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빛나지 않는 빛

반숙자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9-12-23 11:43

반숙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거실 벽에 액자 한 틀이 걸려 있다. 비록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은 아니지만 나는 이
작품에 어떤 예술 작품 못지않은 의미를 둔다.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들이 액자에 있는 글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글의 뜻이 매우 깊고 오묘해서 쉽게 이해하지를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액자에는 하얀 여백에 ‘眞光 不煇’ 라는 글씨가 두 줄 종으로 쓰여 있고 줄을 바꿔 ‘賀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上梓’라는 글씨가 역시 두 줄로 있다. 다음은 여백을 넉넉히 두고 대나무를
그렸고 아래는‘1986년 처서절’이라 쓰여 있다. 처음과 끝 부분에 낙관을 찍었다.
   15년 전의 이야기다. 첫 수필집을 출간하고 분에 넘치는 격려를 받았다. 특히 출판을
맡아 주신 출판사 사장님의 뜨거운 관심과 격려는 수필가로 살아가는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철없는 아이가 그렇듯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살아온 이야기를 썼다.
썼다기보다는 가슴에 차고 넘쳐서 어쩔 줄 모르다가 수필이라는 분화구를 만나 용암처럼
뿜어 올려졌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런 나에게 고졸한 그림과 글씨로 축하를 보내주신 분이 계시니 원로 이신 Y선생이시다.
그 황감한 선물을 받고 한동안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기쁨을 혼자 누렸다. 특별히
신경을 써서 표구를 해서 거실에 걸어 놓고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인 듯한 청복을 누렸다.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를 올 때는 보물 상자를 안고 오는 마음으로 무릎에 싣고 왔다.
아파트 환한 벽에 액자를 걸었다.

   어느 날이었다. 도장을 받아야 할 우편물을 가지고 온 우편 집배원이 현관에 선 채로 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거였다. 그러고는 “진, 광, 불, 휘, 차암 좋네요.”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돌아갔다.
   우체부가 돌아가고 나서 그 뜻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뜻을 풀이하면 ‘참된 빛은 찬란하지
않다.’로 되겠는데, 빛이 빛나지 않으면 생명이 없는 거나 다름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선생께서는 무슨 뜻으로 나에게 이런 글귀를 손수 써 주셨을까. 그 뒤로는 액자 앞에 서면
그냥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니고 기뻤다 부끄러웠다 뒤범벅이 되어갔다.
   겨울을 빼고는 농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피부로 느끼는 것이 있다. 봄이 되면 사과
꽃이 피어난다. 여름이면 콩 꽃이 피고 고추나 옥수수, 벼 꽃도 핀다. 그런데 이런 꽃일수록
작고 미미하고 볼품이 없는 거였다.
   뜰에는 칸나, 접시꽃, 모란꽃이 여왕인 양 피어나 마음을 사로잡는데 과일이나 곡식을
맺는 꽃들은 보잘것없고 피는 듯 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을이 오면 여름내 성숙시킨
열매들로 존재를 드러낸다. 어찌 꽃들뿐인가.
   사람들 세상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십대의 젊은이가
매스컴의 각광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을 하나 얼마 가지 않아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한평생을 바쳐 문학의 외길을 걸어 후세에 빛날
작품을 남기는 분들도 있다.
 
  그 동안 나는 액자 앞에 수백 번 섰다. 대나무의 곧음과 맑음을 보탠 기품 있는 글씨,
그리고 글귀에서 풍기는 깊고도 깊은 의미를 수없이 짚어 보았다. 특히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길 때, 내가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일 때 이 글 앞에 서면 선생의 격려의
말씀이 들리기도 한다. 어떤 날은 따가운 채찍으로 나의 허영을 나무라 주고 어떤 날은
기다림과 정진이라는 묵언을 주기도 했다.
   지난여름 괴산 화양동 골짜기에서 불꽃놀이를 보았다. 청소년 수련원에 연수를 온
젊은이들을 위한 행사인 듯했다. 개울가에서 불꽃을 쏘아 올리는 모양이었다. 하늘로 치솟는
어떤 물체가 어느 순간 공중에서 탁 타닥 하며 터지면서 무수한 불꽃을 방사했다. 캄캄한
시골의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은 처연하도록 찬란했다. 모두가 환호하며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다. 온 세상을 밝힐 듯 환해 졌다가 금세 재로 사라지는 향연, 향연
뒤의 어두움은 더욱 깊었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가며 올려다본 하늘에는 찬란한 불꽃놀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별빛이 참으로 영롱했다. 빛나되 눈부시지 않는 그런 빛, 태초부터 비춰왔을 그런 빛을 진광
眞光이라 하는가. 그럼에도 나는 한순간일 망정 불꽃처럼 타올라 소진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 나의 어리석음은 언제나 끝나려는 지.
   휘황하고 찬란할수록 섬광처럼 사라지는 이승의 불꽃놀이에 현혹되어 억만 광년을
빛나고 있는 별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찬란하지 않아도 어둠이 깊을수록
영롱해지지 않던가. 평생을 조용히 문사로 살아오신 선생의 삶 이야말로 우리에게 영원한

빛의 존재이시다. 선생께서는 내 얄팍한 근기를 미리 아시고 불꽃놀이의 허망함을 알려주신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진광불휘 眞光 不煇, 이즈음에는 또 다른 뜻으로 나를 채근한다. 30년 수필을 써왔지만
아직도 완벽한 글을 쓰지 못하는 나에게 정말 좋은 글은 번드레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다.
  이 액자는 재산 목록 1호, 나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설 추억 2024.02.26 (월)
먼동도 트기 전 미처 눈곱도 닦아내지 못한 아이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따라나선 읍내 방앗간엔 이미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떡시루에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구수한 냄새가 풍겨온다.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온 함지를 진작부터 길게 늘어선 줄 끝에 내려놓으신다. 그리고 아이에게 징긋 눈짓 한번 주시곤 잰 걸음으로 난전으로 나가신다. 아이는 당연한 듯 제집에서 가져온 함지 곁에 꼭 붙어 선다. 한동안 차례를 놓치지 않고 함지를...
바들뫼 문철봉
삶을 위한 사유 2024.02.26 (월)
 시간이 흐를수록 삶이란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는 과정이며 인간은 그 속에서 쉽게 넘어지고, 상처 받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누구나 늙고, 병들며 결국 죽음에 직면한다. 종종 불안과 절망으로 가득한 실존 적 두려움을 피해보려 하지만, 매스컴을 통해 매일 아침 인류의 고통을 새롭게 마주할 뿐이다. 언제 덮칠지 모르는 고통과 재난을 등지고 서서 어떻게 하면 이 존재의 한계와 가혹한 현실 속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권은경
햇살 좋은 날에 2024.02.26 (월)
볕이 좋아 지팡이 짚고공원에 갔네전깃줄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새들처럼공원 벤치에 얼기 설기울긋불긋 빨래 줄에 널어 놓은 빨래처럼나이든 사람들이 햇살을 즐기고 있다몸이 힘들고 고달파도마음이 행복하면무릎 통증 어지러움이야이기고도 남을 테지만푸르고 깊은 하늘을 마주하지 못하는 것은햇살이 눈부셔서 만은 아니다.봄은 개나리 나무 잎 새에서 오고겨울은 한낮에도 언 땅 사이 살얼음 사이에숨었다
전재민
신호등 약속 2024.02.21 (수)
나는 그동안 이 신호등 앞에서 몇 번이나 멈췄었을까꾸고 나서 벌써 잊은 꿈을 기억해 내려는 듯이정표 없는 갈림길에 홀로 서 있는 듯그런 표정으로 파란불만 기다리던 지난날이제는 달라지고 싶다차창에 낙하하는 수천 개의 빗방울에 고마워하자빗방울이 고마우면 세상에 고맙지 않은 게 없겠지누구라도 잡아두지만 때가 되면 보내는 신호등어디서 긁혔는지도 모르는 상처는 아프지 않아신호등처럼 보내면 떠나는 걸 알아도 아프지 않아품 안에서...
윤미숙
개똥 통장 2024.02.21 (수)
나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계좌가 하나 있다. 이 계좌 잔고의 정확한 액수는 사실 계좌주인 나도 잘 모른다. 그 액수를 도통 모르는 점이 실은 매력적인데, 그 이유는 글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되실 것이다. 수시로 적립이 되는 것만은 확실하며, 이 계좌를 개설한 지는 대략 삼년 정도가 되었다. 오늘부로 만천하에 공개하는 이 비밀 통장은 이름하여 ‘개똥 통장’이라 한다. 누구든지 손쉽게 계좌를 열 수 있다. 그동안 나만 알고(최측근 언니들 몇...
김보배아이
  우리 부부는 아들 하나를 키웠고 손주가 3명 있다. 손주로는 쌍둥이 손녀에게 3년 아래로 손자가 하나 있다. 쌍둥이 손녀는 올해 14살이 되었고 손자는 6월이 되면 11살이 된다. 손녀들은 7학년까지는 학교 공부를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르게 지내더니 8학년에 올라가니 심각해진 모습이 보인다. 손자 녀석은 여전히 학교 공부하는 눈치가 전혀 안 보인다. 주간 동안 하루는 방과 후에 아이들을 픽업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픽업하면서 손자에게...
김의원
대관령 양 떼 목장에 눈이 내린다영하 13도의 추위 속목장 언덕에 눈이 쌓이고돌풍 바람은 눈보라를 일으키며뿌연 안개를 뿌린다뺨을 때리는 눈보라로 얼굴이 얼얼하다뒤로 돌아서서 바람을 막아보지만앞으로 곤두박질 치고 만다전날 내린 비로 나뭇가지마다물방울이 얼어서 유리 구슬이 트리처럼 달리고세찬 바람에 꺾어진 가지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닌다아래를 보나 위를 보나멀리 보나 가까이 보나 하얀 눈의 세계몸이 휘청 거리게 흔들어 대는...
조순배
  늙은 개와 70 이 넘은 늙은이는 그 성질을 바꾸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그들의 사고나 생활 습관이 이미 오랫동안 굳어지면서 그걸 고치기가 매우 힘들다는 이야기 인 듯하다. 필자의 경우도 새벽 2시 경이 되어야 겨우 잠자리에 드는 나쁜 습관을 옆에서 바꾸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마이동풍이다. 마찬가지로 상대가 하는 행동이나 말이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웬만하면 그냥 접고 만다. 특히 정치 이야기나 종교 이야기가 나오면 아무 소리...
정관일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