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현숙 / (사)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회원
남편이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가까워진다. “아빠 돌아가셨데요” 2020년 3월 31일 새벽 1시 45분에 핸드폰 속에서 들려오던 딸의 음성은 약간 떨렸지만 조용하고 평소처럼 침착했다. 그 충격적인 소식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소리 내어 울지도 않았다. 그냥 멍했다. “왜 남편이 갑자기...?”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남편은 코로나19 환자가 아닌데도 코비 피해자임에는 틀림없다. 비씨 주(BC)에 코비 비상사태가 갑자기 선포되면서 남편이 있던 요양병원에 외부 방문객의 출입이 차단되었다. 앞이 캄캄했다. 정말 난감했다. 남편은 교통사고로 전신 마비가 된 후 15년 반 동안 가족과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내가 불가피한 일로 며칠간 한국이라도 가야 할 때는 딸이 직장에 휴가를 신청해서라도 아빠 곁을 지키며 도와드렸다. 남편은 어디가 아파도 알지 못할뿐더러 설령 아는 부분이라 해도 잘 표현하지 않는다. 간호사들이 도와준다고 하지만 세세한 부분은 가족이 챙기지 않으면 위기가 오기도 한다.
이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과 생이별시킨 건 6.25 전란만이 아니었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그 미세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운 힘으로 우리를 갈라놓았다. 나는 매일 남편의 병실 창밖에서 “커튼을 좀 열어주세요(Open the curtain, please)"라며 수없이 애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냉정했다. 며칠 후 겨우 허락을 받아 오전 11시면 유리 창문을 사이에 두고 침대에 누워있는 남편을 보게 되었다. 15~30분이 지나면 두 쪽짜리 커튼이 닫힌다. 그 얇은 커튼이 성문보다 더 육중하게 느껴진다. 닫힌 커튼 뒤에서 남편에게 안부를 전하고 기도를 하고 스마트 폰으로 복음성가를 들려준다. 유리창이 가로막혀 얼마나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남편을 만난다. 어느 날은 복음성가를 들려주며 창문에 대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남편이 가족을 못 보고 도움도 받지 못하면 많이 힘들 줄은 알았지만 이리 쉬 갈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낮 4시간 동안을 제외하고는 산소를 연결한 인공호흡기를 꽂고 페이스메이커까지 달고 있어 조금은 안심을 했다. 의료사고가 아닌가 하는 의혹도 든다. 몇 달 전에는 24시간 산소를 필요로 하는 남편에게 14시간이나 산소 튜브를 연결하지 않은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과 격리된 지 꼭 2주 만에 남편은 우리 곁을 떠났다. 코비가 사라지면 우리는 다시 만날 줄 알았다. 2주밖에 버틸 힘이 없는 그리도 약하고 불쌍한 환자이었는데 마치 불사조라도 된 듯 우리는 착각을 했던 것 같다. 미안하고 미안하다.
마지막으로 남편을 창밖에서 본 날은 여느 때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여보, 나 왔어요. 내 목소리 들리면 눈 떠보셔요.”하면 감고 있던 눈을 떠서 깜박거린다. 그러나 그 날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언제나 나와는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려놓아 정면으로는 볼 수 없고 왼쪽 눈만 보인다. 너무 답답해 서로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조그만 스피커를 사왔다. 그 날은 웬일인지 작은 방충망 창이 열려있어 창문틀 안에 스피커를 걸쳐놓고 딸과 스마트 폰을 연결하여 전화를 했다. “아빠가 눈도 안 뜨고 다른 때와는 다르다”고 딸에게 말하자 딸은 “아빠, 딸꿍이 이름 뭐예요?”라고 물었다. 곧바로 “은경이...”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딸은 아빠의 목소리를 듣자 너무도 감격해 했다. 그것이 마지막 남편의 목소리였다.
우리는 그날 뭔가 불안하여 하나님께 남편의 영혼을 지켜주시라는 기도를 딸과 번갈아 몇 번이고 드렸다. 남편을 16년 가까이 돌보다 보니 언제나 의료진들보다 가족이 먼저 문제점을 발견하곤 했다. 그날 역시 문제가 있다는 걸 감지했는데도 간호사들에게 체크해달라고 못 했던 것이 너무도 후회된다. 또 가슴이 저리도록 자책되는 건 한 번이라도 남편이 우리를 볼 수 있게 휠체어를 돌려달라고 하지 않았던 점이다. 나의 어리석음을 통탄한다.
지나고 보니 그날이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나 싶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누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할 수 없지 않은가. 온 세계가 전염병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마지막 모습조차 볼 수 없는 상황에 소수지만 모여 존엄하게 남편을 보내드릴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담임목사님의 집례로 모든 장례절차를 은혜롭게 마쳤다. 조문객은 집안에 들어올 수 없었지만 예쁘게 빈소를 꾸며 영상으로나마 남편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조문하게 했다. 그 큰 벨리뷰 예배실에 단 열 명이 드문드문 앉아 영결 예배를 드렸지만 꽉 찬 느낌이었다. 평소 남편이 존경하고 사랑했던 가까운 분들과 딸의 진심을 다한 조사로 유족과 남편의 영혼을 위로해주셔서 고맙고 힘이 되었다. 미국에 있는 아들이 참석 못 해 가슴이 아팠으나 아들의 친구 목사님이 대신 모든 절차에 동참해주어서 덜 외로웠다.
H 장로님의 조사에서처럼 남편은 천국을 늘 소망하며 “죽으면 천국 가니 좋지”하면서 5년 전 위장 천공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도 수술하지 말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남편은 지금 천국에서 걷고 뛰고 두 팔을 흔들며 주님의 품에서 행복해할 것이다.
A 권사님은 조사에서 “정 집사님은 평소의 삶처럼 너무도 겸손한 자세로 바이러스 사태를 택해 많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한 장례모임을 사양하셨다. 자신의 숨 가쁘고 고통이 따른 마라톤 코스를 마친 종주자로서 달려갈 길을 다 가시고 육신의 장막을 벗어 현재는 천국에서 천군 천사의 환영을 받고 기뻐하고 계실 것이다.”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딸은 조사에 “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15년 반은 엄마에게도 저에게도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서울에서 직장을 그만둬야 해도, 결혼을 안 하기로 결심을 해야 해도 그래서 내게 생길 아이를 포기해야 해도 저는 또다시 같은 결정을 하고 아버지와 보내는 삶을 선택할 것입니다.”라며 애도했다. 이 길이 결코 쉬운 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귀하다.
나도 목관 안에 누워있는 남편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제는 하나님께 당신을 맡겼으니 주님 손 꼭 잡고 천국에서 잘 사셔요. 이제는 아무 것도 도와줄 게 없어요”라고 울먹였지만 내 옆에 듣는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이 말을 덧붙였을 것이다. ‘여보, 나도 당신의 고백처럼 천만번 사랑했어요. 그동안 우리 먹여 살린다고 고생 많이 했어요. 고마워요.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이라고.
아주 성실하고 진실한 멋있는 남자를 평생 배필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4년 반의 요양병원 생활을 통하여 우리 가족의 사랑을 완성시켜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끝나고 보니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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