밴쿠버에서 한번 살아보기로 한 거였어요. 

실제로 좋아졌으니까, 이곳에 정착하게 됐겠지요.
맞아요. 한 달 계획으로 밴쿠버 여행을 왔는데, 놀랍게도 후두염이 사라졌어요. 그래서 10여 년 전 토론토 생활을 다 정리하고 이곳에 오게 된 거에요. 

그런데 밴쿠버 와서 방광암이 발견됐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날 소변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2008년 가을이었어요. 병원에 가서 급히 내시경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도 아내도 결과에 대해선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더군요. 


병에 걸렸다는 건 그날 저녁 알게 됐다. 아내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마침 그 내용이 암환자에 관한 것이었다. 방송을 보던 아내가 그에게 조용히 얘기했다. “여보, 당신 암이래” 아내가 전해준 선고에 어떠한 반응도 할 수 없다. 그냥 수십년을 함께한 사람을 부둥켜 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투병생활의 시작이었군요.
수술을 아홉 번이나 받았어요. 완쾌 가능성이 없자 결국엔 의사가 신약 사용을 권하게 됐지요.

응했습니까?
아니요. 암 판정을 받았을 때 처음엔 많이 괴로웠지만, 죽는 날만 기다리지 말고 죽기 전에 좋은 일을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매주 토요일 열리는 “행복 모임”이었습니다. 2012년 3월 첫 모임을 했는데, 그때부터 3년 동안 장소 대여비부터 간식비까지 전부 제가 부담했어요. 놀라운 것은 이 모임에 매달리면서 암이 사라졌다는 거에요.

의사도 놀랐겠군요. 지금은 그럼 완치된 건가요?
아직 완치 진단이 난 것은 아니에요. 처음엔 3개월 간격으로 검사를 받게 되고, 그 다음엔 각각 6개월 간격으로 세 차례 병원을 찾아야 하죠. 이후 1년간 검사를 통과하면 암이 완전히 치료됐다는 진단이 내려지죠. 저 같은 경우엔 6개월 간격 검사 중 두번째 고비를 넘긴 상태에요. 

암을 이겨내기 위한 한 방법으로 행복 모임을 만들게 된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캐나다처럼 좋은 나라에 살 수 있게 된 것을 나는 늘 감사하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마음으로만 고마워하면 뭐해요, 겉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그게 진짜지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느끼게 된 기쁨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는 것, 이게 참행복이고, 우리 행복 모임의 지향점이어에요.

이 땅에 사는 것이 왜 그리 고맙습니까?
쉽게 설명해 줄까요? 캐나다에 이민 와서 지금껏 내가 받은 혜택을 돈으로 환산해 봤숩나더. 나 같은 경우 방광암 수술만 아홉 번을 했는데, 그 비용이 40만달러 정도 될 거에요. 여기에 우리 세 아이의 대학 등록금, 연금 혜택 등등까지 합치면 100만달러는 족히 됩니다.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게 그저 당연하지요.


유원덕씨는 이른바 백만장자가 아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부자로 산다. 열심히 일한 댓가로 은퇴 후에도 누군가를 도울만한 여유를 갖게 됐고, 세 딸도 잘 자라주었다. 국제변호사인 큰 딸은 미국 정부에 몸담고 있고, 둘째 딸은 캐나다 연방 정부 공무원이다. 고등학교 영어 교사였던 막내딸은 네덜란드 출신 기자와 결혼한 뒤 지금은 그곳에서 살고 있다. 그녀의 직업은 네덜란드 고위직 공무원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유원덕씨에게는 자식보다 더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어 보였다. 나눔의 기쁨으로 충만한 자신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행복 모임” 회원들과 함께 그 기쁨을 세상에 전달하고 있다. 매월 정기적으로 유니세프, 북한 아동 구호 기관인 퍼스트스텝, 그리고 BC아동병원을 돕고 있다. 이들이 내는 돈은 많지 않다. 하지만 회원들 스스로 삶의 기쁨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액수다. 

행복 모임은 매주 토요일 한인타운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카메론도서관에서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매번 평균 25명이 자리를 함께 하는데, 이들은 유원덕씨 등이 준비한 영어회화 공부, 건강 강좌, 음악 감상 등을 즐긴다. 이 모든 내용이 무료로 제공됐지만 얼마 전부터는 매월 10달러를 회비로 받고 있다. 이것도 강제적인 것은 아니다. 유원덕씨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인생은 기쁜 것이고, 그 기쁨은 나눔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행복 모임에 참여하게 되면, 그의 말이 더욱 분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기쁨은 1등만 갖는 게 아니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행복 모임은 매주 토요일 오후 1시에 버나비 카메론도서관(9523 Cameron St.)에서 열린다. 9월부터는 만남의 시간이 오전 11시 30분으로 변경될 예정이다. 문의 (604)420-2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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