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호 / 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아침에 일어나보니 책 보따리가 또 사라졌다. 이건 분명히 할머니 짓이다. 이른 새벽이지만 어제저녁 쌓아 둔 책 보따리를 찾으러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집 안에는 어차피 더는 숨길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까. 벽장에서, 헛간에서, 사랑방에서 며칠째 찾아냈으니 오늘은 할머니가 밖에다 내버리신 게 분명했다.
“여태껏 배웠으면 됐지, 무어 그리 배울 게 많나. 학교는 인제 그만 다녀라.” 할머니가 잔소리하실 때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가족을 책임진 엄마는 딸이 별 탈 없이 학교를 잘 다니고 있는 줄 알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아침마다 학교에 가기 위해 보물찾기하듯 책 보따리를 찾아내야 한다.
“이번엔 뒤뜰 대나무밭 아래 굴속부터 찾기로 하자.” 집 모퉁이를 돌아 나섰다. 땅 위에는 죽순들이 대나무 숲길을 따라 줄을 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아래 경사면에는 칡 순들이 고사리처럼 손을 흔들고 그 아래는 하얀 무꽃들이 환하게 피어올라 뒤뜰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노란 배추꽃을 닮은 책보자기가 눈에 아른거렸다. 엄마가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수를 놓아 만든 보자기였다. 내 책들을 지켜준 귀한 책보, 6년 이상을 내 허리춤에 매달려 살아온 내 몸의 일부였다. 중학교에 가면 책보 대신 가방을 들어야 한다고 할머니한테 가방 살 돈을 맡기고 가신 엄마는 지금도 내가 책보자기를 허리에 매고 다니는 줄 모른다.
책은 다시 살 수 있다지만, 꿈을 그리는 반 고흐의 모습이 수놓아진 책보는 세상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다. 처음 4년은 남자 얼굴이 그려진 책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엄마가 만든 책보였기에 소중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무엇을 그리는지를 알게 된 5학년 때부터는 그 가치가 무한대로 커졌다.
“책 보따리 아직도 못 찾았어?” 혼자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던 언니가 부엌 뒷문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책 보따리를 찾을 때마다 마주치곤 했던 언니다. 나보다 네 살이 위인 언니는 삼촌이 책과 노트를 불살라 버린 후 내내 학교에 가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어떻게 졸업했는지도 모르는 언니 몰래 책 보따리를 찾는데, 그때마다 언니는 용케도 그러는 나를 잘 찾아냈다.
“또 너냐?” 뻐꾸기가 늙은 먹감나무 가장 높은 곳에 앉아 감나무 밑을 바라보며 짖어댔다. “뻐꾹~ 뻐뻐꾹~” “감나무 밑에 있다고?” 나는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감나무 밑은 할머니가 먹고 버린 닭 뼈를 묻는 곳이라 징그러운 지네들이 득시글득시글하는 곳이어서다.
“이번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곳에 숨겨 두었어?” “뻐뻐꾹 뻐꾹~” “맙소사. 지네가 묻어있네.” 그래도 학교에 늦지 않게 빨리 찾았다는 안도감에 달라붙어 있는 검붉은 지네를 털어낸 후 책보를 허리에 질끈 동여맸다. “학교 갔다 올게, 거기 가만히 있어.”매번 숨바꼭질하듯 학교에 다닐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뻐꾸기와 인사를 나누고 집을 나섰다.
5월21일부터 내리 3일을 뒤뜰 대숲에 머무는 뻐꾸기가 떠나갈까봐 하굣길 걸음이 급해졌다. 책보자기를 찾아 준 똑똑한 뻐꾸기가 도대체 왜 자기 새끼들은 남의 집에 의지해서 키우는지 궁금했다. 저번엔 새들의 독창 대회에서 우승해서 육아를 위한 이종 대리모와 둥지를 선물 받았다고 했었다. 뻐꾸기 노래가 어른들의 어린 시절과 파란 희망을 되찾게 만들고, 사람들이 들판을 푸르게 만들 씨앗을 뿌리게 한다나?
한 시간을 달려 집에 와 보니 뻐꾸기는 온데간데없었고 대신 그 감나무에 비비새가 하얀 먹이를 물고 날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삐비 삐비비~ “넌 독창 대회에 안 나갔니?” 삐비비 삐비~ “그런 대회에 나갈 시간이 없다고?” “그런데 넌 철새 뻐꾸기알과 네 알을 진짜로 분간하지 못하니?” 비비새는 대답 대신 감나무 밑동에 자신의 몸을 휘익ㅡ 던졌다. 순식간의 수직 낙하였다. 눈높이가 맞추어졌다. 빕삐비~ “아 바쁘다고? 알았어. 한 가지만 물어보자. 뭐가 그리 바쁘냐고?”비비리 삐삐~ “넌 고개를 쳐들고 입을 크게 벌린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바쁘다는 거구나. 아니 뻐꾸기 새끼인지 네 새끼인지 분간을 못 하냐 이거야” 삐비 삡삐비~ “입을 크게 벌리고 얼굴에 달려드는 새끼들 때문에 눈들을 마주칠 시간이 없다는 거구나.”
휘익! 제 몸뚱이보다 긴 지네를 입에 물고 비비새는 날아가 버렸다. 몸은 뻐꾸기보다 작은데 빠르기는 3배나 빠른 것 같았다. 제 알을 작은 새의 둥지에 낳는 것인지 궁금한 내가 뻐꾸기를 불렀다. 뻐꾹 뻐뻐꾹~ 호출을 마치기가 무섭게 응답이 왔다.
뻐꾹 뻐뻐꾹~ “비비새가 뻐꾸기와 섞여 살기를 좋아하니까 비비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고?” “뻐꾹, 비비새가 큰 새의 새끼들과 함께 제 새끼들을 키우면 제 새끼들도 몸이 커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뻐꾸기의 알이 비비새의 알보다 월등하게 큰데 어느 게 누구의 알인지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다. 비비새가 색깔로 알을 구분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몸의 크기에 예민한 그들의 평소 행동을 보면 말이 안 맞는 거다.
할머니는 장손이 종갓집을 지켜야 한다고 도시에 살던 우리를 불러들이셨다. 그런데 언니의 책을 불태웠고 매일 내 책보자기를 숨기신다. 뻐꾸기 새끼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둥지 경쟁을 벌인다. 몸집이 작은 비비새의 먹이까지 독차지하는 뻐꾸기로 인해 뻐꾸기 입은 더 커간다. 비비새는 뻐꾸기 새끼의 입이 자신의 머리를 삼켜버릴 정도로 자란 후에도 큰 입에 자신의 머리를 들이밀며 먹이를 물어다 준다. 파란색의 알을 낳는다는 것 빼고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는 뻐꾸기와 비비새다. 공부해서 뭐하냐는 할머니와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는 어머니가 여자라는 것 하나 빼고는 완전히 다른 이종의 인간이다.
비비새가 요즘엔 파란 알보다 흰색 알을 낳는다는 것이 궁금해진 내가 뻐꾸기에게 물었다. “네 말이 맞는다면 비비새가 왜 흰색을 낳아서 알을 구별 지으려 하는 거지?” “힘이 빠져서 그렇게 나오는 거지 일부러 그렇게 낳는 것은 아니야.” “젊은 비비새도 흰색 알을 낳던데?” “젊다고 항상 힘센 건 아니지. 뻐꾸기도 맘만 먹으면 흰색으로 낳을 수 있는데, 구별 지으려고 흰색을 낳는다는 것은 맞지 않아.”
“그럼 넌 비비새 알들이 너의 새끼로 인해 둥지 밖으로 떨어져 죽어도 괜찮다는 거야?” “아니라니까. 그들은 내가 와서 자기들 둥지에 알을 낳고 가기를 바란다고.” “그들 새끼가 먹지 못해 죽어갈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종족이 사라지더라도 둥지가 늘어만 간다면 좋아할 그들이니까.” “말이나 돼?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고 집만 커간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뻐꾸기에게 물었으나 대답으로 들려주는 노랫말을 해석할 수 없었다. 아마도 공부를 하고 싶으면 둥지를 떠나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 나는 꿈을 그려야 해. 언니는 남아도 나는 떠난다.” 집을 나왔다. 동네를 돌며 언니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찾아야 차비라도 구할 텐데.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대밭 가운데로 들어섰다. 비비새는 여전히 지네를 먹이고 있었다.
*탁란 ( 托卵): 어떤 새가 다른 새집에 알을 낳아 그 새로 하여금 알을 품고 까서 기르게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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