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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된 북한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회로 봐야 합니다”

권민수 기자 m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5-01-01 14:01

꽃제비·탈북자·한반도인 그리고 캐나다 의원 인턴보좌관 이성주씨
사회가 구성원에게 정당한 보호와 대우를 제공하지 못하는 상황은 종말이나 대재앙을 다룬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서구 사회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 그 상황이 실제한다고 보기보다는 상상의 영역에서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 속속들이 밝혀지는 북한의 실상은 최근 유행했던 헐리우드의 재난·멸망 영화의 배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 12월 17일 만난 이성주씨(27)는 이런 사회붕괴를 헤쳐나와 북한의 상황을 진술하고 있는 사람이다.

1993년 흉작으로 시작된 북한의 대기근은 2005년까지 이어졌으며, 한국 통일부 추계기준 사상자는 61만명에 달했다. 이 시기의 일부인 1996년부터 2000년까지를 북한은'고난(苦難)의 행군(行軍)'이라고 부른다. 김일성이 항일빨치산을 할 때 보급 없이 활동했다는 북한의 주장에서 나온 말이다. 어원과 표현이 어떻든 고난의 행군 실체는 기초 사회제도의 붕괴였다. 이성주씨는 그 시기에 북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 이씨는 평양에서 살았던 선택받은 가족이었으나 이후 북한 청진으로 이사를 나오게 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1998년 이씨의 아버지는 식량을 구하러 중국으로 떠나고, 그 후 3개월 후 어머니도 집을 나서면서 12살 이씨는 꽃제비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꽃제비란 부모없이 떠도는 어린 거지를 뜻한다. 꽃제비라는 명칭의 어원은 러시아어로 유랑자를 뜻하는 '코체비예'를 차용했다고 이씨는 보고 있다.

이 씨는 살기 위해 구걸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꽃제비 생활을 4년간 하고, 아버지가 보낸 브로커를 따라 2002년 청진에서 탈북, 2003년 17세에 한국으로 들어갔다. 이후 서강대에서 정치외교학과 신문방송학을 공부하며, 북한 인권에 관한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캐나다의 대북(對北) 인권단체 한보이스가 마련한 탈북자 지도자 육성프로그램에 선정돼 베리 드볼린(DeVolin)하원의원 인턴보좌관으로 지난해 7월부터 12월까지 5개월간 캐나다 정치 연수를 받았다. 강연차 오타와에서 밴쿠버를 방문한 이씨를 숙소에서 만나 한 시간가량 대화한 내용을 요약해본다.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 또는 통일 이후 사회를 예비하기 위해, 이씨의 북한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시대의 이야기로 들어둘 내용이었다. 권민수 기자 ms@vanchosun.com


<▲ 밴쿠버에서 강연 중인 이성주씨. 사진=최성호 기자/sh@vanchosun.com >



북한에 대해 진술하며, 본인이 꽃제비였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꽃제비란 무엇인가?

" 꽃제비는 러시아 코체비예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정확한 의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코체비예가 러시아어에서 부랑자란 뜻입니다. 북한은 사회주의 공산국가다 보니 거지가 있다고 할 수가 없어서 꽃제비란 단어를 차용한 것 같아요. 꽃제비라 하면, 집이 없고, 부모가 없는 어린애를 꽃제비로 분류합니다. 시장에서 먹을 것을 해결하고 밤에는 역에 가서 잠을 해결하죠. 이런 부류가 있는가 하면 꽃제비도 여러 부류가 있는데. 가족 단위 꽂제비가 있습니다. 가족 단위로 떠돌면서 식량은 장에서 해결하고, 역에가서 잠자고, 이런 부류가 있다면, 저는 처음에 말씀 드린 대로 친구하고 몰려다니는 꽃제비였습니다."


북한도 의무 교육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꽃제비가 될 수 있었나?

“당연히 북한도 의무교육이 있고, 11년 의무교육을 제공한다고 자랑하잖아요? 그런데, 96년부터 2000년 그때까지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라고 해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거든요, 통계를 낼 순 없지만 적게는 25만명에서 많게는 300만명까지 보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 기간에… 저도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학교에 나오지 않습니다. 학교에 선생님이 가르치러 나와야 하는데 안나오고, 시장에 가는 거에요. 시장에 가서 선생이 장사하니 애들은 방치되는 거에요. 애들도 배가 고프니 학교에 가도 선생님이 어떤 얘기를 해도 귀에 잘 안 들어와요. 선생님이 쓰는 백묵이 먹을 걸로 보이는 거에요. 배고프다 보니 교실에 앉아있기 힘든 겁니다. 그러다 보니 애들이 교실 밖으로 나오고, 학교 가는 대신 시장에 가서 주워 먹거나…

그리고 그 기간에 부모들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되게 많았어요. 엄마나 아빠가 굶어 죽거나, 그러면 애가 학교에 못 나오고, 애가 먹고 살아야 되니까. 시장으로 나오게 되고, 시장에서 먹고 살아야 하니까 친구랑 만나서, 먹고 살아야 하니까 도둑질도 하고 소매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훔쳐먹기도 하고, 빌어먹기도 하고…

그런 게 94년말부터 2000년 이때까지 이어졌죠. 꽃제비는 엄청나게 많았어요, 제가 꽃제비 경험을 얘기하면 지금 애들이 어떻게 그런 일을 했느냐 하는데… 그때는 다 그렇게 사니까. 제가 이상하다는 것을 못 느꼈어요."


사회 시스템의 붕괴 상태를 겪었다고 할 수 있겠다.

“평양에는 꽃제비가 없었어요. 제가 평양을 나온 것이 1997년인데, 그때 평양을 나오면서 기차를 타고 나왔어요. 기차가 서는 역마다 꽃제비들이 엄청나게 많은 거에요. 그때는 북한이 아닌 줄 알았어요."


결국 국민의 보호라는 기본 의무를 국가가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어려서 잘 몰랐겠지만, 지금 돌아보면 생각이 드는가?

“북 한 내부적인 문제만 보면, 국가의 잘못으로만 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만 보면 시야각이 좀 좁아지는 것 같습니다. 먼저 소련이 붕괴했잖아요? (1991년 소련 해체) 소련으로부터 북한이 받던 우호 가격을 받지 못하게 됐어요. 우호가격이란 국제유가 보다 낮은 가격에, 돈 대신 광물을 주고 석유를 받아오는 일을 말합니다. 그게 소련 붕괴로 사라졌고, 그러다 보니 북한 내 트랙터라든가 농기구는 다 서버렸고, 결국 93년에는 흉년이 왔습니다.

94년에는 김일성이 죽었잖아요? 김일성이 죽고 나서 북한이 가장 초점을 맞췄던 게 권력의 안정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군에 모든 것을 퍼붓는 선군(先軍)정책이 나왔죠. 모든 자원을 군에 쏟아붓는 상황에 업친 데 덥친 격으로 자연재해, 홍수가 났어요.

북한은 화력 발전을 많이 하는데, 홍수로 석탄 갱이 다 물에 자기니까 연료인 석탄을 채굴 못해 발전소가 안돌고, 그러다 보니 공장이 서고... 그 다음은 도미노였죠. 공장이 안도니 배급이 끊기고, 배급 끊기니 사람들이 산에 가서 나무해다 시장에 팔고, 민둥산이 됐으니 다시 홍수가 들고... 사회주의란 게 하나가 구멍나면 도미노처럼 다 무너집니다"


국제 정세변화에 적응 못 했고, 그 와중에 제한된 자원을 충성그룹에 다 몰아주며 국민 생계를 포기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국가 시스템을 위기로 몰고 간 것인데, 지금이야 객관적으로 이야기 하지만, 성주씨는 그 한가운데 있었다. 당시 경험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가?

"제가 북한에 있을 때는 북한 매체의 말을 들었던 것 같아요.'우리가 못사는 이유는 미국이 계속 우리를 침략하려 한다. 그래서 우리가 선군정책을 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였죠.

북한 사람들이 배고프면서 만들어낸 것이 광명성 1호, 그게 대포동 1호죠. 97년인가, 98년에 쏘아 올렸을 거에요. 그 때는 희망을 가졌어요. 미국 압제 속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우리가 이렇게 굶는 이유가 있구나.

그 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미국이 북한을 침공해야 하는 데 안 하는 거에요. 그 때 왜 그럴까? 거기서 의심이 시작된 겁니다. 그리고 북한은 어린이를 나라의 왕이라 부르는데, 제 삶을 봤을 때 왕이 아니라 거지인거에요. 그런 것에 대한 분노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어요.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어요. 북한서 낙서하면 안되는데, 홧김에 숯을 주어서 다리 밑에 가서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을 타도하자'라고 썼어요. 그런데 웃긴 건 정말 정권을 어떻게 하자는 정치적 불만보다 배고프고 짜증 나니까 쓴 거죠"


사춘기식 반항이었나?
“네. 정치적 의미가 있었기보다는… 그 상황이 너무 싫어서 그렇게 낙서를 한 거죠."


* 앞서 언급된 대포동 1호는 1998년 8월31일 발사됐다. 대포동 1호는 스커드미사일을 개조한 장거리탄도미사일(IRBM)이다. 북한은 이어 사거리를 비약적으로 늘린 대포동 2호를 개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보유국이 됐다. 대포동은 한국정부의 명칭으로 북한은 대포동 1호를 백두산 1호로, 대포동 2호는 은하 1호로 각각 탄도미사일이 아니라 우주발사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포동 1호에 실었다는 인공위성 이름이 광명성 1호다. 광명성 1호는 궤도 진입에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한국의 88만원 세대처럼, 어려움을 공감하는 세대를 아우르는 표현이 있듯이, 탈북자 사이에서도 사회 붕괴 경험에 대한 공감대나 아우르는 표현이 있는가?

“탈북자라고 구분하지만, 실제로 사람마다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왜냐면, 북한은 너무나 폐쇄됐기 때문에, A지역의 삶과 B지역의 삶은 다릅니다. 전반적으로 못살고 다 힘들었지만, 예를 들어서 함흥하고 청진에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이 많이 다르고,… 사정이 다르다 보니까. 물론 한국에 나와서 탈북자들 만나면 고생했던 그런 것을 당연히 나누지요. 근데, 뭐, 그걸 나눈다고 해서 끈끈한 정을 맺고 그런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우리 고생했으니, 열심히 살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한 국에 와서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고 들었다. 이 질문을 하는 의도는 정체성 혼란은 이민 1.5세나 2세 사이에서도 캐나다인·한국인 혼란이  발생하는데, 이와 유사한 것인지 확인해보고 싶다. 어떤 종류의 혼란이었나?

“제가 한국에 왔을 때 정체성 혼란이란 것이… 한국 사람들이 한민족이라고 하잖아요. 북한 사람들을 보고, 우리 친구, 반쪽이라고 하잖아요.

그 런데, 그 사람들이 저를 대하는 것은 외국인처럼 대하더라고요. 제가 일을 구하려고 하면, 서류전형은 통과해요. 면접에 가면,지금은 괜찮지만, 예전에는 북한 어투가 있었거든요. 몇 마디 질문하면 제가 북한 악센트로 답하는 거에요. 그러다보면 다시 질문 안하고, 당연히 저는 떨어지는 거에요.

뭐가 문제인가 보니, 제가 태어났고, 제가 자라 온 곳에 대한 사람들의, 뭐랄까? 의심, 또 북한 사람들의 편견? 북한 사람이라고 하면 주체사상으로 꽉 무장돼 있을 것이고, 오랫동안 브레인와시(brainwash·세뇌)를 당해왔기 때문에 일도 잘 모르고, 그리고 게으르고 멍청하고, 바보일 것이다. 이러한 그 사람들만의 편견이 있는 거에요.

이런 편견이 북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탈북자들에게 가장 큰 장벽이 되는 것 같아요. 그걸 겪었고, 가끔씩은 외국인보다 더 낮게 취급할 때도 있었어요. 제가 막노동 현장에 가면 조선족과 같이 일하고, 베트남에서 온 사람과 같이 일하면, 제가 받는 일당이 더 작은 거에요. 그래서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까. 그거더라고요. 제 사장님이 북한에서 온 사람을 되게 안좋아하는 분이셨어요. 그러다보니 그런게 되게 많은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그런 걸 경험하면서 나는 누구지? 라는 생각이...”


심지어 한국 시민권도 받았는데?

“그럼요. 제가 한국 시민권도 있고, 북한사람은 반쪽이라는데 왜 이러나… 제가 정체성 혼란을 2년 정도 겪었어요. 결국은 제가 지금 기독교인인데, 기도하면서 찾았지요. 저는 북한 사람도 아니었던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남한 사람도 아니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는 한반도인인거에요.”


지금 가진 자기 정체성은 한반도인이란 것인가?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자랐고, 지금은 한국에서 살고 있죠. 그렇다면 그 한반도인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을 하다보니 꿈이 생기더라고요. 많은 사람이 이렇게, 저에게 물어봐요. 북한에서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 저는 처음에 정체성을 찾기 전까지는 진짜 후회했습니다.

북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키도 작고 얼굴도 까맣고 공부도 못했고… 그래서 북한을 되게 저주했어요. 나중에 정체성을 갖고 신앙을 가지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제가 어떤 것을 배웠느냐 하면, 아, 내가 북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 알게 됐고, 오히려 북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꿈이 있구나. 그래서 오히려 지금은 북한에서 태어난 것을 참 감사하다…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사람은 미친 것 아니냐 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겪어보다 보니까 참 북한에서 고생했던 경험들이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리고 지금까지 엄청나게 영향을 미치고 있거든요.

친구들이 저한테 이래요. 어딜 가나 잘 살아남는다고. 제가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생존 능력이라고 그럴까, 그런 것을 아마 잘 배양하지 못했을 거에요. 지금은 북한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사는 것이 오히려 감사한 것 같아요”


정체성을 신앙에서 찾았다고 할 수 있나?

“신 이 없다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을 믿으면서 저 자신을 잘 알아갔던 것 같아요. 이해 안 되는 부분들, '내가 왜 북한에서 태어났을까?', '왜 내가 개고생했을까?' ,'왜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지?' 그 부분에 대해서, 내가 누군가의 섭리에 의해서 살아남았고, 그 경험을 했고, 그 땅을 떠나 이 땅에 와서 살고 있구나. 그런 점에서 신앙이 제 정체성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캐나다에 와서 5개월을 경험했다. 캐나다를 어떻게 보았는가?
“캐나다에 와서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캐나다 사람들은 삶을 어떻게 즐기는지 아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하고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전 정말 좋더라고요. 아버지가, 한국 같은 경우는 아침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 분도 많잖아요? 여기 캐나다는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 5시면 퇴근해서 팍(Park)에 가서 아이들과 뛰는 모습을 보면서, 아 사람들이 삶을 즐길 줄 아는구나. 그걸 하나를 배웠고요.

그리고, 이제, 제가 오타와 3개월에 있으면서 퀘스천피리어드(청문회)에 여러번 갔었거든요. 처음에는 짜증난다. 이 분위기였어요. 처음에는 엄청 시끄럽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막하고… 서로 정말 무례하고 그런 거에요. 아, 참 왜 이러나 했는데, 그 사람들이 하는 걸 보면서… 아, 이게 민주주의구나. 하우스 안에서, 규칙 안에서 자기의 선거구를 대변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을 보며, 이게 민주주의구나.

한 가지 더 배웠던 것은 이제, 캐나다하면, 오케스트라 같아요. 여러 가지 악기가 모여서 화음을 내는 오케스트라처럼… 하나의 악기가 내는 소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여러 악기가 사람이 모여서, 캐나다라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더라고요. 참 다양성이 존중되고, 또 다양성을 소중히 여기는 나라. 그게 모여서 또 민주주의 아닌가. 많은 걸 배웠던 것 같아요. 사실 오타와에 가보기 전에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어요. 정치하면 다 거짓말쟁이들… 다 국민의 세금을 떼어먹고, 자기 할 일 안하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3개월이 긴 기간은 아니지만, 물론 커럽트(Corrupt·부패)한 정치인도 있어요. 그런데 다 그렇지는 않죠. 제가 만난 정치인들은 정말 열심히 하더라고요. 법을 만들면서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더라구요. 정치라는 것이 정말 중요하구나. 훌륭한 의사가 환자를 고치듯이, 훌륭한 정치인은 병든 사회를 고치더라구요. 정치도 해볼만한 직업이구나…

지금 정치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요.  한국 사회를 위해, 제가 탈북자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저의 뿌리이고 역사잖아요. 앞으로 2만 7000명의 탈북자가 있고, 더 늘어날 건데. 제가 이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통일을 준비하는 훌륭한 정치가가 돼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고 있습니다.”


한국의 탈북자가 잘 적응하고 있다고 보나?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요. 잘 적응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고…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잘 적응하는 것 같아요. 머리가 말랑말랑하잖아요”


북한의 끔찍한 인권 유린 상황을 밝히고 있다. 요즘 UN이나 서방 의회에서 인권 유린 증언이 이어져, 사람들의 북한 인권 유린에 관한 상황 인식이 이뤄지고 있다. 증언이 그저 사람들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인식전달 정도로 머물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본다. 증언, 그다음은 무엇을 기대하나?

“탈북자가 북한인권운동가를 자임한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북한에서 나온 사람인데, 어쩌다 보니 자기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그게 심각한 인권유린 경험담이었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통해, 공감하면서, 북한 사회가 어떤 상태인지 폭로가 됐잖아요. 저는 국제사회가 북한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취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렇다고 인권을 위해 북한을 쳐들어가자는 것은 아니고, …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북한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책임있는 사람은 당연히 처벌을 해야겠고,  그리고 더 나아가 처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북한 내 인권을 어떻게 개선할까 하는 고민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단순히 폭로하고, 북한 정부를 압박하고 비판하는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개선할까에 대한 답을 찾는 실질적인 연구가 있었으면 합니다. 용감하게 알렸으니 (인권을) 개선하는 단계까지 같으면 합니다.

만약 통일됐을 때, 북한 사람들이 한국에 내려와서 질문할 겁니다. 여기 와보니 인권이란게 있는데, 남한 사람들에게 한민족으로서, 반쪽으로서 당신은 내가 북한에서 인권을 침해당할 때 무엇을 했느냐고 반드시 질문할 겁니다.

저는 그때 한국 사람이 해줄 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인권을 위해 내가 내 목소리를 냈고, 내가 돈을 아껴서 배고픈 당신을 위해 식량을 보냈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것들이 나중에 한반도가 통일되고, 정치가 하나가 되고, 나아가 사람의 통일이 일어날 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인권은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 참 중요한데,…많은 분들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식량을 보내주면 (북한) 군인에게 가고…”

그 부분이 한국사회에서 항상 논란이되는 부분 아닌가? 지원을 해주면 군의 배를 불리는 북한 정권의 문제.

“예. 직접 필요한 사람에게 안 간다. 그게 사실 맞습니다. (식량을) 지원해주면 70%는 군량미로 가고 20%는 이제 평양에 가고 10%는 전국에 뿌려지면, 당장 필요한 사람에게 안갑니다. 그런데 한 발자국 물러나 생각해보면, 70%가 군량미로 가면, 이미 저장됐던 군량미는 시장에 식량으로 풀립니다. 그럼 식량 가격이 내려가는 거에요.

예컨대 전에 쌀값이 100원인데, 50원밖에 없어 못 사먹던 사람이 쌀값이 떨어져서 살 수 있게되요. 그렇게 먹을 수 있는 게 인권이잖아요? 무엇인가 주면 북한 정권 유지에나 도움이 된다라고 생각이 거기에 멈추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좀 더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느냐라는 말이 있잖아요? 정부에 먹는 것 보내주면 미사일 만든다, 핵 만든다 하지만, 식량 그 자체로는 미사일 어렵죠. 미사일을 만드는 것은 돈을 보내주면 만듭니다.

예를 들어서 북한 여행 가는 사람들. 한국이나 미국, 캐나다 사람 중에 북한에 여행 가면, 그게 어마어마하게 비싼 여행이거든요. 그게 돈이, 다 정부 손에 직접 들어갑니다. 그거 가지고 무기를 만듭니다.

그 러나 쌀가지고, 쌀로 핵무기 만든다 건 말이 안되요.  혹자는 북한에 쌀을 보내면, 그 쌀을 중국에 팔아 돈을 만든다 하는데, 중국 사람이 북한 쌀을 살 이유가 없어요. 요즘 중국에 넘치는 것이 쌀인데요. 그런 부분을  좀 더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성주씨 자신이 북한 변화와 관련해 고민하는 부분이 있는가?

“저는 북한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당연히 삐라 문제가 나올 수 있는데요. 한국에서 삐라를 많이 보내잖아요. 여러 단체들이… 저는 거기에 동의는 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진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김정은 돼지. 그림 붙여서 보내잖아요? 북한 사람들도 다 알아요. 그들이 돈을 뜯어먹는 것. 북한 사람들도 김일성·김정일 때문에 고생하는 것 다 알고 있어요. 그런 것을 보내면 쓰레기밖에 안돼요. 삐라가 떨어졌을 때 주어야 메시지가 전달되는데, 안 주워봐요.

주웠을 때 일단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으니까. 아예 무시하는 거에요. 효과가 없는 거죠. 북한-중국 국경지역에서 남한 드라마와 함께 민주주의를 알렸으면 해요.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잖아요. 북한 사람들이 아는 민주주의가 보편적 민주주의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면… 그 안에서 지식인이 생겨나고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거든요. 드라마를 왜 언급하자면, 드라마 속에 사람들의 삶, 사업하는 모습,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 교육이 되요”


그럼,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북한사람들이 동질감까지 느낄 수 있나?

“예, 저는 동질감을 느낀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북한 사람 패션을 보면, 남한 사람들과 요즘 많이 유사해졌어요. 한국 드라마를 보고, 거기에 나오는 예쁜 옷이 있으면, 재봉사에게 그 장면을 가져가요. 물론 남한 드라마 잘못 봤다간 총살하고도 연결되지만, 재봉사도 돈을 벌어야 하니까. 보고서 그대로 만들어요.

북한 사람이 손재주가 좋아요. 옷감은 남한하고 다르지만, 디자인은 비슷해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옷을 입고 보면서, 충분히 동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봐요. 남한 드라마를 통해 북한 사람들이 동질감을 회복하고 있어요”


그러나 아무리 외부로부터 자극이 있어도 내부로부터 변화가 없으면 소용없는 것 아닌가? 북한 내 부조리를 해결하려는 주민들의 자체적인 노력은 없는가?

“90년대를 거치면서 북한 내에서 사회주의를 떠난 사람들이 많아요. 90년대 이후 세뇌 시스템이 거의 붕괴하면서 세뇌를 받지 않은 사람이 많아요, 이 사람들은 시장을 통해 먹고 살아왔죠, 북한에 주요 도시가 27군데 있는데 350개 시장이 있어요. 각 도시에는 최소 12개 시장이 있지요. 그 시장이 변화의 중심이 될 겁니다. ”


대부분 역사상 변화는 주도세력의 교체에서 일어났다. 예컨대 시장 상인이 공산당을 교체할만한 세력인가?

“교체할 만한 세력이 없다면, 중국 모델이 있잖아요? 세력은 교체가 안 됐지만, 최소한 중국은 먹고는 살잖아요? 저는 지금 북한이 조금씩 중국 모델을 따라가고 있다고 보거든요. 북한 같은 경우 지금 시장을 단속 못 해요.

2009년에 북한 화폐 개혁을 했는데, 이 개혁이 대실패였거든요. 이 사건의 의미가 뭐냐면, 국가가 시장을 통제하지 못하게 됐다는 거죠. 시장이 커지고, 시장을 통해 북한 기업들이 이윤을 올리고 있거든요.

예를 들어 100원을 벌면 20원을 국가에 세금으로 바치는 형식으로 바뀌고 있어요. 이 말의 의미가 뭐냐면 북한도 바뀌고 있다는 거죠.

지난해부터는 일곱 가정 단위로 국가가 어느 정도 땅을 줘서, 마음대로 경작하게 하고, 10톤을 생산하면, 나머지 3톤은 국가에 바치고 7톤은 나눠서 먹게 하는 거죠. 그런데 식량으로 다 나눠 먹을 수는 없으니까 장터에 들고 나와 옷이며 그릇, 칫솔같은 물건으로 바꿔갑니다. 지금 북한은 엄청나게 바뀌고 있어요”

*2009년 북한 화폐개혁은 북한이 시장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구권 100원을 신권 1원으로 두 가지 제한 아래 교환토록 한 정책을 말한다. 구권의 신권교환보다 는 제한 조항이 극심한 시장교란 현상을 일으켰다. 제한 조항은 ▲가구당 교환 가능 금액을 10만원으로 제한 ▲그 이상 금액은 은행에 강제 예치토록 한 것이다. 특히 강제예치는 국가의 자본 강제 징발조치였다. 북한 당국 측면에서 암시장에서 풀린 돈을 회수하는 조치였다. 결국 외환을 보유한 북한의 특권층보다 일반 화폐를 쓰는 국민에게 큰 피해를 줬다. 하이퍼인플레이션(돈의 가치 상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 입장에서는 재산이 줄어들고 구매력도 상실했다. 북한 경제는 북한 돈보다 안정적인 중국 위안화에 더욱 의존하게 됐다.


북한의 변화를 사람들이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고 보나?

“사람들이 북한 하면 항상 얘기하는 것이 핵무기, 김정은과 억압정치 체제. 당연히 다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보면 놓치는 부분이 있어요. 북한, 평양 외 지역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사람들이 잊고 있어요. 간과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북한을 고정된 관념으로 보는데, 그게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사회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인가?

“네. 고정관념으로 보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고 봅니다. 북한이 변화의 궤도까지 올라오진 못했지만, 지금 궤도로 올라오려는 움직임은 있다고 보거든요. 20년 안에 변화는 올 겁니다.

그 이유가, 90년대 세대들. 이 사람들은 20년 후면 나이가 30·40대로 사회주도층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북한이 유지되는 이유가 60·70년대 북한이 잘 살았던 때가 있는데 그때 태어나 자란 사상적으로 잘 무장된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들 때문에 김일성이 죽어도, 김정일이 죽어도 계속 정권이 안전한 거죠.

그런데 이 세대가 20~30년 후에 90년 세대에게 자리를 내주면 북한은 정말 어떻게 변화할지 모릅니다. 또한 시장세력들. 북한이 지금 엄청나게 부패한 사회에요. 이 시장세력이 지역의 주인이 되고 있어요. 합법적인 거래도 하지만 오피움(아편) 같은 불법 거래까지도 합니다. 걸리면 당연히 총살감이죠. ”


그런 조직화는 앞으로 통일 후에도 사회 위험요소가 되지 않겠는가?

“과거 제 나이또래 꽃제비들이 조직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소련 말기 때 마피아처럼, 시장 꽃제비들이 시장에서 돈을 받고 상권을 지켜주는 일도 하고, 한류 드라마를 전국에 뿌리는 일을 하기도 하죠. 이런 사람을 위해서 USB 저장장치에 민주주의 내용을 담아 보낼 필요가 있어요.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들이 통일된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고, 바른 판단을 내리게 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합니다. 스스로 깨우치게 해야 돼요.

만약에 통일이 돼 문이 열렸을 때 남한 사람들이 올라가서 가르치려고 한다면, 예를 들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고 통제하기 시작하면 북한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어요. 사사건건 참견하게 되면 통일을 남한의 침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달라는 것인가?

" 그렇습니다. 북한 사람도 자기 삶의 방식이 있는 거죠. 그걸 인정하돼, 미리 정보를 들여보내서, 북한 사람들이 스스로보고, 그 정보를 가지고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바꾸게 하는 거죠. 자기의 행동이 새로운 통일 사회에서는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삐라를 보내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찬성하고, 북한 정부를 압박하는 데 중요하지만, 미래를 준비하려면, 삐라보다는 판단할 수 있는 정보들, 드라마가 들어있는 DVD 그런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캐나다에 사는 한인이 북한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을까?

"북한과 남한을 떠나 제삼자로서 모국을 볼 수 있잖습니까? 한국에서는 통일 논의가 정치적으로 얽매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자칫하면 빨갱이, 자칫하면 보수꼴통이 돼 북한이란 이슈를 논하기가 한국 내에서도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캐 나다에 사는 한인은 모국이지만, 제삼자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남북한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겠지요. 한국 정치인의 통일론이나 한국 정치인이 보는 북한이 아니라, 밖에서 살면서 보는 정확한 북한. 정확한 시각을 토대로 좀 더 큰 소리로 북한을 이야기한다면, 이런 말들이 남북한을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예컨대 북한의 인권을 얘기할 때, 남한에서는 순수한 인권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이용하는 경우, 혹은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캐나다에서 북한의 인권을 이야기하면, 정확히 인권을 제대로 이야기합니다.

남북한을 객관적으로 보고 이해하고, 좀 더 말했으면 좋겠어요. 남한에서 북한 이야기를 할 때는 조심스러워요. 예를 들어 북한의 시장이 성장하고 있고, 그 시장세력을 중심으로 사회가 재편돼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붕괴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말을 하면, 한국에서는 북한 정권을 마치 옹호하는 사람 처럼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어요. 제 말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자기 시각을 재확인하려고 하니 북한이 제대로 보이질 않습니다. "


 북한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냐?

" 대부분 사람들 가진 북한에 대한 관념은 5~10년 전의 상황을 토대로 한 것이 많아요. 유효기간이 지났죠(out of date). 그것을 토대로 북한을 얘기하면 그런 북한은 이미 없어요. 북한도 하나의 사회로 변화해서 달라지고 있는 거죠.

결국 과거의 북한을 토대로 이야기하다 보면 에너지는 에너지대로 쓰고, 비용은 비용대로 이상한 데 쓰게 되는 겁니다. 북한은 여기 와있는데... 북한 사회에 대해서도 정보를 업데이트했으면 좋겠어요.

핵무기만 보기보다는 좀 더 넓고 정확하게 전반을 봤으면 합니다. 카다피가 죽은 후 리비아 사회는 오히려 엉망진창이 됐는데, 그와 같은 일이 북한에서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현실을 보고 정확히 준비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합니다.

한국을 봐도 연 소득 3000달러를 넘어서면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북한도 지금 시장 세력이 성장해서 어느 정도 살게 되면 충분히, 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간 한국 정보가 북한에 안들어간 것은 아니지 않은 데, 완만한 변화에 대해 너무 이상적인 것 아닌지? 북한 사람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고 감당할 준비가 안 된 것 아닌가?

"제 아버지 세대는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환경 자체에 대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변화를 피하는 세대가 있는 점은... 맞습니다.

그 러나 90년대 세대는, 살기 위해 시장에서 살고 살아남은 그 세대는 다릅니다. 스스로 훔쳐먹고, 스스로 장사하고, 스스로 살아남은 이 사람들은 다릅니다. 20년 후 북한이 달라질 것이란 저의 전망에 너무 유화한(naive)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는데요. 오히려 저는 유화한 생각이 아니라고 봅니다.

북한 정권이 시장경제를 활성화하는 메인프레임이 담긴 정책을 내놓은 것만 봐도 변화는 시작됐다고 봅니다. 시장이 커지면 북한 정부의 권력은 오히려 줄어듭니다. 저는 왜 북한 정부가 이런 계획을 추진하는지 그 속까지는 모르겠지만, 통제할 대상이 많아지면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람을 수영장에 몰아넣었다고 합시다. 50명 정도 있으면 수영장을 떠나는 사람은 죽이겠다는 협박이 통합니다. 이때까지 북한은 이들을 다 죽여서라도 체재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수영장 안에 인원이 5000명이라고 하면, 다 죽일 수도 없고, 통제도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려고 하면, 통제하려는 사람과 갈등은 필연 아니겠는가? 북한 내부 갈등도 필연일 듯싶다.

" 네. 정부 세력과 시장 세력의 갈등은 필연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궁극에는 정부 세력이 시장 세력에 맞춰 정책을 바꿔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국처럼 그렇게 바꾸는 것이 정부 세력에도 궁극에는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가 있어도 외부에서는 북한의 얼굴인 김정은만 보이지 않겠는가?

" 김정은만 보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게 북한을 잘못 파악하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김정은이 죽었다고 북한이 붕괴하진 않을 겁니다. 승냥이들이 호랑이 하겠다고 싸움은 일어나겠지만요. 물론 북한 사람들은 반 발자국 뒤에 있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렇게 김정은의 엉덩이를 두들겨 주면서 챙기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가는 책임질 일이 많으니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지요"


김정은이 자리를 지키는 상황에서 변화가 과연 있겠는가?

" 조선을 건국했잖아요. 김일성은, 김일성에 대한 북한 사람의 마음은 일종의, 중국인이 마오쩌둥을 바라보는 애정, 혹은 그 이상일 수 있어요. 김정일은 국가 체계를 만들었다고 보지요. 그런데 김정은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오직 김일성의 손자,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이 경제를 못 살리면 아마 북한 사람들이 등을 다 돌릴 거에요.

지금 백두 핏줄을 강조하는데, 북한사람들도 핏줄이 밥 먹여 주진 않는다는 걸 잘 알지요. 김정은이 40일간 보이지 않았을 때, 북한 사람들은 공식모임에서는 인민의 생활지도를 너무 열심히 다녀 다리가 아프셔서 그랬다고 말하며 울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는 '젊은 놈이 배가 저렇게 뚱뚱하게 나왔는데 다리 안 아픈게 이상한 거'란 얘기가 나왔답니다. 시장에 모여서 오손오손 오가는 얘기는 후자입니다.

김정일 시대까지는 그렇게 이야기하면 신고해서 잡아가고 했는데, 이제는 그 체계가 무너졌어요. 체제에 열성인 이들이 따돌림의 대상입니다. "


이야기를 들어보면 많은 부분 중국의 개혁·개방 모델을 선호하는 것 같다.

 "중국 모델 외에는 북한에 답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말미에 이성주씨는 현재 상관인 베리 드볼린 연방하원의원과 의회에서 일할 때 도와준 연아 마틴 상원의원, 또 캐나다 정치를 볼 기회를 제공해준 한보이스와 캐나다 교민사회에 감사의 뜻을 "꼭 충분히 표시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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