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오은 / 캐나다 한국문협 이사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가 머리가 뱅뱅 돌고 캄캄하더니 기억이 없다. 깨어 보니 주방에 쓰러져 있고 머리
뒤통수에 밤톨만 한 혹이 생겼다. 넘어질 때 오븐렌지 손잡이에 머리를 부딪친 모양이다.
격조 있는 예술품, 와인을 빈속에 주스 마시듯 들이켰다가 졸도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우매한
나 자신이여.
와인은 자고로 손잡이가 길고 볼록한 잔에 담아 살짝 흔들어 보고 색깔에 감동하며 한
모금씩 넘기는 세련된 술이다. 잔향의 여운을 음미하며 은은하게 즐기는 도도하면서도 교태
롭기까지한 귀족적인 술이다.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 중 와인만큼 위대한 가치를 지닌
것은 없다.’고 플라톤은 극찬하지 않았던가.
‘온다 도로’ 라는 와인이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이라는 프랑스 품종의 포도로 만드는
와인이다. 날씨에 예민하여 포도알이 익어가는 속도가 늦고 까다로워 재배가 어렵다. 이
와인을 서울의 어느 호텔에서 처음으로 맛을 보았다. 잘 숙성된 보리수 열매향이 나고
약간의 탄닌향이 있지만 깔끔한 맛이다. 미국이나 호주산처럼 풍미가 허전한 맛이 아니고
늘어진 맛도 아니다. 때로는 오묘하게 휘저으니 그 맛이 유혹이자 도발이다. ‘온다 도로’는
이태리어로 ‘황금 물결’이란 뜻이다. 뒤집어 읽으면 ‘도로 온다’로 풀이하여 부활의
상징이라는 우리말의 억지 뜻이 사랑스럽다.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값을 주어야 와인 대접을 받는다. 브랜디나 위스키는 오래 묵을수록
가치가 있지만 와인은 그렇지 않다. 와인은 숙성 기간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수확한
해를 보고 판단한다. 그래서 수확연도(VINTAGE)가 쓰여 있다. 결국 몇 백 년 된 와인이
고가인 것은 골동품적 가치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맛이 월등하여 그런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저가 와인이 고급 와인인 경우는 거의 없지만 비싸다고 해서 다 고급 와인은
아니다. 유럽처럼 와인가격이 안정적이면 비싼 와인이 고급 와인일 확률이
높다. 우리나라에서는 가격에 거품이 있어 비싸지만 고급 와인이 아닌 경우도 있다. 이곳
사람들은 흔하게 와인을 마시니 비싼 와인을 굳이 사지도 권하지도 않는다.
한국에 있을 때, 크리스마스때는 가족끼리 파티를 하곤 했다. 우리 가족은 대체로 술이
약한 편이어서 부모님은 와인 한두잔이 고작이시고 언니들도 그리 술이 센 편은 못 된다. 난
주로 치즈와 땅콩을 축내는 안주파이고, 내 바로 위의 덩치 좋은 언니는 거의 주당 수준이다.
혼자서 와인 두어 병과 맥주 너 댓 캔을 한번에 마셔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정신도
말짱하다. 나는 분위기와 예술적 탐닉에 빠질 지 언정 취할 정도로 마신 적이 없고 자주
마시지도 않는다. 그때 마신 와인 브랜드는 기억나지 않지만 가족과 함께 즐기는 기분은
최고였던 것 같다. 지금은 에드몬튼에 살고 있지만 가을이면 와이너리에서 와인을 맞추어
1년내내 즐기는 친구가 있다. 병포장이지만 라벨은 없고 대량으로 만들어 집으로 배달까지
해 준 단다. 한 병 건네기에 마셔 본 적이 있지만 와인으로 서의 깊은 맛과 산뜻한 향을 탐할
수는 없겠다.
이태리나 프랑스에선1년에 한 두번씩 와인 축제를 하는 도시들이 여럿 있다. 대를 물리며
까탈스런 품질관리와 장인 정신으로 똘똘 뭉친 오랜 전통의 와인 오너들이 자존심을 걸고
치르는 연례행사이다. 멀리 이웃나라에서 대여섯 시간씩 차를 몰고 와서 와인 쇼핑을 한다.
맛보기로 주는 와인을 받아만 마셔도 취할 정도로 인심도 후하다니 그들의 넉넉함이
와인처럼 그윽하다. 손님들은 균형 잡힌 맛과 목에 넘겼을 때의 액체의 감도 등 표현력이
좋은 와인을 찾는다고 한다. 난 그런 경지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적절한 감칠맛과 향의 깊고
은은함은 어느정도 감지할 수 있다. ‘온다 도로’는 고가의 와인은 아니지만 밴쿠버에서는
그리 대중적이지 않나 보다. 집 근처 리커 스토어에 가서 찾으니 없다. 컴퓨터로 체크해
보더니 BC주엔 없는 것 같다는 대답이다.
일상에서 말을 걸어오듯 와인 샵에 가면 그들도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익숙한 와인을
집어 들지만 불쑥 나서 당돌하게 눈짓을 하는 와인도 있다. 만지작 거리다 발목을 잡혀 이내
친구가 되고 운명처럼 엮이기도 한다. ‘온다 도로’의 유연하고도 미묘한 맛은 내 안의 또
다른 감성을 깨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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