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아듀, 하이힐

박오은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0-06-29 10:40

박오은 / 캐나다 한국문협 이사
  꽈당 미끄러졌다. 언젠가 밴쿠버에 눈이 많이 온 적이 있다. 커뮤니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사정없이 넘어졌다. 바닥이 살짝 얼어 매우 미끄러운 블랙 아이스 상태,
무심히 발을 내딛다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아주 심하게 찧었다. 핸드백과 책이 하늘로 솟고 내
몸은 그대로 발라당 나가떨어졌다.  클리닉에 갔다. 가정의는 골절도 아니고 근육에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털코트를 입어 천만 다행이라며 행운의 털코트이니 눈 오는 날이면 꼭
애용하란다.  또한, 가정의는 나에게 굽이 낮은 구두를 신었더라면 그렇게 심하게 넘어지진
않았을 거라며 좀 더 낮은 구두를 신을 것과 천천히 행동하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운동신경이
좋고 민첩한 편이어서 그동안 날아다녔다.
  구두 수선점에 들러 부츠, 하이힐, 샌들 할 것 없이 굽을 3-4cm 남기고 모두 잘라 달라고 했다.
구두 키를 낮추니 내 젊음도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이키
매장을 지나는데 ‘어머나, 부츠 스타일의 운동화라니 ...’  적당한 굽의 날씬한 운동화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부터 운동화와 친해지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좀 거한 가격이지만 집어
들었다. 
    키가 작아진 내 구두들이 신발장에 나란히 정렬해 있다. 그동안 나를 지탱해준 키와 자존심이
속절없이 잘려 나갔다. 낮은 굽은 키가 작아 보이고 왠지 몸이 뒤로 당겨지는 것 같아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도 늘 굽 있는 부츠를 신고 다녔다. 등산 갈 때 외에는 운동화를 신어 본 적이
없다. 결혼 후에 아기를 가졌을 때도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것을 본 시어머님이 운동화를
신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하셔서 시댁에 갈 때만 굽이 좀 낮은 구두를 신을 정도였다.
  어느 의학 드라마를 보니 주인공의 구두가 칼 힐이다. 수련의가 칼 힐을 신다니. 수련의
과정은 거의 중노동인데 그 높은 구두를 신고 어찌 견딘 단 말인가. 운동화로 버텨도 다리가 붓고
발바닥이 아프다. 의사인 내 친구가 있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신발에는 아낌없이 투자한다.
세상에서 제일 편하고 비싼 운동화를 신고 늘 뛰어다닌다. 수련의 할 때 그 친구를 보러 가면
잠시라도 신을 벗어 놓는다. 맨발로 수다를 떨다가, 병원으로 들어갈 때야 운동화를 신을 정도다.
그의 고충이 얼마나 큰지 신발을 봐도 알 수 있다. 나도 구두나 운동화를 고를 때는 늘
신경을 쓰는 편이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내 의사와 상관없이 늘 달리기 선수로 뽑혔다. 내가 좀 더 속도를 낼 수
있도록 큰언니가 특별히 만들어준, 운동화보다 가벼운 헝겊 덧버선을 신고 나는 듯이 뛰었다.
우리반 1등은 물론 계주 달리기에서도 전체 우승을 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
운동회가 있었다. 그때도 굽이 있는 부츠를 신고 있었지만 학부형 달리기에서 1등을 했다. 그렇게

잘도 뛰고 못 오를 곳이 없었던 내 발에 일이 닥친 것은 3년전이다. 서울에 갔다가 오른 발을 다쳐
몇 달을 고생했는데, 1년후 여행 중에 왼 발을 다쳐 수개월간 또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한참을 의기양양 겁도 없이 오르다가 어느 시점에서 호흡을 고르며 삶을 돌아보게 된다.
하필이면 그런 생각을 발을 다치고 나서야 하게 됐다. 그로 인해 겉치레보다는 편안함과 안전한
길을 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발장에 도열한 신발들의 서열이 무너지고 있다. 긴 드레스를 입을
때나 정장 수트를 입을 때 신는, 맵시 있는 하이힐이 저만치 밀려나 있다. 요즘 내가 집어 드는
건 가죽이 부드럽고 굽이 중간 정도이고 바닥이 편안한 고만고만한 앵클 부츠들이다.  내가
다니던 커뮤니티 센터 옆에 사스(SAS)구두 가게가 있다. 차를 그 곳 주차장에 세우기에 가끔은
주인과 얼굴을 마주친다. 그는 내 부츠를 보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인사를 나눈다. 사스 신은
굽이 1-2센티 정도이고 가죽이 부드럽고 이음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신이기에 여성이길
포기한 일명 ‘여포신발’이라고 한단다. 운동화도 ‘여포신’도 거부하고 싶은 나의 발악이
처연하기만 하다. 
사람은 살아가며 유효기간이 짧더라도 계획을 세운다. 또한 살다 보면 정점을 찍을 때가 있다.
새로운 것에 눈 뜬다는 것은 참으로 아픈 일이기도 하다. 그것이 도전하는 젊음이 아니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노경老境이라면 차원이 다르다. 이제는 촘촘한 삶보다 삼베처럼 엉성하게 그냥
설렁설렁 살아내자. 온몸으로 저항하는 나이에 맞설수는 없다. 긍정이 언제나 어려운 길이지만
스러지는 목마름이라고 탓하지는 말아야지.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봄밤 2024.04.22 (월)
언제 와 닿았을까벚꽃잎 살랑이는 듯한 손짓어리여린 초록빛 말 한마디깡깡 얼었던 맘을 동그랗게 녹여내고눈 녹아 흐르는 개울물처럼속살대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마음이 간질거린다사랑이 왔구나
이인숙
곁에서 2024.04.22 (월)
첫 인터뷰를 했다. 캐나다로 돌아와서 쓸 수 있는 글과 써야 하는 글 사이에서 고민했다.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한인 이민자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인생을 기록하고 싶었다. 평범한 이민자인 부모님의 낡은 시간을 기억하고 싶어 시작한 글쓰기의 반경을 넓히는 작업이다. 이민자는 모국에서 만큼 인정받을 기회가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이야기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알아주는 이 없는 한인 이민자의 이야기를, 휘발되기 전에 쓰고...
김한나
  머리가 허연 사내 하나가 털이 하얀 강아지 한 마리와 동네 골목을 산책 중이다.산책하고 싶어 한 게 개였는지 사내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강아지가 앞장서고 사내가 뒤를 따른다. 강아지가 길모퉁이에 멈춰 서 있다. 아랫도리를 낮추고 볼일을 보는 개를 사내가 조용히 기다려준다. 꽁초 한 개비 마음 놓고 못 버리는 인간의 거리에 천연덕스럽게 응가를? 무슨 상관이냐고, 갈 길이나 가시라고, 녀석이 흘끔 위 아래로 훑는다. 녀석이 일어선다....
최민자
시와 종교 2024.04.22 (월)
고통과 시련으로 가슴에 든 멍을 씻어주는시는 훌륭한 마음의 의사무언가 될 듯 안 될 듯할 때의 괴로움이無 자의 깊은 화두가 되어참회의 순간으로 깨달음을 구하네꽃잎이 지고 말라도 봄 날봄바람은 다시 찾아와꽃을 다시 피우고나비로 다가와 시의 향기를 풍기네때론, 울긋 불긋 가을 바람에귀뚜리 소리가 눈물 짓게 하고하얀 눈 발이 날리는 겨울에는외로움에 시를 쓴다네보고 읽고 듣는 시마다시구는 생겨났다 사라져도생의 길잡이로깨달음이...
강애나
풍경 속 평온 2024.04.15 (월)
햇빛 가리개 구름은머리에 하이얀 솜털을뒤집어 쓴 산봉우리를살포시 허공을 헤엄친다하늘의 풍경을 그대로 담은바다의 모습은 그지없이 평온하다바다와 산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지만그냥 묵묵부답으로 본연의 자태를 취할뿐아무런 댓가를바라지 않는다하늘과 산과 바다를멀리서 지켜보는저 학동은 그지없이유유자적한데저 멀리서 뜬금없이먹구름 하나가비를 몰고오네 
구대호
영원한 이민 2024.04.15 (월)
  “권장로님, 아버지께서 오늘 아침 천국으로 아민을 떠나셨기에 환송 예배를 드립니다.” 친구 딸아이의 멧시지 였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주권 가운데 나의 사랑하는 친구 문장로가 지난주 4월 1일 새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했다. 그와 나는 오랫동안 신앙의 친구요 교회의 동료로 함께 해 왔다. 그는 과묵하면서도 유머가 많아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말이 별로...
권순욱
밟아라 2024.04.15 (월)
 서울에 사는 영적 동반자가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영화 <사일런스>를 꼭 보라며 청주 상영관까지 알려줍니다. 그때부터 제 머릿속은 영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전에 그 영화의 원전인 『침묵』이라는 소설을 감명 깊게 읽고 가끔씩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더니 충북 내 영화관이 똑같이 종영하는 날, 가까스로 진천에 가서 영화를 보았습니다.실화를 바탕으로 한 엔도 슈사쿠의 소설...
반숙자
셀카 증명 시대 2024.04.15 (월)
세상은 변했어기우뚱 거리다 기울어 지다 엎어졌어마음을 나타내려 해도 이제는환적의 경유지를 밝혀야 하고무게의 중량을 홀수선에 남겨야 하는"마음 속으로" 는 사라지고"보시다시피"로 증명 해야 하는 세상마음을 찍을 수 없는 셀카에 의존하는증명사진 유행의 시대, 증명사진 요구의 시대여보시게나자네들과 나 사이에는이심전심의 토양에서우정 이라는 길을 돋우고 다지며믿음을 넓히고 오해를 메우는, 마침내무엇이든 실어 나르는 큰 길모여...
조규남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