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하늘을 나는 새의 꿈은 무엇일까. 흰머리수리(Bald Eagle) 한 마리 길 위 전깃줄에 앉아 꼼짝 않더니, 순간 발을 뒤로 차면서 활짝 편 날개로 높이 올라 빙글빙글 맴돌다 어디론가 사라진다. 커다란 저 날개는 새를 더 높이 더 멀리 날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새는 들판을 지나 산을 넘고 호수를 건너 바다를 만나고 어느 날엔 미지의 섬에 닿는다. 사철 때때 꽃이 피고 밤마다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청정무구한 그 섬. 새는 그곳에 꿈의 둥지를 틀고 아름다운 노래를 영원한 전설로 남긴다.
해오름달, 한 해의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아침이다.
새 해가 뜨고 멀리서 다가오는 시간을 위해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닫힌 마음의 창문을 연다. 창밖 멀리 날아가는 새들을 보며 새벽에 만난 흰머리수리를 다시 떠올려 본다. 머리와 꼬리는 흰색의 깃털로 덮여 있고 기역으로 꼬부라진 노란색 부리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맹금류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샛노란 홍채가 주는 묘한 기운에 범접할 수 없는 그를 오랫동안 신성시하며 숭배의 대상으로 여겼다. 언제부턴가 흰머리수리 한 마리가 빙빙 주변을 돌며 말을 걸어온다.
호수 둘레 길을 돌 때마다 그를 만난다. 출발지점으로 돌아올 때 즈음 지친 발걸음이 지루하다고 느낄 때쯤 기슭의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아래를 살피는 그를 발견한다. 어떨 땐 새끼들과 물놀이하던 어미 오리의 모성본능 때문에 물속 먹잇감을 포기하고 물러서는 그를 만나기도 한다. 섣부른 오해로 야단법석을 떠는 오리에게 베푸는 큰 새의 깊은 너그러움을 배운다. 흰머리수리는 절대 새끼 오리를 탐낸 것이 아니라 수면에 어른거리는 물고기를 노린 것이라 믿는다.
호수공원 잔디밭에서 맞닥뜨린 또 하나 진풍경이다. 내장이 다 드러나 생피를 흘리는 몸통이 어른 팔뚝만 한 물고기를 뜯고 있는 흰머리수리. 그 부리 앞에서 까마귀 수십 마리가 넌지시 지켜보고 있다. 한 점이라도 뜯어보겠다는 간절한 조바심을 숨긴 채 옆 눈짓을 하며 때를 기다린다. 아랑곳없이 물고기를 뜯는 듯하던 그는 어느 정도 배가 부른지 훌쩍 허공으로 오른다. 틈새를 놓칠세라. 혹여 그가 다시 자기들의 득템 먹이에 내려앉을까 경계를 하는 와중 서로 뒤엉켜 겨우 한 점 얻은 살점을 어딘가 숨겨놓고 다시 달려드는, 잔머리 지수가 높은 까마귀들의 난장이 열린다. 볼썽 없는 까마귀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일까. 흰머리수리는 날개를 넓게 펴고 난장판 위를 천천히 여러 번 돌더니 먼 하늘로 유유히 사라진다.
썰물 때다. 후미진 만의 갯벌과 자갈밭을 두리번거리며 갈매기들과 어울려 산책을 즐기는 흰머리수리를 본다. 그의 걸음걸이는 웃음이 절로 나게 한다. 덩치 큰 새가 발을 한쪽 씩 덤벅 더엄벅 떼는데 양쪽 어깨가 번갈아 기우는 모습이 사나운 날짐승이라는 생각을 잊게 한다. 작은 새들 또한 크게 개의치 않고 여유를 즐기고 있다. 그러다 먹거리를 먼저 발견한 새가 한입 맛을 보고 자리를 뜨면 지나는 다른 새가 맛을 본다. 각기 여기저기 널려 있을 먹을거리를 찾으려 할 뿐 먹거리로 싸우려 드는 새는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있는 자연이 소리 없이 보여주는 공생의 멋이다.
우연히 또 한 마리의 독수리 ‘블로도론’을 만났다. 블로도론은 북유럽의 고대 시가에 언급되는 종교적인 처형 의식이며 영어로 ‘피의 독수리(Blood Eagle)’라 일컫는 아주 잔인한 처형 법이다. 명예와 수치심을 중요한 근거로 법을 다스리던 바이킹에게는 가장 극형의 처벌이며 왕이나 귀족에게도 예외는 없다. 이 처벌이 정말로 이루어졌던 것인지 아니면 고대 문헌 속 은유적인 묘사였는지의 논쟁은 여전히 남아 있으나, 블로도론은 바이킹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로 다가온다.
TV드라마 ‘바이킹스(VIKINGS)’는 적나라한 피의 독수리를 보여준다. 카테카트 출신의 전설적인 영웅 라그나르는 배신을 조장하며 자기에게 도전한 고타랜드의 우두머리, 얄 보그를 피의 독수리로 처형해 그들의 신, 오딘의 제물로 바친다. 라그나르는 자신이 집행자가 되어 얄 보그의 양팔을 벌려 묶은 채로 무릎을 꿇어앉게 한 뒤, 날카로운 도구로 등을 가르고 척추에서 갈비뼈를 떼어내 양방향으로 벌린 다음 날개 모양을 만들고 그 칼날로 허파까지 끄집어낸다. 벗겨진 등가죽과 벌어진 갈비뼈는 한 쌍의 날개를 이루어 뼈와 허파가 늘어진 독수리의 형상, 마침내 피의 독수리가 된다.
북유럽 신화는 전한다. 피의 독수리가 침묵으로 고통을 이겨낸다면 전사자의 영혼을 받아들이는 신의 전당, 발할라(Valhalla)로 들어갈 수 있으나,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거나 소리를 낸다면 결코 그 통로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명예와 수치심을 다스리는 바이킹의 용감무쌍함을 강조한 이야기다.
얄 보그는 피를 철철 흘리며 완전히 숨이 멎을 때까지 비명 한번 지르지 않는다. 그는 강인한 바이킹 전사로 죽음을 마주한다. 결국, 죽음에 이르러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 이치를 간과했던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깨닫지만, 라그나르 앞에서 솔직히 시인하는 용기 있는 전사의 모습으로 고통과 피의 강을 조용히 건너간다. 이제 그의 영혼은 전사자들의 낙원, 신의 전당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오늘은 두 마리 새가 어깨를 맞대고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떠오르는 해는 어두운 시간의 티끌조차 흔적 없이 걷어내고,
비익裨益의 날갯짓은 우리가 꿈꾸는 참 세상 그 문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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