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로보카 폴리 숟가락

윤의정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5-10-31 16:21

윤의정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지만, 아이도 많고 큰 개도 키우다 보니, 우리 집은 항상 물건이 넘친다. 희한하게도 분명 자주자주 비워내고 있지만, 어느새 비워둔 그 자리에 또 다른 물건이 쌓여 있고, 채워 지고의 반복이다. 아마 나도 모르게 비우지 못하고 물건들을 붙잡고 있는 성향을 가졌을 지 모르겠다. 마침 이를 깨닫게 된 경험을 얼마 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오전의 여유를 잠시 즐기는 것은 나의 삶에 작은 낙 중 하나다. 이때 혼자 앉아 여러 생각을 하며 머릿속을 정리하거나,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함을 즐기려고 하기도 한다. 문득문득 가구 배치를 바꾸고 싶다 거나, 집안의 인테리어를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하루는 주방의 서랍장을 다 정리하고 싶어 져서 서랍들을 열어 정리를 시작했다.

가장 위에 있는 서랍을 열어보니, 그곳엔 수저가 가득했다. 낡아진 나무 젓가락은 모아서 묶어 버리려고 담아두고, 낡은 포크, 숟가락 등을 분류해서 버리려고 했다. 그러다 작고 낡은 하늘색 손잡이의 어린 아이 숟가락이 눈에 띄었다. "로보카 폴리"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오래된 낡은 숟가락이었다. 5살, 7살이던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로 올 때, 당시 아이들이 사용하던 숟가락과 에디슨 젓가락 등등을 모두 가지고 왔었다. 그런데 10년간 자연스럽게 하나 둘씩 망가져서 버리고, 이사할 때 사라지고,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것들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흔적이었다. 아마도 둘째 아들이 한국에서부터 사용하던 작은 숟가락이었던 것 같다.

이 수저가 들어있는 서랍을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봤을 텐데, 왜 발견하지 못했을까? 너무 자주 봐서, 익숙해져서,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까? 이렇게나 눈에 띄는 색상과 모양을 가진 아이용 숟가락을 보지 않았다니 스스로도 신기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마음이 일었다. 숟가락을 좀 더 자세히 보니 메탈 부분과 플라스틱의 연결 부위에 작은 녹이 보였다. 숟가락 머리 아래 부분은 약간 휘어져서 제대로 쓸 수 있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또한 손잡이 색은 바래 져서 예전에 알록달록하던 로보카 폴리 캐릭터는 이제 거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글씨도 원래 알던 사람이 아니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닳아져 잘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작은 숟가락 안에 남아있었다.

처음 정리를 시작했던 것이 안 쓰는 물건을 버리고자 함이었으니, 이 작은 캐릭터 숟가락 또한 버려야만 하는데 좀처럼 쓰레기를 분류해둔 곳으로 손이 가지 않더라. 이제는 낡고, 쓸모없는 숟가락인데 이를 버리려니 마지막 하나 남아있는 내 아이의 어린 시절을, 그 기억을 버리는 것만 같아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몇 번을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 제자리에 넣어두었다. 어차피 사용하지도 않을, 사용할 사람도 없는 낡고 작은 숟가락이지만 어린 시절의 손때가 묻어 있고, 한국에서부터 캐나다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온 그 흔적을 지우기가 못내 아쉬워서 결국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 자신이 생각보다 미련이 많고, 지난 것들을 정리하지 못하는 성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다고 입으로 말은 하지만 나는 결단코 그렇게 단순하고 깔끔하게 잘 정리해내고 살아갈 수 있는 위인이 못 된다. 여전히 낡고 지난 것들을, 그것이 유행이 지나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그 용도로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닳아졌어도 추억이 담겨있고, 세월이 담겨있는 것들이라면 다시 그대로 그 자리에 둘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걸 다시 꺼내어 추억을 떠올리거나 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내 손으로 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잘 정리 정돈된 깨끗한 집에서 살아가기에 나는 너무 미련하다. 어쩔 수 없이 오늘도 다시 내 손으로 비워두려던 그 자리에 버리지 못한 물건을 또다시 채워 놓았다. 그 채워놓는 순간, 그것이 비단 찰나일지라도 어린 시절 마냥 예쁘기만 했던 아이들 과의 추억을 잠시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의미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건너간 것 2026.07.31 (금)
점심 무렵아들에게서문자 하나 도착했다엄마 김밥오늘도 내 몫은 없었어점심시간이면김밥은 이미 동난다나는오이와 비트머위대와 참비름깻잎, 적상추, 당근을흙의 시간을 접듯김 위에 올렸다계란 하나 말아 넣을 때마다바람 한 줄햇살 한 줄이슬 한 줄말려 들어갔다아들은다른 사람의 도시락을 먹고다른 사람들은내 텃밭의 계절을 먹는다말은 통하지 않아도한입 베어 문 사람들의 표정이먼저 번역된다나는 오늘도흙을 만지며내일을 만다
김회자
로히드몰 도서관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주변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은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문득 생을 마친 내 주변의 이웃들이 하나둘 삶의 문을 닫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몰 밖으로 나오니 넓은 주차장에는 몇 대의 차만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 내 차를 향해 걸어가는데, 오래전 어느 후배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후배는 삭발하고 절에서 수행하던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지금 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이종구
이봉희/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요즘은 남녀노소 누구나가 스마트 폰을 매개체로 하여 SNS 활동, 동영상 특히 짧은 동영상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으며, 오죽하면 아이가 태어나면 유튜브를 안고 태어난다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인쇄된 책을 오프라인에서 읽는 모습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일처럼 참으로 보기가 어려운 시절이 되었다.   마셜 맥루한이 “미디어가 메시지” 라고 전자 미디어를 통한 하나의 지구를 정확하게 설계한 이...
이봉희
7월 27일. 6·25 한국전쟁이 정전(停戰) 또는 휴전(休戰)한 지 벌써 73주년이 된다. 1960년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廣場)’에선 주인공인 북한 인민군 반공포로(反共捕虜) 이명준이 남한이나 북한을 택하지 않고 제3국, 중립국을 택해 인도(印度)로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닷속에 빠져 사라진다.   인도로 해항(海航) 중에 세상을 떠나는 이명준과는 달리 휴전협정 다음 해인...
김정남
세월은 쉼 없이 강물처럼 흘러간다. 그러나 내가 살아온 지난 76년의 시간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문명이 거대한 물결처럼 밀려와 세상을 바꾸어 놓은 시대였다. 때로는 그 변화가 너무 빨라 숨을 고를 틈조차 없었다. 문득 뒤돌아보면, 지난 반세기 남짓한 시간의 변화는 수천 년의 역사보다 더 놀랍고 극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동네 한가운데 놓인 라디오 한대는 마을 사람들의 귀였다. 한 집에서 뻗어 나온 전선이 집집마다 연결되어...
김유훈
내 안부를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날버스 정류장 새들이 말을 건다 나는 왜 새들은 노래하거나 슬피 울거나 두 가지만 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고목의 껍질을 헤집어 찾아낸 벌레들을 새끼들 입 안에 넣어줄 때는노래 아닌 어떤 말을 할 것 같은데 아기새들 둥지에서 떠나보낸 후엔이 숲에서 저 숲으로 떠돌며슬픔 비슷한 어떤 말을 할 것 같은데 멍에를 다 벗고 난 후제 먹이를 찾아 날아오를 힘마저  없을 때그때서야...
윤미숙
눈 감은 동공에 밝음이 느껴지고 더워진 방 안 온도에 머리카락 사이로 땀이 삐질 난다 땀이 장판에 붙어있는 뺨에 흥건하여 몸을 일으키니 쩍 하고 떨어진다   창 모양의 햇살이 네모지게 방바닥을 지나 아버지 사진이 걸려 있는 벽을 향하여 직각으로 꺾어져 올라간다 뺨에 묻은 땀을 훔치고 눈 부신 햇살 밖으로 나오니 뜻밖의 어느 여자가 눈앞에 보인다   잠에서 막 깨어 기분 좋게 만드는 건 개운함이 아니고 가끔 누나에게서 났던...
방기호
가을이 깊어질 무렵이면 나는 종종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바다와 맞닿아 있는 강들을 떠올린다. 넓은 대양을 떠돌던 장성한 연어들이 제 몸을 붉게 물들이며 고향으로 돌아오는 계절이다.   이곳 북미 서부와 캐나다 서부 해안의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태평양에는 저마다의 빛깔과 특징을 지닌 다섯 가지 종류의 연어가 있다.   가장 웅장한 몸집으로 연어의 왕이라 불리는 킹(King) 연어, 은빛 날렵한 몸매로 물 위를 힘차게 도약하는...
김호정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