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란 좋은 거예요.
가장 소중한 거예요.
좋은 것은 결코 멸(滅)하지 않아요.”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에서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감옥에서 사귄 친구 레드에게 한 말이다.
이 영화는 감옥 안의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교도소라는 동일한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갖는 자와 잃어버린 자의 삶이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젊고 유능한 은행원이었던 앤디는 바람난 아내의 살인사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행이 된다. 19년 동안 영어(囹圄)의 몸으로서 오로지 탈출해야겠다는 일념(一念)으로 모든 고통을 인내하며 꾸준히 준비한다.
뇌성벽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던 밤 자기 감방 벽에 파 놓은 구멍을 통하여 탈출한다. 밧줄을 타고 하수도 위로 내려온 그는 천지를 흔드는 천둥소리와 번개가 칠 때 온 힘을 다해 돌로 하수도를 부순다. 까만 수채가 튀어나오며 악취가 코를 찌른다. 구역질이 나고 눈을 뜰 수 없지만 오물에 뒤섞인 채 반 마일이나 되는 하수도를 빠져 나온다. 감옥을 탈출하여 자유인이 되어야겠다는 희망은 그에게 초인적인 힘을 만들어 주었다.
한편 함께 있던 브룩스 영감의 상황은 달랐다. 출감하여 모든 죄수들이 부러워하는 자유인이 되었지만 곧 바로 자살하고 만다. 처음 새장에 갇힌 새는 하늘로 날기를 열망하지만 오래 갇혀 있다 보면 새장 밖을 두려워한다. 마찬가지로 죄수도 초기에는 감옥이 싫지만 세월이 지나면 타성적으로 적응해간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삶도 빼앗긴 곳이지만 차츰 그 구속에 안주하게 된다.
몹시도 자유를 동경했지만 그는 자유를 갖게 된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희망을 갖지 않았었다. 사회에 나와 적응하는 동안 버팀목이 되어줄 만한 조그만 희망이라도 있었다면 죽기까지 하겠는가.
내가 사업을 했던 곳에 피싸마 도우치(Fissama Doucia)라는 41세의 흑인 남자가 산다. 백인만 사는 동네에 5년 전 피부가 까만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어찌하여 이 산중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아마 벌목군들이나 나무 심는 사람들 속에 끼어 왔다가 남았지 싶다. 처음엔 미운 오리 새끼 마냥 영 겉돌고 마주 보기조차 거북했으나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제는 친구처럼 허물없어졌다.
그는 1991년 북아프리카의 차드Chad)에서 퀘벡 주의 몬트리얼로 이민 왔다고 한다. 차드는 리비아 근처에 있는 작은 나라로 1960년 불란서 식민지로부터 독립되었다. 친척 아저씨가 재정 보증인이 되어 혼자 오게 된 모양이다. 아내와 세 자녀를 데려오기 위해 가족 초청 이민 수속을 해 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4년 전 시민권도 취득하여 이제 당당한 캐나다인이 되었다.
그 동안 헌 컨테이너 안에서 살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장작을 준비하여 쌓아놓고 난로에 불을 피워 난방을 한다. 목욕을 제대로 할 수 없다보니 늘 지저분하여 가까이 오면 체취가 역겨울 정도였다. 돈이 되고 밥이 되는 일은 크던 작던 임금이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뛰어든다. 힘이 장사다. 키가 크고 체격이 아주 건장한 것이 그에게는 유일한 재산이다.
자기 나라에서는 불어를 모국어로 사용했기에 영어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이쪽으로 옮겨온 후 불과 5년 동안 어찌나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던지 일상에 별 불편 없이 대화가 된다. 이민자를 위한 영어교실 프로가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날은 일이 없는 한 놓치지 않고 시청한다.
가장으로서 가족이 올 때까지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모아야겠고 한마디의 영어라도 더 익혀야 하는 절실함에 잠도 잃은 채 밤낮을 일 속에 묻혀 있을 때도 있다. 노동자들이 물처럼 마셔대는 맥주도 한 두 캔밖에 마실 수가 없고 인이 박힌 담배 역시 값이 오르자 끊어버렸다. 대부분 애연가들이 올 해 까지만, 올 해 까지만 하면서 평생을 절연 못하는 그 힘든 고지를 며칠 사이 깨끗이 빠져 나왔다. 금연 후 불어나는 체중을 중국 녹차를 구해 마시며 조절한다. 욕망을 제어한다는 게 보통 결단으로 되는가. 사회 보장 제도가 잘 된 캐나다에 가족과 함께 살게 되리라는 희망 하나로 모든 걸 견디어 낸다.
노숙자나 다름없던 그가 은행 구좌를 뚫어 예금 통장과 현금 카드도 갖게 되고 핸드폰도 휴대하여 일이 있을 때 신속하게 처리한다. 얼마 전부터는 집 한 채를 세 얻어 동네 사람과 함께 지낸다. 샤워나 세탁시설이 있다 보니 눈에 띄게 외모가 깔끔해져 요즈음엔 단정해 보이기까지 하다. 최근에 알고 보니 그는 자기 나라에서 대학 공부까지 마친 사람이었다.
12년 동안 단 한 번 고국에 갔다는 그는 아직도 지치지 않고 커다란 눈을 반짝거리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희망, 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나도 이민초기 감옥에 갇힌 것과 다를 바 없는 암담한 현실에 부딪혔다.
태평양 건너 광활한 땅 캐나다에 행복한 삶과 비전을 찾아 왔던 나에게 그만 이민은 찬란한 꿈이 아니라 어둡고 괴로운 속박이었다. 내 의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남의 땅, 이민 온지 한 달 만에 밴쿠버 다운타운 한복판에 겁도 없이 인수받았던 샌드위치 가게, 그것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낯선 문화와 언어의 장벽 그리고 훈련되지 않은 노동, 이런 충격으로 웃음을 잃고 향수병에 시달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나에게는 가정이 있지 않는가, 두 그루의 꿈나무가 있지 않은가.’ 부모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아들딸이 있는 가정이라는 것은 당시 나에게 유일한 희망이었고 동시에 삶의 전부이었다. 그것이 좌절과 절망으로 빠져 들어가는 나를 구원해 주었다.
이민의 고통에서 나를 구제한 것은 투쟁이기보다는 희망이었다. 캐나다 생활 14년을 통해서 내가 터득한 하나의 교훈이다. 이민생활의 성공여부를 좌우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희망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헛된 욕망이나 부질없는 자만심, 허영 따위에 사로잡히지 않고 진정으로 믿을만한 희망 하나만을 소유한다면 그 사람은 조국을 떠나서 세계 어느 땅에 팽개쳐진다 해도 성공할 것이다.
앤디가 쇼생크 감옥을 탈출한 것도,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 온 것도, 피싸마가 온갖 굴욕을 참고 살아온 것도 , 또 내가 현재 이곳에서 보람 있게 살아가는 것도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칠흑 같은 절망의 밤이 덮친다 해도 희망의 끄나풀을 놓치지 않는 한 여명은 밝아온다.
‘희망이란 부르는 자에게는 잡초처럼 강하지만 쫓는 자에게는 이슬처럼 약하다. 그러므로 마음 안에 패배를 키우는 자에게는 희망의 뿌리는 내리지 못한다'고 한 시인은 말했다.
‘Hope is a good thing.’ 앤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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