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천천히 그리고, 다시

강은소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9-04-15 13:09

강은소 / 캐나다 한국문협 자문위원
천천히 그리고, 다시
- 나의 수필 쓰기

강은소 / 캐나다 한국문협 자문위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에 관심이 있다면 익숙한 이름이다.
사진작가였던 그가 평생을 찾아다니며 잡으려고 했던 것은 삶의 ‘결정적 순간이다.
그러나 “삶에는 어떤 결정적 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다는 것을 그는 죽기 얼마 전에 깨달았다고 한다.
삶의 모든 순간이 가치 있다해도 그냥 보내 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평범한 대상이나 어떤 사건을 카메라 렌즈가 포착하는 순간, 새로운
의미부여나 해석을 통해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우리 삶의 결정적 순간이 마침내
탄생한다. 어쩌면 나도 그처럼 삶의 결정적 순간을 찾아 헤매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세련된 신기술 카메라 대신 붓이라는 예스러운 도구를 잡고 있을 뿐이다. 오래되어 더
소박한 내 수필의 붓.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된 그림을 완성해 본 적 없는 듯하나 여전히
붓을 놓지 못한다. 이 붓 하나로 가장 그리고 싶은 그림은 일상 속 낯선 리얼리즘이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현실이 주는 실감. 그 실감은 너무
사실적이라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더 낯설게 보이고 그저 멀리 있는 타인의 현실이라
외면하고 싶어 지는 현실이다. 현실감이 있어 더 낯선 현실은 우리를 한동안 아프게
하겠지만 결국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하고 좀 더 인간적인 우리로 다시 태어나게 하리라
믿는다. 지금도 낯선 현실과 실감을 향하여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은 글의 주제일 것이며 ‘어떻게는 글의 전개
방식이다. 글은 작가가 말 하고 싶은 주제가 분명하고 주제를 받쳐 주기 위한 소재와
글의 단조로움을 없애는 작가 자신만의 단단한 구성이 있어야 한다. 개성 있는 주제로
잘 짜인 글은 막힘없는 물처럼 흐른다. 좋은 수필이다.
나의 수필은 언제나 창조적 영감을 기다린다. 뇌리를 스치는 번쩍임이나 가슴에
뭉클한 뜨거움이 없으면 한 줄의 문장도 쓰지 못한다. 그러기에 주제를 미리 정해 글을

청탁해오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예 거절할 때가 많다. 글을 위한 창조적 영감을
떠올리는 나의 수정체는 망원 렌즈다. 일상과 살아가는 사회 전체를 멀리, 또 넓게
바라보기 위해 눈은 당연히 망원경이 되어야 한다.
나의 글쓰기는 망원 렌즈를 통한 세상 바라보기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아주
천천히, 또다시 끊임없이 바라보는 일이다. 그저 여유롭게 바라보기만 하고 기다리는
일은 지루하고 따분하지만, 어느 순간 찾아오는 글의 주제와 소재, 나아가 글의
포인트가 되는 한 줄의 문장을 마주하게 된다. 글의 제목과 첫 문장을 쓰고 나면 다시
느긋이 세상을 쳐다본다. 같은 주제나 소재를 담은 글이나 자료를 가능한 한 많이
찾아보고 보편타당한 사유를 끌어올리기 위해 새로운 시간을 가진다. 기다림이 완전히
무르익은 느낌이 오면 마지막 한 줄의 맺음말을 위해 글을 전개해 나갈 때다.
문장은 담백하고 쉽게 쓰려 한다. 낱낱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구구절절 답답한
묘사는 글이 늘어지므로 피한다. 문장의 장단을 적절히 섞어 글이 실감과 리듬으로 살아
움직이도록 노력한다. 글에서 중요한 의미는 문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 문장이 그려내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사이, 그 횡간에
숨어있어야 한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횡간의 의미를 읽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에 따라 그 의미는 무한 확대해석 될 수도 편협한 사견이 될 수도 있기에 작가는
독자를 위해 오로지 열린 결말을 추구할 뿐이다. 열린 해석을 주는 마지막 한 문장은 첫
문장이 올 때와 같다. 천천히 다시 또 기다려야 한다.
작가는 독자를 낯설게 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다른 사람이 삶에서 놓치거나 보지
못하는 한순간을 잡아내는 렌즈와 너무 익숙하여 실감하지 못하는 일상을 바라보고
결정적 순간을 그려내는 붓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나의 수필은 나만의 렌즈와 붓으로
우리의 일상을 더 낯설게 하려고 애쓴다. 오늘도 일상 속 낯선 현실을 그리려 길을
나선다.
그것은 세상과 삶을 마냥 바라보는, 천천히 그리고 다시 바라보는 일이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하루를 다독인다 2024.02.12 (월)
하늘에 먹구름 한 점이 맘에 짙게 내린 어스름 같아바람이여 가져가라 했는데바람이 더디 온다고 구름은들먹들먹 울고 있다홀로 쏟는 속 울음이그리 쉬이 강이 되어 흐를 수 없어언젠가 올 바람을 기다리며두 손 모아 축축한 무릎그렁그렁 눈물로 씻는다마음에 창 하나 그려하늘가에 열어 놓고알몸으로 굴러야 했던 하루를바람결 이랑이랑 애절히 묻고가슴 비벼 문지르며썩어라, 아픔도 잘 썩으면꽃으로 피어나리버거웠던 하루를 다독인다
한부연
시인의 뜨락 2024.02.12 (월)
허퉁할 때 들여다보는 비밀의 뜨락이 있다몸집 가녀린 진달래가 머리숱 돋은 반송을 두르고실팍한 일본단풍 뒤 키만 껑충한 설악산 단풍나무 새강아지풀 같은 입술 내민 양버들까지다들 고꾸라질 듯 앞으로 몸을 내밀고 있다볕이 그리운 게다서녘볕이나마 온몸에 받고 싶은 게다고곡 방문길 노시인의 속주머니에 묻어와노수필가의 정성으로 틔운 고향 진달래병든 소설가의 퇴원길에 안겨온 희미한 분홍색 튤립제각기 다른 품, 다른 발길에...
김해영
전나무와 향나무 2024.02.12 (월)
   나무를 잘랐다. 앞마당에서 전나무와 함께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던 향나무였다.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해가 지나 서로의 몸체가 불어나면서 향나무 가지가 전나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향나무와 맞닿은 전나무 부분은 푸른색을 잃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향나무를 진즉 다듬어 주어 서로의 간격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나무에 대해 잘 몰랐던 무지함과 게으름의 결과였다....
민정희
광교산 계곡에서 출발해 소리 없이 흘러온 물이 수문 앞에 다다라 소용돌이쳤다. 태양이 서포루(화성 서측 성벽 위 2층 누각) 너머로 뚝 떨어지는 순간, 사나운 포성을 질렀다. 기울어지지 않고 평평하던 물이 일곱 홍예(화성의 북쪽 수문)를 지나 수직 낙하하며 갑자기 격정의 폭포수로 변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실개천보다 크고 일반 하천보다 작은 공간에 소망을 추구하는 사람, 우연의 재회를 꿈꾸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꿈들이 모여 방주의 천정...
박병호
   어린 시절 나는 눈을 참 좋아했다. 눈이 오는 날이면 동생과 뛰쳐나가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코끝과 손끝이 발개져서 집에 들어오면 갑작스레 따뜻해진 공기에 손발이 가려워 피가 맺힐 때까지 긁어 대곤 했다. 그래도 동네 친구들과 함께 눈을 굴려 가며 누가 더 큰 눈사람을 만들지를 겨루는 시간은 더없이 즐겁기만 했던 기억이다.  그 시절 눈이 오면 부모님이 “눈이 오네. 길 얼지...
윤의정
그림자 3 2024.02.05 (월)
한여름 고산의빙하를 감상하고내려오다 길을 잃었다초저녁부터브랜디와 와인을 걸친 산의 양 어깨는더욱 무거워 보였다어둠 속에서 혼자 싸우다 먹칠하다무사히 내려왔다​라면 끓여 허기 채우고산짐승 공포와 습기를 머금었던이슬 친 옷가지며 어두웠던 마음조차따사로운 모닥불에 털어 말렸다빠닥빠닥 말리고 훌훌 날려버렸다진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선애써 잠을 청했다산 그림자 서늘하다 못해오싹한 밤이었다​날카롭게 흘기던외 눈 달빛...
하태린
봄이 오는 밤 2024.01.29 (월)
조용한 호흡이크게 느껴지는안식의 긴장이무의식의 시간을날 선 칼같이 새롭게 한다대지의 핏줄은이미 봄을 바로 집터 밑까지밀어 오고밤은 내일 터질 성벽을벼르듯 턱 밑까지숨이 차다가느다란 비가적막의 커튼을 드리우고어둠의 너머에새봄의 생기가아가의 숨골 위에새록 인다긴 여정 끝지난 모든 과실은겨울 추위와 얼은 땅거죽아래에서 모두 해체되어 다시준비되었다땅 밑의 수로는물길을 뚫어바로 봄의 축제를 대비했다모든 생명은 이제이해...
김석봉
밴쿠버에서 남들은 거의 다 가보았다는 멕시코 캔쿤 여행은 갑작스럽게 결정이 났다. 막내 딸과 아내 세 식구가 비행기를 탄 것은 작년 12월 11일이었다. 근래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향할 때는 에어 캐나다 직원 가족으로 자리가 있어야 탈 수 있기 때문에 빈자리가 있으려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할인 가격으로 사기는 했지만 어쨌든 공짜는 아니다. 공짜가 아니면 당당해진다. 비행기는 이륙 후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콜로라도...
한힘 심현섭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