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푸른 미니스쿨의 첫 수업 (下) (*2019-10-07에서 계속)
“시간의 가치는 나이에 따라 다릅니다. 몸은 아직 작아도 청년기의 꿈이 실린 5년은 장년기의 30년보다 긴 시간입니다. 지금은 와닿지 않겠지만 여러분이 내 나이쯤 되면 그때야 50년 전의 이 말이 폐기처분 되지 않고 제군들의 기억창고에서 스스로 걸어 나올 겁니다.”
넓디넓은 푸른 정원의 흰색 단출한 2층 건물의 미니스쿨 첫 수업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날이 저음화되고 있는 여성의 음성과 반대로 나이 들수록 저음화되다 더 나이가 들자 다시 원래의 고음을 찾아가고 있는 H 교장 선생님 음성이 서서히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하이라이트나 결말이 없었으나 누구도 질문할 필요는 없었다. 궁금증이 숙제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 ‘푸른 그린란드’의 후반은 여러분 각자가 자기만의 스토리로 완성하기 바랍니다. 제출은 자유입니다. 5년 후 졸업식 바로 전날까지 가장 늦게 제출된 작품은 졸업식 단상에서 낭독되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어른들한테는 짧았지만, 그들에게는 길었던 5년이 흐르고 흘러 졸업식 바로 전날이 되었다. 죽순들이 엄마 대나무보다 더 큰 키로 자라듯이 모든 학생의 키는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의 장대 같았고, 코캐시언 학생들의 체구는 어른들과 구별될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났다. 그러나 후배들로부터 선물과 웃음 보따리를 전달받으며 즐거움만이 가득해야 할 졸업식 전야제가 아니었다. 5년간 학생대표를 한 졸리가 가장 늦게 ‘푸른 그린란드’를 제출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졸리 바로 앞에 제출한 조나단이 낭독할 기회를 잡아야 하는지, 졸리가 낭독하고 대신 학생 대표로서의 연설 기회를 조나단이 가져가야 하는지, 아니면 두 기회 다
졸리가 갖는지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은 학생들 스스로 해결하기를 바랐다. 졸리는 학생 대표 연설문에 집중해야 한다며 거절했고 조나단은 원칙에 어긋난 낭독은 할 수 없다고 버티는 통에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모두가 1년 전 인근 학교로 전근 가신, 5년 전 숙제를 내주셨던 H 교장 선생님을 기다렸다. 물론 이 문제가 안 생겼어도 열정으로 기다리는 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H는 그들에게 스스럼없는 친구, 자상한 아버지, 그리고 존경하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다. 매 학년, 1년 학습 분량이 3개월 만에 속성으로 끝난 후 함께 한, 방학을 제외한 나머지 6개월이라는 긴 시간과 공간들 때문이었다.
해양생물 연구를 위한 밴쿠버 아일랜드의 서쪽 바다, 과학자와 공학자와 함께하는 연구 발표를 위한 UBC 교정, 스키와 스노보드를 즐기기 위한 휘슬러, 행정부 역할 수업을 위한 빅토리아 주 정부청사, 입법부 역할 수업을 위한 오타와 팔러먼트 힐 국회의사당,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 연구를 위한 Mohawk 원주민마을, 환경과 경제의 비교형량을 위한 Coastal Gaslink 파이프라인 건설 현장, 사법부 역할 수업을 위한 The Law Court 등 학교 밖의 모든 학내활동에는 H와 함께했던 그들이었다.
어쩌면 학생들이 전야제 손님으로 만나게 될 H를 기다리는 희망이 좀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도록 해결책 산출을 등한히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드디어 H 교장 선생님이 등장했고 학생들은 마치 BTS의 정국이라도 등장한 듯 환호했다. 물론 경제적 책임감으로 항상 바쁜 일부 아버지들은 H로 인해 입은 상대적 박탈감을 감추기 위해 자연스럽지 못한 쓴웃음이라도 지어야 했다. H는 오자마자 마치 상황을 예견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동안의 안부도 나누기 전에 5년 전의 숙제부터 챙기듯 손들 들어 질문했다. “자 ‘푸른 그린란드’를 완성한 사람?” 28명이 손을 들었다. 중간에 학교를 그만둔 1명과 사립 귀족학교로 전학 간 또 1명의 학생을 제외하면 100% 완성이었다. 12년에 걸친 재임 기간에 첫해 한 해를 빼고 11년 연속 100% 완성률은 당연해서 더 떠벌리지 않았다.
“넌, J와 K의 관계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했니?, 너도? 그렇다면 누가 그들의 마음을 그대로 읽어내는 기계의 역할을 했니?, 자넨, 세상에 완벽한 사회는 없다는 말을 믿는가?, 너의 푸른 그린란드에 홀수 관계가 짝수 관계보다 훨씬 역동적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나?, 자넨, 세상에 완벽한 사회는 없다는 메시지를 담았는가?, 넌, 1+2 홀수 관계가 불안정해 보이지만 또 하나의 홀수 관계를 만나면 균형 잡힌 짝수 관계로 변한다는 것을 심었는가? 홀수 관계를 균형된 관계로 바꾸는데 필요한 내부 변수는 무엇인가? 너의 생각은 내부 변수로서의 기억 창고가 선입선 출법인가 후입선 출법인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출고되어 나오지 않게 하는 방법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학생과 인사를 겸한 스킨십을 나누며 H와 학생 간의 단답형 소통이 이어졌다.
목소리가 더 고음으로 변했다는 것 외에는 여전히 앨런 릭먼보다 잘 생기고, 스네이프 교수보다 부드러우며, 밥 딜런보다 심오해 보이는 H의 느린 음성이 감수성이 5년 전보다 절대 무디어지지 않아 보이는 여학생 14명과 남학생 14명의 졸업생, 선배들을 축하해주러 온 11학년 학생들을 사로잡았다. H는 그가 기대했던 다양한 푯대들이 28명 각자의 몸에 심겨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학생들과의 1대1 소통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황금 같은 시간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제 교장 선생님도 아버지도, 친구도 아니었다. 학생들은 여전히 그를 과거와 똑같이 대하고 있었지만 H 스스로가 자신을 게스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단에 선 그는 5년 전 28명의 사진을 꺼내 현재의 실물과 비교해 보이며 짧은 연설로 마무리했다. “모두 5년 전 소년 소녀의 모습은 간데없네요. 이제, 아무도 가지 않는 길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를, 조화로운 인간으로 완성되기를, 인간의 말씨와 눈동자를 보고 진실을 발견해 내기를, 행동의 일관성에 초점을 맞춰 인간을 관찰하기를,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진실로 채워진 언어의 기술자이기를, 엎어진 사람 덮어버리지 않는 행동가이기를, 사람들의 믿음을 회복시키는 지도자로 성장하기를, 어려운 환경에서도 가슴에라도 끊임없이 푸른 나무를 심기를, 나이 들어도 여전히 호기심 가득한 청년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내일 ‘푸른 그린란드’낭독의 영광은 누가 안았습니까?” 학생들이 일제히 조나단을 가리키며 외쳤다. “조나단, 조나단!”
H 교장 선생님이 졸리와 조나단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졸리는 오직 정의만을 추구하는 법관이 되기를 원했고, 조나단은 진실만을 전하는 앵커가 되기를 원했지. 졸리의 저음과 조나단의 고음이 졸업식장을 아름다움으로 이끌게 되겠구나. 모든 것에 감사하고 모두에게 축하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 시간, 밴쿠버 웨스트의 그라우스 마운틴 쪽 밤하늘은 하얗게 빛났고, 캐나다의 균형 잡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이 미니스쿨 건물도 작지만, 안정감 있게 서 있었다. 학교를 폭넓게 감싼 늘 푸른 공원의 더글라스 전나무들 또한 어둠 속에서도 굵고, 크고, 꿋꿋한 자태를 잃지 않고 있었다. (coreits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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