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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이 걸어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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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9-05-13 15:02

반숙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산이 좋아서 산자락에 비둘기집 같은 둥지를 틀고 땅을 일구며 사는 내게 어느 날 산이
뚜벅뚜벅 걸어와서 “당신은 신선이외다.” 일러주고 갔네. 초록빛 실바람을 타고 봄이 살포시
영 너머에 내려 앉으면 가슴을 마구 설레이게 하는 쪽빛 동경이 너울거리고 파아란 오월에는
터질 듯한 그리움이 메아리되어 사는 곳. 비 개인 아침에 반가운 얼굴로 한 달음에 달려와
다정히 악수하는 산. 거긴 긴장에서 풀린 지성인들의 안식이 있고 때묻지 않아 순수한
대화가 있다.
 
 
햇빛이 놀러 오는 어느 양지엔 생과 사의 막바지에서 방황하다 잠이든 아가의 애능도
있겠고, 길 잃은 짐승의 포효가 기약도 없이 떠난 사람을 기다리는 여인의 내일도 산을
간직했다.
 
 
시한부의 생명에 댕그마니 마침표를 찍어 놓고 캄캄한 절망에 빠져 몸부림칠 때 하얀 병실의
커튼 사이로 날마다 찾아와서 그렇게 늠름하게 짙푸른 삶의 의욕을 북돋우어 주던 산의
너그러움. 거긴 미움이 살지 못한다. 하찮은 배신도 뿌리박지 못한다. 오직 무한한 사랑이
있을 뿐이다.
어떤 날 수많은 발자국에 짓밟혀 시달린 밤이면 산은 그 큰 몸뚱이를 비스듬히 누이고
속으로 앓는다. 그러다가 온종일 쏟아 놓은 세상 이야기에 절어 두 귀가 얼얼해 오면 솔바람
청해서 정갈히 씻고 긴 밤내 앉아서 묵상에 잠긴다.
 
 
산속 외딴 터에 파묻혀 사노라면 이따금 사람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져 나는 마을로
내려간다. 쇠는 쇠에 대고 갈아야 날이 서고 사람은 이웃과 비비대며 살아야 다듬어진다는
‘잠언’의 말씀처럼 이웃은 소중한 나의 일부라는 사실 앞에 얼싸안고 주고 받는 정다운 얘기,

차곡차곡 접어 놓은 색동보처럼 우리네 살림살이는 사연도 많고 시름도 많다. 떠나려면 문득
아쉬워지는 시각, 혼자 사는 신선보다 함께 사는 가난한 마을이 훨씬 따뜻하고 복된 곳임을
알게 된다. 돌아오는 길은 외롭다. 참으로 외롭다.
 
 
내 가슴엔 이웃들의 아픔이 조금씩 번져와서 공허의 구멍만 크게 뚫려 찬바람이 쏴아
지나간다. 이런 밤이면 민둥산은 감기 들어 컹컹 기침하고 춥고 배고픈 이웃 생각에 신열로
잠 못 드는 우리는 한 몸. 저절로 폈다 지는 들꽃이 좋아서, 잡초 속에 벙그러지는 산나리
노랑 빛이 좋아서, 산새가 물어오는 조선땅 한 오백 년이 좋아서 산은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고 병이 들어도 죽지 않나 보다.
 
인적 없는 섣달 그믐 밤 눈보라 속에 꽁꽁 언 외로움을 저 혼자 녹이다가 오솔길로 데그르르
굴러와 토라진 내 마음을 뜨거운 포옹으로 달래 주는 산. 천년 세월이 머물러 사는 곳. 거긴
절망을 속되게 하지 않는 굳센 의지가 있고 모든 욕망을 서서히 풀어버리는 여유가 있어
좋다. 청청한 소나무 숲, 이름 모르는 어느 병사가 뿌리고 간 평화의 씨앗이 움터 자라고
어느 계곡엔가 이끼 푸른 바위틈에 알피스의 고독한 땀방울도 고여 있으리.
 
 
산이 내 게로 와 안겨주는 기쁨도 크지만 산을 찾아가 만나는 희열은 더욱 크다. 산에 가면
산은 원하는 이에게 절대로 빈 손으로 보내지 않는다. 바구니 가득 풋풋한 산내음의 나물을
주기도 하고 목타는 이에게 달디 단 생수를 주기도 한다. 심오한 천리를 조용조용 터득 시켜
주고 회의하는 젊은이에게 생의 확신을 주어 보낸다.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질서와 깨지지 않은 평화. 그래서 산은 우리, 고달프고 메마른 현대인의 마음의 고향이며
사색의 요람이다.
 
 
힘겨운 작업에 휘어진 육신이 가을 날 풀씨처럼 뒹굴 때 산은 긴 팔을 뻗어와 자애 깊은
모성의 손길로 나를 어루만진다. 하루에도 수십번 애증의 거미줄에 얽매일 때 고만 쉬고
싶다는 안이로운 갈망이 움틀 때 멀리 바라보는 말없는 산, 냉정한 산.
 
 
시장통에서, 전자 계산대에서 반쯤 이그러져 돌아오면 산은 큰 가슴 열어 빈 지갑보다 더
가벼운 내 자존심을 가차없이 꾸중하는 옛날 은사님의 엄한 얼굴이 된다. 어쩌다 여울물에
비치는 아잇적 제 모습이 좋아서 입을 함박만 하게 벌리고 웃다가 물속에 첨벙 빠져
헤엄치는 산. 두고 온 고향이 생각나면 슬몃 돌아 앉아 향수를 달래는 산. 내 조국에
어려움이 밀어 닥치면 파리해지도록 근심하는 산. 이런 산이 좋아서 산사람이 되어 그 무릎
베고 잠이 들면 천년 울음을 달래노라 꿈결은 수선스럽다.
비오는 날 귀를 열고 대자연의 교향곡을 들어보라. 수만 악기의 질고운 하모니, 지휘봉을
힘껏 휘두르는 음악가. 거기서 피아니시모의 멀어져 가는 음향을 잡으려 거센 몸짓으로
피아노의 키를 두드리는 베에토벤의 고뇌를 통한 환희와 만난다.
 
시월이 와서 귤빛 노을이 갈대 숲에 불을 지르면 산은 화득화득 그 뜨거운 그림 붓을 내둘러
불멸의 화폭을 남겨 놓는다. 어느 화가가 있어 이보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으랴.
거기서 만나는 세잔느, 고호, 만종의 화가 밀레, 현대의 피카소 모두 두 손을 내 젓는다.
 

산은 그 자체가 예술이요, 불후의 명작이다. 머나먼 타국 아프리카의 정글에서 인술을 펴
인류의 아픔을 치료해준 슈바이처 박사의 숭고한 일생은 산이 베푸는 덕과 같고 생동하는
예술이다. 수많은 생명을 간직한 모체. 굳은 신념이 살아 있어 변하지 않는 표정.
 
산아!
넌 알고 있으리라, 산을 찾는 이들의 속 마음을. 적당한 망각과 관용을 배우고 싶어서 질긴
인연, 아픈 사랑, 괴로운 육신, 훨훨 벗고 이 산속을 떠나는 날에 나 진정 구름 같은 신선이
되리.
산.
산.
높아서 좋기도 하지만
깊고 조용해 말없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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