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현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아차 시간이 늦었다.
강의 시간에 맞추려면 많이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지하철도 두 번을 갈아타야 한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리도
계단이 많은 지 모르겠다. 하기야 어찌 오늘 갑자기 계단이 많아졌겠는가 만 마음이 급하다
보니 예전에 전혀
문제가 되지도 않았던 것까지 거슬리고 부담이 됨이리라. 천천히 오르면 전혀 힘들지
않았던 계단들조차 바삐
발을 옮기려다 보니 몇 개 오르자 이내 숨이 턱에 닿는다.
이 날까지 내 삶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계단 오르기였을 것이다. 내가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산다는 것은 한
계단씩 오르거나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었으리라.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읽었던 글이
생각난다. 인생에는 네
개의 계단이 있는데 관심의 계단, 이해의 계단, 존중의 계단, 헌신의 계단이라 했다. 원만한
삶을 이루려면 꼭
거쳐야 할 단계로 잘 이행하고 못하느냐에 따라 분명 결과에서도 큰 차이가 나리라.
관심이란 아주 하찮아 보이는 것까지도 소중하고 크게 보아주는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관심은 사랑을 여는
첫 번째 문의 열쇠라고 했다. 그러나 관심만으로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잖은가.
최소한 관심 다음의
단계로 올라야 하는데 그게 한 발짝 더 나아감, 곧 이해란다. 내 맘에 들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해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되고, 그 이해는 곧 상대를 향해 낮추기로 그의 마음 안에 들어가게
한다. 그렇게 되면
그를 사랑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이 솟아나 그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고, 그를
위해 살고 싶어 지기까지 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서 더
행복해지는 것 같다.
나는 발이 약하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자주 발목을 삐곤 한다.
잘 걷는데도 한 순간 힘없이 발이 젖혀져서 다치곤 한다. 얼마 전, 마니산 하산 길에서
장딴지에 쥐가 나 여러
사람을 고생시키기도 했다. 발목 뿐 아니라 다리 전체가 부실한 것 같다. 이걸로 어떻게
60여 년을 살아왔는지
기특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그런데도 운동조차 안 하니 그 배짱은 또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요즘은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는 편이라 계단이 더욱 신경 쓰인다. 올라가는 것도 힘이
들지만 내려올 때,
발이 삐끗할까 더 염려가 된다. 그런데 언젠가는 계단을 오르다 문득 참 감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세상엔 그저
높이만 올라가야 되는 줄 알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나는 아예
다리에 자신이 없다 보니
일찌감치 내 분수를 측량하고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내 삶 또한 그렇게 생각을
했기에 내 분량만큼
오르며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그런 내 삶도 내리막길이다. 높이 롤라간 게 아니니
내려가는 것은 쉬울
게다. 그런데 지난 번 만만히 보았던 마니산 하산 길이 떠오르며 이만큼의 내림 길도 두렵고
조심스럽다.
오늘도 계단을 다 올랐다 싶었는데 차를 갈아타기 위한 다른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다행히
거긴 에스컬레이터
가 설치되어 있어 힘은 덜 들었다. 그러나 속도가 한정되어 있어 바쁜 마음에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부지런히
걸어 올라갔다. 그런데 옆에 계단을 보니 계단을 마구 뛰어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떤
이는 두 계단, 세
계단을 뛰어오르기도 하고 발이 안보일 만큼 빠르게 올라가는 사람도 있었다. 저마다
성격대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겠지만 내 젊은 날도 저랬을 것 같아 쓸쓸한 웃음을 웃고 만다.
산을 오르다 보면 가파른 산을 그대로 오르는 것이 계단 길을 오르기보다 덜 힘이 든다.
계단은 내 보폭을
한정시키고, 계단에 진입을 하게 되면 그 길로만 가야 한다. 하지만 삶에서는 보이는 계단만
계단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사란 거의 모든 것이 층층 계단식이어서 그곳으로 사람들을
오르게 하여 통제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유도하는 대로 잘 오르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 뜻대로 움직이다 잘 못
오르는 사람도 있다.
힘이 부쳐 가다가 더는 못 오르고 포기하거나 되돌아 내려가는 일도 생긴다. 그래도 목표를
갖고 가는 사람은
더 힘을 내는 것 같다. 계단이란 바로 위의 것을 올라야만 그 다음을 오를 수 있는 것처럼
삶의 모든 과정도
목표가 확실하면 단계단계를 오르며 해내게 되어 있음이다.
전철을 타고 시계를 보니 잘하면 제 시간에 당도할 것도 같다.
다만 변수는 차에서 내려 또 올라가고 내려가야 하는 계단에서 얼마나 시간을 단축하느냐
일 것이다. 그래도
학생들에게 헐레벌떡 달려온 모습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최소한의 위엄과 품위를 지키며
너무 숨이 가빠지지
않게, 그러나 최대한 빨리 계단을 올라야 하리라.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계단을 오를 수 있을까?
문득 오르기야 말로 삶이고 살아 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 분명 이는 축복이요, 하늘의 은혜가 아니랴.
살아 있어야 아름답다는 것을 어찌 모를까?
계단을 오르는 발에 힘이 주어진다.
힘은 들지라도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거룩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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