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호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서진이는 아침햇살이 어렴풋이 느껴지면서 살며시 누군가 옆에 있는 것 같아 벌떡 일어났습니다.
4살배기 사촌동생 새미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서진이 일어나자 한마디 툭 내뱉았습니다.
“언니, 미워.”
서진이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혼자 남을 새미가 울까 봐 아무도 떠난다는 말을 안 했지만
어제부터 뭔가 어수선하게 돌아가는 집안 분위기에 새미도 짐작을 하는 듯했습니다.
“에이, 새미야. 언니가 왜 미워.”
“언니도 갈 거지? 나만 혼자 두고 갈 거지?”
“……”
8살 서진이와 두 살 위 서영이 언니, 그리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엄마는 두 달 전 캐나다의 큰 이모
집에 놀러와 신나는 여름을 보내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린 새미는 늘 혼자 놀다가
사촌언니들이 와서 인형 놀이도하고, 블록도 같이 쌓고, 숲 속, 분수공원등을 쏘다니며 너무너무
신나게 여름을 보냈습니다. 서진이와 서영이는 새미에게 줄넘기와 그네 타기도 가르쳐주고 인형 눈을
예쁘게 그리는 방법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계속 사는 줄 알았더니 이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미는 많이 속상했습니다. 서진이도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면 언제쯤 만날 수
있으려나 생각하니 눈물이 자꾸 나왔습니다. 그래도 서진이는 억지로 참고 웃으면서 새미 손을 잡고
놀이방으로 갔습니다.
“새미야, 언니랑 주방놀이 하자.”
“그래.”
새미는 투정 부리던 것을 어느새 다 잊어버리고 놀이방 구석에서 서진과 소꿉놀이를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혼자서 여러 역할을 하던 새미는 언니가 딸을 하고 새미가 엄마를 하는 놀이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소꿉놀이를 하면서도 서진은 점점 다가오는 이별의 순간이 자꾸만 떠올라
순간순간 울컥해졌습니다. 그때 밖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차고에서 짐을 빼어 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새미는 아무 소리 않고 장난감 음식을 한상 차리고 있었습니다. 가지,
양파, 배추, 파를 잘라 프라이팬에 볶더니 접시에 담고 빵도 잘라 과일과 함께 내놓았습니다. 숟가락
포크 옆에 물 컵도 놓았습니다.
“언니, 먹어.”
“어머, 새미야. 언니 먹으라고 만든 거야?”
“근데, 언니 가고 나면 누구랑 같이 먹지? 엄마는 언니처럼 안 놀아 준단 말이야.”
냠냠 먹는 시늉을 하던 서진이는 곰곰 생각하다 순간 친구 인준이가 떠올랐습니다. 인준이는 정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서진이의 단짝 상상 친구입니다. 오래전 서진이가 지금 새미만큼 작았던 어느 날,
언니 서영과 친구 희연이와 집안에서 숨바꼭질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서진이는 안방에 있는 옷 방
문 뒤의 쌓아 놓은 상자들 사이에 숨었는데, 숨죽여 한참을 기다리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얼마를 잤을까 서진이가 자세를 바꾸면서 옆의 상자를 건드렸고 상자가 무너지면서 잠을 깨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집안은 어둑해 졌고 방에서 나와 엄마와 언니를 찾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얼른 거실의 불을 켜고 소파에 앉았지만 사방이 너무 조용했습니다. 서진이는 TV를 켰지만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얼른 다시 꺼버렸습니다.
“엄마…. 언니…”
서진이만 두고 모두 어디로 갔는지 겁이 나서 저절로 울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동그란 얼굴에 초록색 모자를 쓰고 같은 색 조끼를 입은 귀가 뾰족한 이상하게 생긴
아이였습니다.
“왜 울려고 해?”
“엄마와 언니가 없어졌어.”
“여긴 너희 집이니까 기다리면 오겠지.”
“그래도 혼자 있으니까 무서워.”
“그럼 나가볼까?”
“안 돼. 엄마가 안보이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랬어. 그럼 엄마가 찾아온다고.”
“그래. 그렇게 하는게 맞아.”
“그런데 넌 누구야? 여긴 어떻게 들어 왔어?”
“나? 난 인준이야. 난 네가 있는 곳이라면 항상 너와 같이 있었는데 이제야 내가 보이는구나.”
그렇게 알게 된 인준이와 서진이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가 되었고 인준이 덕분에 혼자 있는
시간이 무섭지 않게 되었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집에 왔다가 서진이를 본 엄마가 놀라며
안아주고 눈물을 흘리던 순간에도 인준이는 옆에 있었고 서진이에게 속삭였습니다.
“봐, 엄마는 내가 안보이잖아. 그러니까 나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어. 알았지?”
그때부터 인준이는 서진이 옆에서 함께 살게 되었고 기쁠 때, 슬플 때, 외로울 때, 심심할 때, 화가
났을 때 가리지 않고 서진이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서진이가 인형놀이가 시들 해질 즈음
인준이도 가끔씩만 나타났고 결국 언제부터 인지 거의 잊혔습니다. 그리고 지금 인준이가 떠오르자
어느새 갑자기 나타난 인준이가 옆에 붙어서 서운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난 네가 나를 완전히 잊은 줄 알았어. 뭐, 그게 상상 친구의 운명이긴 하지만. “
“미안해. 난 이제 너랑 놀기에는 너무 컸나봐.”
그리고 서진이는 인준이가 새미에게 더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새미에게 말했습니다.
“새미야, 내 친구 인준이를 너한테 두고 갈게. 이제 나는 언니가 되서 상상 친구가 필요 없거든.
인준이는 내가 엄마한테 혼나고 속상할 때 나하고 같이 얘기하고 놀았어. 내가 인준이한테 이제부턴
새미 친구하라고 부탁할 테니까 너랑 같이 지내.”
“어디 있는데? 난 안 보이는데?”
“인준이는 초록색 모자를 쓰고 귀가 뾰족해. 그리고 얼굴은 동그랗게 생겼어. 야채를 안 좋아하고
튀긴 감자를 좋아해. “
“나랑 똑같네? 그럼 걔는 그림도 잘 그려?”
“응, 네가 좋아하는 건 뭐든지 잘해.”
“그럼 나랑 소꿉놀이도 같이 할까?”
“당연하지. 언니보다 더 잘 놀아줄 걸?”
“언제 오는데?”
“지금도 옆에 있는데 아직 네가 진심으로 원하지 않아서 안보일거야. “
서진이는 인준이를 새미에게 소개 시켜주면서 정말 이젠 제법 큰 언니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상상 친구가 이젠 필요 없을 만큼 자기가 컸다는 생각에 뿌듯했습니다. 아마도 인준이는 갑자기
캐나다에 살게 되어 좀 놀라겠지만 어차피 상상 친구니까 금방 적응할 것입니다. 그래서 새미가
외롭지 않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입니다. 차마 새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한국으로 떠나는
식구들은 잘 있으란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차에 올랐습니다. 서진이는 새미 옆에 서있는 인준이를
보았고, 이제 인준이도 영원히 이별이라는 생각에 더욱 슬펐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자신이었던 인준이를 새미 곁에 두고 가게 되어 안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새미야 안녕. 또 볼 때까지 잘 지내. 내 친구 인준아…. 새미 잘 부탁해. 그리고…그동안 너와 같이
놀아서 행복했어.”
아빠가 언니들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를 태우고 공항으로 떠나자, 엄마 곁에 가만히 서있던
새미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 앞에 어떤 아이가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서진언니가 말한 대로 초록색 모자와 조끼를 입고 귀가 뾰족하고 동그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 하더니 손을 흔들었습니다.
“네가 인준이구나?”
새미는 서진언니가 남기고 간 친구가 반가워서 얼른 옆에 가서 앉았습니다.
“많이 슬프니?”
“응 그랬는데 나랑 놀아줄 친구가 있어서 이젠 안 슬플 거 같아.”
“서진이하고도 정말 잘 놀았어. 이제 서진이는 언니가 되서 상상 친구가 필요 없거든. 어때, 너는 나랑
놀거야?”
“그래. 이제부턴 나랑 놀자. 난 아직 4살이라 언니가 되려면 한참 멀었거든. 집으로 들어가서 내
장난감으로 같이 놀자.”
새미는 어느새 이별의 슬픔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새 친구 인준이와 놀 생각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씩씩하게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침에 서진이가 예쁘게 양 갈래로 묶어준 새미의
머리카락을 부드러운 바람이 쓰다듬어 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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