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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9-08-26 11:51

정목일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심심하니 껌이나 씹어볼까. 여행하기 전에 가끔 껌을 사기도 했다. 입에 넣으면
달콤해진다. 간편한 위안이다. 스트레스도 씹어본다. 딱딱, 쩍쩍, 그냥 심심풀이다. 사실
심심풀이란 심오한 말이다. 잡다하고 혼탁한 마음을 풀어본다는 것이니, 그런 경지가 되려면
명경지수(明鏡之水) 같은 심사가 돼야 한다. 마음의 때와 얼룩을 깨끗이 씻어내 영혼이 비춰
보여야 한다. 마음에 매화 향기가 나야 한다.
그냥 껌을 씹는다. 아무 생각 없이 입을 움직인다. 질겅질겅, 다닥딱, 오물오물, 혼자서
조용히 하는 짓 치고 이만 한 것도 찾기 어렵다 싶다.
단물만 빼먹고 싫증이 나면 언제든지 버려도 좋다. 일회성이고 소모품이다. 입 속에 있을 땐
친구처럼 달콤하고 그지없이 다정다감하건만 뱉아버리면 추물이고 쓰레기에 불과하다.
처음엔 달콤하고 산뜻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시시하고 무미해진다.
내가 초등학생일 적, 껌을 한 통 가지면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껌 하나를 입 속에 넣으면,
하루 종일 씹을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주었다. 단물을 다 빨아먹고 행복감에
젖어 입을 오물거리다가 잠잘 때는 방벽에 붙여 놓았다. 다음 날 다시 씹을 요량으로.
6․25 직후, 미군 병사가 던져주는 껌 한 통을 줍는 날은 입이 찢어질 듯 재수 좋은 날이었다.
강대국 병사들은 약소국의 어린이에게 먼저 껌 맛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배가 고파도 껌을
씹을 수 있으면 위안이 되었다.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다가, 나중엔 딱딱 소리를 내며
희희낙락했다. 슬픔과 배고픔도 잊어버렸다. 아, 고마웠던 껌!
어릴 적의 껌에 대하여 사기, 기만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천사 같은 얼굴로 다가왔고,
어머니 같은 다정함이 있어서 버릴 수가 없었다.
가을 어느 날, 나는 부산비엔날레전을 관람하러 간 일이 있다. 현대 미술은 회화, 조각, 조소
등 전통적인 장르 이외에 설치, 이벤트, 퍼포먼스 등 새로운 양식들이 선보이고 있어
기발하기도 황당하기도 하다. 고정 관념과 틀을 깨는 다양한 시도와 실험들은 신선감과 함께
충격을 주기도 한다. 어떤 경우엔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미술이라 해서 굳이 미적 추구와
탐구만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고, 추함, 괴기, 엉뚱함, 낯섦 등의 표정을 보이고 있다.
나는 이 전시회장에서 무수한 ‘껌’을 보았다. 놀랍게도 벽면 가득히 껌들이 붙어 있었다. 내가

어릴 적에 하루 종일 씹고서 아까운 나머지 살그머니 방벽이나 창호지 문에 붙여 놓은
것과는 달랐다. 길거리에 버려졌던 수많은 껌들을 수거하여 비닐봉지 속에 하나씩 넣어
벽면에 채워 놓았다.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내가 껌에 붙어버려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닐봉지에 넣어진 수백 개나 되는 껌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입이 근질거렸다. 껌 씹는
소리가 들리고, 껌을 풍선처럼 불어보고 싶어 졌다. 가만히 살펴보니, 단물나는 껌의 모양이
아니었다. 버려지고, 망가지고, 짓이겨지고 뭉개진 것들이었다. 쓰레기가 되어, 버려졌던
처참한 몰골들이었다. 시멘트 바닥에, 길바닥에 붙어 수많은 사람들의 발에 밟혔을 잊힌
것들을 수거하여 벽면 가득히 채워 놓은 것이다.
'버려졌던 껌의 수거?'
나는 얼떨떨했다. 수거된 껌들은 하나씩 하얀 비닐 봉투 속에 넣어지고 제목이 붙어져
있었다. 껌의 모습을 보면서 제목을 읽어 갔다. ‘희망’ ‘사춘기’ ‘꽃샘’ ‘추억’ ‘데이트’ ‘이 놈’
‘입맞춤’ ‘별을 보며’ ‘흠모’ ‘짝사랑’ ‘원수’ ‘후회’ ‘배신’ ‘천벌’ ‘하룻밤’ ‘여행’ ‘유행가’…….
추하게 일그러져 망각 속에 굳어져 숨을 거둔 껌들이 소리를 내며 부스스 깨어나는 듯했다.
아, 처음엔 희망, 행복으로 달콤하게 시작하지만, 나중엔 버려져 짓밟히고 망가지고 마는
것인가. 시작은 신선하고 달콤하다. 축복과 기대감 속에 눈빛이 반짝거린다. 그러나, 종내는
쓸모가 없어져 폐기되고 만다. 더러 ‘노쇠’ ‘질병’이라는 것으로, 혹은 ‘무능’ ‘불편’이라는
것으로 시간의 침식에 못 이겨 망각 속으로 떠밀려버린다.
노인들은 아예 껌을 씹지 않는다. 달콤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 벌써 치아는 여러 개
뽑혀지고 틀니는 껌과는 불화(不和) 관계이다.
껌의 수거는 지나간 것들에 대한 재발견이자, 음미가 아닌가. 시간의 뒤안길로 망각 속에
빠져버린 삶의 흔적에 대한 추억이 아닌가. 무수한 껌들의 수거를 보았다. 이미 잊힌
짝사랑의 수거를 보고, 희망의 수거를 보았다. 말라붙어버린 껌들에서 달콤한 추억들이
살아나 입맛을 당기고 있었다.
인간도 껌처럼 시간의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존재가 아닌가. 단물만 빼어 먹고 버리는
행위들이 사람들의 생존경쟁이며 지혜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누가 자신만은 껌 같은
인생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단 한 번이라도 남을 위해 달콤함을 주는 껌 같은 인생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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