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희 /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벼르고 벼르던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떠나던 6월 2일 전 날.
아이들은 늙은 엄마가 먼 길을 나서는 게 영 불안들 한 모양이었다. 출발 전 날 며느리는 여행 동안 꼭 쓰라고 지팡이를 사왔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난 아무 말 못하고 아이들에게 순종해야 했다. 순례를 앞 둔 5월 1일 아침 산책길에서 발을 헛디뎌 시멘트 바닥에 넘어져 얼굴을 긁어 잎술도 터지고 뺨도 긁혀 꼴사나운 얼굴로 순례를 간다니 얼마나 걱정이 되었을까. 내가 봐도 이건 좀 심했다 싶을 정도였으니까. 생전 써 보지 않은 지팡이를 갖고 가는 게 나로서는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그냥 두고 갔으면 좋겠지만, 늙어서는 아이들에게 순종을 잘 해야 한다니 그저 아무 말 없이 아이들 말에 따라야 한다 생각하고 지팡이들 들고 집을 나섰다.
드디어 우리 일행은 다음 날 아침 텔아비브에 도착한 후 쟈파(Jaffa)라는 곳에서 점심을 한 후 하이파(Haifa)라는 곳에 묵었다. 지금은 공원이 된 바하이 종교의 근원지였다는 바하이공원을 지나 파란 지중해 바다가 시원하게 한 눈에 들어왔다. 또 구약에서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있다가 토해 냈다는 바닷가도 그 근처라 하니 첫날부터 요나를 통하여 구약 성경 안으로 들어 간 묘한 기분이었다. 어설픈 지팡이 신세를 지며 순례 길은 계속 되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돌이 많다는 것이다. 나무는 있어봤자 종려나무, 올리브나무, 아카시아, 그리고 사이프러스 등, 나무 보다는 돌이, 아니 광야가 펼쳐진 풍경이 여간 삭막한 게 아니었다. 길들은 모두 돌로 이어져 있다. 돌이 흔한 나라니 건물도 돌이요, 길도 돌을 깔아 만들었다. 길에 깔린 돌들은 2천년 역사를 견디어 내며 묵묵히 순례자들의 발에 밟혀 그들의 역사를 침묵 안에 간직 한 듯 했다. 그 돌길을 밟으며 나는 마치 이름 없는 순례자들의 역사를 읽듯 지팡이에 의존하여 걸었다. 얼마나 많은 세월 밟혀 왔으면 돌들은 반들반들 달아서 마치 대리석처럼 매끄러워 걷는 것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물론 순례를 먼저 다녀온 선배들로부터 이미 알고 왔으나 이처럼 반들거리는 길을 걸으리라고는 상상 하지 못했다.
우리 일행은 하이파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부터 나자렛으로 들어 가 며칠을 묵었다.
나자렛 마을로 들어가면서 그리고 많은 건물과 유적지를 보면서 2천 년 전에 살았던 예수라는 분이 그의 아버지 요셉을 도와 일 했다는 묵수 일 보다는 오히려 석공 일을 하셨다는 말에 또 감동했다. 그의 손은 군살이 배여 투박하고 팔 다리 심줄이 울퉁불퉁한 육체적으로 강한 청년 이였을 것이라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그가 베드로 사도에게 바위라 이름 지어 준 이유도 알만 했다. 돌이 많으니 바위라 칭함이 당연했을 것이다. 나자렛에서 며칠 있으면서 지팡이는 나의 뒤뚱 거리는 발걸음을 잡아 주는 친구가 되어 잘 다녔다. 그런데 그 곳을 떠나 베틀레헴으로 가던 날 나는 깜빡 잊고 지팡이를 호텔에 두고 나왔다.
이 반질반질한 돌길에 지팡이 없이 걸으려면 다리가 후들거려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이드는 자기 동료에게 부탁하여 지팡이를 갖고 오게 한다고 했지만 내 지팡이는 순례 마지막 날에야 돌려받을 수 있었다. 평지는 지팡이가 없어도 별 문제가 없었으나 오르막이거나 내리막길을 걸을 때는 누군가의 부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팔이 튼튼해 보이는 순례 동료들을 골라 ‘팔 좀 빌려 주세요’ 하며 도움을 청했다. 여기 저기 다리가 시원치 않은 순례 객들이 남의 팔에 의존하며 걷는 모습이 어쩌면 우리의 일상도 그렇게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 또한 남의 팔을 빌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겨져서 스스럼없이 남의 팔을 잡고 걸었다. 베틀레헴에서의 순례는 그렇게 남의 팔에 부축을 받으며 했던 순례였다. 나의 지팡이가 되어 준 동료 순례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누구의 도움을 받고 사는 것이 부끄러운 일로 알고 살아왔던 내가 이제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 이웃의 팔을 잡고 걷는 내 꼴을 보며 나의 그 잘난 자존감 때문에 나는 때대로 피곤하게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동료 순례자의 팔을 빌리면서 나의 자존감은 내 키만큼이나 땅으로 기어들어가 나를 작음의 영성으로 끌고 내려감을 어찌하랴! 나는 작으면서도 때대로 너무나 큰 사람처럼 살아왔다. 땅으로 내려 갈 이 몸을 더 굽혀 더 작아져야 한다. 그래서 지팡이가 아니라 이웃의 팔을 빌리며 나의 작음을 깨달아 더 작은 자가 되어 하늘로 갈 때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리라. 지팡이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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