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어머니의 노래(1)

최원현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9-09-23 11:46

최원현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책을 펼치니 세미한 향기가 풍겨 난다. 책갈피 사이에 눌려 있던 은방울꽃에서 나는 향기다. 새삼 그날의 햇볕과 바람까지 향기로 살아나는 것 같다.  

  그랬다. 그 날은 참으로 맑고도 밝은 날이었다. 바람까지 살랑대어 기분 좋게 가을 내에 흠씬 젖게 했다. 눈앞으로는 황금 들녘이, 들녘 끝으로는 아슴하니 바다가 보였다. 어머니가 계시는 곳, 어머니 묘소의 벌초를 하던 날이 보랏빛 여운을 안은 채 책갈피 속에서 눌린 은빛 꽃으로 싱긋 웃고 있다.  

  금년은 7월 윤달이 들어 추석은 조금 늦은 것 같으나 계절의 시간은 어김없이 지켜지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하기야 해야 할 일을 못하면 빚진 마음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여름 초의 엄청난 비를 동반했던 장마로 여린 풀들은 지레 잦아들게 했지만 드센 놈들은 오히려 웃자라게 했다. 덕택에 억센 잡초만 무성해 모양새가 말이 아니었다. 지난번 다녀갔을 땐 아무 장비도 없이 들렀던 터라 어찌 해 볼 엄두도 못 낸 체 보고만 갔었는데 그게 또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어머니의 묘소다. 초라한 유택, 조금만 더 여유를 가졌어도 이런 마음까진 들지 않았을 텐데 아쉬움이 목까지 올라온다. 그 땐 왜 그리 마음만 급했었을까. 몰려드는 불안감에 당장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쫓기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3
  너무 멀어 잘 해야 1년에 한 번 그것도 휴가 때나 찾게 되던 어머니 산소, 덤불을 헤치며 길을 내는데도 어디가 어딘 지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갈 때마다 죄송스러웠다. 엄청나게 우거져버린 숲에서 수색전을 펴듯 묘소를 찾아가는 그런 홍역을 치르고 나면 더욱 그랬다. 가시 넝쿨은 어찌 그리 많은 지. 그게 다 내 탓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쯤이겠다 싶어 겨우 헤치고 들어간 곳에선 어머니 산소가 보이지 않는다. 한 쪽의 가지만 다 쳐내서 나름의 표시를 해 놓았던 소나무도 알아볼 길이 없다.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처럼 막막하고 답답한 일이 있을까. 사는 중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런 답답함을 만나던가.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게 삶이지 않은가. 옛날에는 산으로 나무도 하러 다니고 빨리 가기 위해선 산을 넘기도 했기에 없던 길도 생겨나고 있던 길은 점점 넓어지곤 했었다. 그러나 요즘엔 시골에도 집집마다 차가 있고 그만큼 도로 사정도 좋아져 좋은 길로 씽씽 차를 몰 수 있는데 누가 산을 넘겠는가. 1년 열두 달 사람 발길이 들 리 만무다 보니 숲은 제멋대로 우거지고 길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나절을 헤매다 겨우 찾은 묘소엔 사방에서 칡넝쿨이 올라와 제 세상인 양 점령하고 있었다. 몸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마음도 멀어질 수밖에 없는 법, 멀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을 줄 수도 없음이다. 어머니 산소를 이대로 두었다간 필시 잃어버릴 수밖에 없겠다는 불안이 몰려들었다. 

  거기다 산도 거칠게 인간을 거부했다. 산과 사람이 함께 살던 때엔 서로를 이해했으련만 이젠 산은 산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결국 내린 결론이 이장(移葬)을 하는 거였다. 화장(火葬)을 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마음에 내키지 않는데다 다행히 내가 사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처가 쪽에 묘지가 있다 하여 그곳으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앞 뒤 가릴 것 없이 마지막 남은 외가 쪽 어른께 급히 구원 요청을 하고 내가 거기 도착할 시간에 맞춰 일을 마쳐 주시길 부탁드렸다. 

  날이 꾸물럭 했다. 빨리 서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른 새벽에 떠났으니 조금은 여유롭게 그 쪽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너무 많이 지체가 되었다. 그래도 다급한 내 마음을 예견하시고 서둘러 주신 덕에 도착하자 마자 어머니의 유골 함을 받을 수 있었다. 경황 중에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그 길로 다시 거슬러 차를 몰았다. 

  염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 내리다 그치겠지 했는데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갈수록 앞을 분간하기조차 어렵게 몰아친다. 이장될 곳에선 내가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을 텐데 좀처럼 차의 속도가 나 주질 않는다. 거기다 운전을 하는 사촌 동생이 졸려서 도저히 운전을 못하겠다고 한다. 하기야 지난 밤 눈도 제대로 못 붙인 채 꼭두새벽부터 천리 길을 운전해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가 잠시 쉬기를 기다릴 수도 없다. 

  운전대를 바꿔 잡았다. 시간으론 낮이건만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 폭우 속을 뚫고 차를 몰았다. 비는 왜 내리는 것일까. 고향을 떠나는 것이, 이제 다시는 갈 수 없는 길이라고 슬퍼서 내리는 어머니의 눈물일까. 아니면 유골로라도 40여년 만에 아들의 품에 안긴 감격에서일까. 그래도 눈물로는 너무 많다. 

예정보다 세 시간이나 더 늦어버렸다. 억수로 쏟아지는 비속에서 포크레인도 올라오지 못한다 하여 급하게 사람 손으로 마련된 두 번째 유택, 빗물이 고이는 것을 막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면서 참으로 어렵게 묘를 썼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묘 터도 확보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손을 보리라 했던 것이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어서 그 날 이후 이렇게 굳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벌써 십 수 년이 흘러버렸다. 사실 어머니의 묘소가 멀다는 것은 내게 적당한 핑계거리를 주었다. 그 멀다는 것으로 내 게으름도 정성스럽지 못함도 합리화하곤 했다. 하기야 내 양심의 문제지 누가 그렇게 어머니 산소를 찾나 안 찾나 눈여겨 볼 사람이나 있겠는가. 그러나 산소가 가까워졌다고 해도 찾아 뵙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 추석을 앞두고도 그렇게 통 시간을 낼 수 없어 차일피일 벌초를 못하다가 오늘에야 이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간사한 동물이라 하나보다. 어디 갈 때 마음 올 때 마음 다르다 고하듯 항상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는 게 사람이니 말이다. 하지만 내게 어머니는 그래서 더욱 안타까움이 된다. 눈앞에서 어머니의 묘소는 가을 햇살바라기를 하는 아이 같다. 조금은 수줍듯 한 표정으로 장난스레 부신 빛을 피하는 그런 모습으로 묘소가 아니 어머니가 그렇게 거기 계셨다. 내가 그 앞에 서있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체하는 듯이.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개똥 통장 2024.02.21 (수)
나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계좌가 하나 있다. 이 계좌 잔고의 정확한 액수는 사실 계좌주인 나도 잘 모른다. 그 액수를 도통 모르는 점이 실은 매력적인데, 그 이유는 글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되실 것이다. 수시로 적립이 되는 것만은 확실하며, 이 계좌를 개설한 지는 대략 삼년 정도가 되었다. 오늘부로 만천하에 공개하는 이 비밀 통장은 이름하여 ‘개똥 통장’이라 한다. 누구든지 손쉽게 계좌를 열 수 있다. 그동안 나만 알고(최측근 언니들 몇...
김보배아이
  우리 부부는 아들 하나를 키웠고 손주가 3명 있다. 손주로는 쌍둥이 손녀에게 3년 아래로 손자가 하나 있다. 쌍둥이 손녀는 올해 14살이 되었고 손자는 6월이 되면 11살이 된다. 손녀들은 7학년까지는 학교 공부를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르게 지내더니 8학년에 올라가니 심각해진 모습이 보인다. 손자 녀석은 여전히 학교 공부하는 눈치가 전혀 안 보인다. 주간 동안 하루는 방과 후에 아이들을 픽업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픽업하면서 손자에게...
김의원
대관령 양 떼 목장에 눈이 내린다영하 13도의 추위 속목장 언덕에 눈이 쌓이고돌풍 바람은 눈보라를 일으키며뿌연 안개를 뿌린다뺨을 때리는 눈보라로 얼굴이 얼얼하다뒤로 돌아서서 바람을 막아보지만앞으로 곤두박질 치고 만다전날 내린 비로 나뭇가지마다물방울이 얼어서 유리 구슬이 트리처럼 달리고세찬 바람에 꺾어진 가지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닌다아래를 보나 위를 보나멀리 보나 가까이 보나 하얀 눈의 세계몸이 휘청 거리게 흔들어 대는...
조순배
  늙은 개와 70 이 넘은 늙은이는 그 성질을 바꾸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그들의 사고나 생활 습관이 이미 오랫동안 굳어지면서 그걸 고치기가 매우 힘들다는 이야기 인 듯하다. 필자의 경우도 새벽 2시 경이 되어야 겨우 잠자리에 드는 나쁜 습관을 옆에서 바꾸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마이동풍이다. 마찬가지로 상대가 하는 행동이나 말이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웬만하면 그냥 접고 만다. 특히 정치 이야기나 종교 이야기가 나오면 아무 소리...
정관일
하루를 다독인다 2024.02.12 (월)
하늘에 먹구름 한 점이 맘에 짙게 내린 어스름 같아바람이여 가져가라 했는데바람이 더디 온다고 구름은들먹들먹 울고 있다홀로 쏟는 속 울음이그리 쉬이 강이 되어 흐를 수 없어언젠가 올 바람을 기다리며두 손 모아 축축한 무릎그렁그렁 눈물로 씻는다마음에 창 하나 그려하늘가에 열어 놓고알몸으로 굴러야 했던 하루를바람결 이랑이랑 애절히 묻고가슴 비벼 문지르며썩어라, 아픔도 잘 썩으면꽃으로 피어나리버거웠던 하루를 다독인다
한부연
시인의 뜨락 2024.02.12 (월)
허퉁할 때 들여다보는 비밀의 뜨락이 있다몸집 가녀린 진달래가 머리숱 돋은 반송을 두르고실팍한 일본단풍 뒤 키만 껑충한 설악산 단풍나무 새강아지풀 같은 입술 내민 양버들까지다들 고꾸라질 듯 앞으로 몸을 내밀고 있다볕이 그리운 게다서녘볕이나마 온몸에 받고 싶은 게다고곡 방문길 노시인의 속주머니에 묻어와노수필가의 정성으로 틔운 고향 진달래병든 소설가의 퇴원길에 안겨온 희미한 분홍색 튤립제각기 다른 품, 다른 발길에...
김해영
전나무와 향나무 2024.02.12 (월)
   나무를 잘랐다. 앞마당에서 전나무와 함께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던 향나무였다.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해가 지나 서로의 몸체가 불어나면서 향나무 가지가 전나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향나무와 맞닿은 전나무 부분은 푸른색을 잃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향나무를 진즉 다듬어 주어 서로의 간격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나무에 대해 잘 몰랐던 무지함과 게으름의 결과였다....
민정희
광교산 계곡에서 출발해 소리 없이 흘러온 물이 수문 앞에 다다라 소용돌이쳤다. 태양이 서포루(화성 서측 성벽 위 2층 누각) 너머로 뚝 떨어지는 순간, 사나운 포성을 질렀다. 기울어지지 않고 평평하던 물이 일곱 홍예(화성의 북쪽 수문)를 지나 수직 낙하하며 갑자기 격정의 폭포수로 변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실개천보다 크고 일반 하천보다 작은 공간에 소망을 추구하는 사람, 우연의 재회를 꿈꾸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꿈들이 모여 방주의 천정...
박병호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