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경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건강하고 평안한 날에는 삶과 죽음에 대해 무감각했다. 죽음이란 나와 무관한 먼 이웃의
이야기일 뿐 언젠가 나 자신과 내 가족에게 닥칠 일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느닷없이
찾아와 사랑하는 이와의 영원한 작별을 통보하는 죽음 앞에서 인생의 허무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겨울 한평생 순실한 농부로 땅을 일구며 사신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의
생전 마지막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다. 앙상하게 야윈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시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죽음과 이별이 가까이 왔음을 알았고 나는 서럽게 통곡했다. 제집으로 돌아가는
자식들을 보기 위해 힘없는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손을 흔들던 그의 모습이 아련해서 아직도
가슴이 미어진다. 쌀 한 가마를 거뜬히 들어 올려 실어 주시던 건장하고 인정 많던 시아버지의
모습만 기억하고 싶은데 캐나다에 이민 간다는 아들의 손을 놓지 못하고 흐느껴 울던 늙고 병든
그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때때로 불행과 죽음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와 우리로 삶의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게 한다. 시아버지를 떠나 보내며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고 내게도
죽음의 시간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근래 신문과 뉴스를 통해
무수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참혹한 모습을 숨죽여 바라보고 있다.
여느 때와 같이 오월의 풍경은 싱그럽다. 초록빛 생기가 부드럽게 대지를 덮고 형형색색의
꽃들을 깨운다. 그러나 인류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역사상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중국에서 시작되었던 바이러스는 불과 몇 달 사이에 세계 전
지역으로 번져 나갔고 마침내 코로나19에 대해 세계적 대유행, 즉 팬데믹이 선언되며 우리 삶의
전 영역을 뒤흔들고 있다. 경제도 교통도 사람들의 평범했던 일상도 모두 멈추어 버렸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집 안에 머문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은 현대인에게 편리한 생활을 제공해주었지만 이에
따른 세계화와 도시화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부채질하며 물질적 손실 뿐 아니라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고 있다. 미국에서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 수가 곧 10만 명을 돌파한다고
하니 뜻하지 않은 죽음을 목격하며 참담하고 두려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연일 폭증하는
코로나바이러스 사망자들은 사랑하는 이들 로부터 격리되어 마지막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한
채 홀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가족들은 죽음의 존엄성마저 누리지 못하고 떠나는 망자의 슬픈
현실 앞에 좌절한다. 재난 영화 속에서 가상적으로 구현되었던 일들이 현실이 되었다. 죽음은
먼 훗날 누군가에게 닥칠 막연한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죽음과 마주하며 오늘로써 삶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가고 있다. 어쩜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앞으로 우리의 가치관과 생활을
바꾸어 놓을 거라고 한다. 삶의 새로운 표준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4차 산업혁명을
앞당기며 세계의 산업과 경제구조, 방역과 교육 방법 등을 바꾸는 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과도한 불안과 사회적 위기감에 휩싸여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주는 삶의 의미를 반추해 보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대면하게 될 죽음 앞에서
현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생의 마지막 순간이 온 것을 알았을 때,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자신이 꿈꾸던 삶과 완전히 다르게 살아온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별로 중요하지 않던 현실의 문제에만 급급해서 주어진 날들을 진실하고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면 어떨까? 유한한 시간 속에서 언제 죽음을 맞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만하고 태만하게 살아온 지난날이 보인다. 죽음을 통해 바라보는 삶은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의 의미와 가치를 확실하게 일깨워준다. 살아서 맞이하는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조금 더 선하고 진실할 수 있기를…… 죽음의 날이 방황과 고통의 삶에서 벗어나 구원받은
축제의 날이 되기를 마음 깊이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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