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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다섯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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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9-10-21 11:29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친정 엄마는 아흔 셋, 열 여덟 에 시집을 와 아흔 여덟 아버지와 목하 76년째 해로 중이시다. 
지금도 삼시 끼닛거리를 장만하고 얼룩얼룩한 꽃무늬보다 베이지나 보라색 옷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는 
집 앞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오지 않는 자식들을 기다리곤 하신다. 
삼십 년 가까이 변두리 아파트에 짱 박혀 살다 보니 집과 함께 낡아 가는 사람들끼리 대강은 서로 낯이 익은 처지다.
  "할마이도 많이 늙으셨네. 모시옷 날아갈 듯 입고 나서면 동네가 다 환했었는데... "
  나무 아래를 지나던 영감이 두런두런 아는 체를 했다. 엄마도 비주룩이 웃어 주었다.
  "그래도 손은 안즉 참 곱소잉. 한번 잡아 봐도 되오?"
  세 살 터울로 일곱 남매를 키우느라 남정네 손이라곤 아버지 말고는 잡아볼 기회조차 없으셨을 엄마, 
기가 차 대꾸도 안 하려다가 마음을 바꾸어 고쳐 앉았더란다. 
  "잡아 보시오. "
  삭정이같이 거친 손이 그래도 뜨뜻미지근은 했다던가.
  "그래..., 영감은 몇 살이나 자셨소?"
  손 놓고 연식을 따지다 보니 영감님 나이가 아뿔싸, 큰아들보다 고작 몇 살 위였다나.
  구십 마나님과 칠십 영감님이 느티나무 아래서 손잡는 상상에 모처럼 모인 딸들, 배를 쥐고 웃었다.
  "근데 엄마, 무슨 맘으로 외간 영감한테 손을 허했소 그래?"
  "죽으면 썩을 육신, 이제 뭐 할 것이냐. 것도 다 목숨 붙어 있을 때 베푸는 보시 아녀? 
3동에 사는 늙은이인데 할멈이 앓다 먼저 갔다누만."
  내 보기엔 영감님이 나이 드신 누님 손을 잡아 준 것 같은데 
엄마는 한사코 연하의 남정네가 '데시'한 거라고 우기고 싶은 눈치다. 
시시비비 가려 무엇하리. 살아 있는 목숨끼리 나누어 갖는 생명의 온기가 뭉클한 것을. 
  친정에 다녀온 후 내게도 감히 생심生心이 솟았다. 삼십 년쯤 뒤, 
느티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춥고 외로운 과객을 향해 선심 한 번 오지게 쓰고 싶은 것이다. 
관세음보살처럼 그윽하게, 지하 여장군처럼 호기롭게.
  "잡아 보시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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