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봄의 촉감

정목일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9-04-04 17:16

정목일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1) 수양버들
누가 가야금을 뜯고 있다.
맑은 진양조(調) 가락이 흐른다. 섬섬옥수가 그리움의 농현(弄絃)으로 떨고 있나 보다.
숨죽인 고요 속에 번져 나간 가락은 가지마다 움이 터서 파릇파릇 피어나고 있다.
누군가 촛불을 켜고 있다.
마음 한 가운데 촛불은 바람도 없이 파르르 떨고 있다. 뼈와 살을 태워서 한 줄기 빛이길
바라고 있다.
깊은 밤중에 한 땀 씩 수(繡)를 놓고 있다. 바늘귀로 임의 얼굴을 보며, 오색실로 사랑을
물들이면 별이 기울고 바람이 지나간다. 방문 앞 물에 젖은 주렴을 늘여 뜨려 놓았다. 금세
초록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듯하다. 축축 늘어뜨린 실가지가 오선지 인양, 그 위에 방울방울
찍어 놓은 음표(音標)에선 봄의 교향악이 흐른다. 목마른 지각을 뚫고 솟아오른 분수이다.
오랜 침묵에서 말들이 터져 나와 뿜어 오른다. 죽음을 뚫고 소생한 빛의 승천이다.
닿기만 하면 굳게 닫혔던 마음이 스르르 열리고 막혔던 말들이 샘물처럼 넘칠 것 같다.
다가가 손잡고 싶다. 먼 데서 온 설레는 편지다. 누가 보낸 것일까.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깨알같은 글씨의 편지……. 막 목욕하고 난 열 여섯 살 소녀가 웃고 있는 듯하다. 길게
늘어뜨린 머릿결에 윤기가 흐르고 사랑의 촉감이 느껴진다. 실비단보다 부드럽게 치렁치렁
휘날리는 머릿결에선 연록의 향기가 풍긴다. 물가에 닿을 듯 내려와 유유히 헤엄치는 오리를
보고 있다. 바람은 물 주름을 일으키고 개울 둑에선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어 오른다.
한가로워 졸음이 오는 초록빛 평화…….
창밖에 수양버들을 심어 두고 싶다. 봄이면 톡톡 노크하며 얼굴을 내밀 때, 봄의 창을 활짝
열어 입 맞추고 싶다. 아, 무엇인지 모를 은밀하고도 숨 막히는 속삭임, 생명의 뜨거운 숨결,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가슴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2) 푸른 손
3월엔 봄비가 되고 싶어.
얼어붙었던 나뭇가지에 내려서 말하고 싶어. 손잡고 싶어. 눈 맞춤 하고 싶어. 귀엣말로
부드럽게 속살거리며 …….

누구에게 라도 훅훅 입김을 불어넣으며 말하고 싶은 걸. 온 몸으로 뼈 속에 스민 한기를 녹여
줄게. 살갗이 시려 오는 추위와 외로움을 벗겨 줄게. 빗방울 하나 씩으로 가지에 꽃눈이 되고
잎눈이 되고 싶어. 그리운 말로, 설레는 말로 네 굳은 가지와 마음속으로 수액이 되어 흐르고
싶어.
사납게 울부짖던 바람에도 꿈쩍도 않던 나무에게 생명의 음표들을 달아 주고 싶어. 딱딱하고
차가운 마음을 풀어주고 목과 겨드랑이에 스며들어 간지럼을 태울 거야. 툭툭 깨어나 잎눈이
되는 생명의 말, 새롭게 피어나는 말, 감동으로 젖어 버리는 말……. 생명의 향유를 가져와
언 몸에 뿌리고 쓰다듬어 주고 싶어. 방울방울 가지에 맺혀 꽃눈이 되고 잎눈이 되어 산과
들판을 초록으로 물들이고 싶어. 봄비가 내린 후의 산 빛을 보렴. 얼굴을 씻고 난 숲을…. 갓
태어난 부드러운 빛깔들이 꿈틀거리며 펼치는 초록 향연. 막 몸을 푼 산모의 표정 속에 깃든
평화로움……. 산과 들에는 어머니의 젖내가 풍겨. 잠을 깬 흙들이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하고 있어. 바람은 아기의 머리 결처럼 부드럽게 닿아 와. 봄비가 내린 후면 눈맞춤 할 게
많지. 물기 머금은 거무죽죽한 땅의 틈새로 불쑥불쑥 솟아난 새싹들……. 아기의 잇몸을
뚫고 돋아난 새하얀 치아 같아. 구멍에서 나와 행렬을 지어 햇빛 속으로 기어가는
개미떼들을……. 아직도 겨울잠이 덜 깬 듯, 눈부신 햇빛에 취한 듯한 모습. 어린 풀숲에
벗어 놓은 뱀의 허물, 논 속으로 뒷다리가 생길락 말락한 올챙이들을 보렴. 나뭇가지를 물어
와 둥우리를 새로 고치는 까치부부, 나뭇가지에 가느다란 줄을 매달고 대롱거리며 꿈꾸는
곤충의 번데기들을 ……. 마른 잎을 돌돌 말아 알을 숨겨 놓은 걸 보렴. 모래알 같은
알들에서 들려오는 노래……. 날개가 푸드득거리고 있어. 말을 건네고 싶어 못 견디겠어.
세상이 새로움으로 눈뜨고 있어. 얼굴엔 맑은 미소가 피어 올라. 몇 만 년이고 봄이면 해마다
되풀이하는 대지가 깨어나는 숨소리. 여태까지 대수롭지 않게 무심히 보아 넘기고 말았어.
3월엔 봄비가 되고 싶어. 방울방울 움들이 피어나게… . 그 움들이 초록세상이 되게, 마른
가슴을 적셔 꽃눈과 잎눈이 되고 싶어. 한 번이라도 봄비가 되었으면 해. 따스한 입김,
부드러운 손길이 되어, 네 언 손과 굳은 몸을 녹여 주고 싶어. 어떻게 고통의 신음을 지워
주는 기도가 될까. 설움을 풀어주는 노래가 될까.
나는 남에게 슬픔을 주는 비였을 뿐이야. 몸을 떨게 한 찬 빗방울이었을 뿐이야. 이젠
봄비였으면 해. 훈훈한 봄비가 되어 외로운 이웃에게 푸른 손을 내밀고 싶어. 초록으로
떠오르고 싶어.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낙타 세 마리 2024.03.08 (금)
박정은 / 사)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복권이 윷놀이 상품으로 걸렸다. 구정을 맞아 주유소에서 일하는 한국인 직원들과 모여 윷놀이를 하는데, 남편이 복권을 상품으로 건 거였다. 주유소에서 복권을 팔기만 했지, 난 한 번도 복권을 사본 적이 없었다. 딱히 복권에 욕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기왕에 하는 윷놀이 열심히 해보지 싶었다. 열성껏 윷을 던진 결과 결국 몇 장의 복권이 손에 들어왔고, 난 그걸...
박정은
그리움 2024.03.08 (금)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전지를 갈아 끼워도 가지 않는 손목시계처럼 그는 그렇게 그녀라는 길 위에 멈추어 있다.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이 그에게는 여전히 아프고 쓰리다. 이별의 모서리는 언제나 날카로워 돌아볼 때마다 마음이 베이지만 그녀라는 모퉁이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는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진한 눈썹, 둥근 이마, 상큼하면서도 허스키한 탄산수 음색이 생각나 아직도 심장이 쿵, 떨어져 내린다 하였다....
최민자
밤의 날개 2024.03.08 (금)
이영춘 / 캐나다 한국문협 수석고문고요가 조용히 날개를 펼칩니다팔랑이는 이파리처럼, 이파리의 날개처럼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산비둘기들이 마을로 내려옵니다내려와 잠드는 내 집 처마 끝에달빛을 비춰줍니다고요의 숨소리가 들립니다달빛도 긴 그림자의 그늘을 접고나뭇가지에 어깨를 걸치고 앉아고요가 잠든 집을 지켜줍니다 고요가 조용히 일어나 잠들려는 나를살짝 깨웁니다눈뜬 별들의 바다가 깊습니다나도 살짝...
이영춘
송년엽서 2024.03.04 (월)
1년의 폭은 365미터비껴 간 10년, 또 10년 우리 까마득히 멀어져보이지도 들리지도 눈을 감아요깊숙이 자목련 한 그루씩 심어요 먼 날자색 빛 노을 물드는 저녁 바다 이편에서바다 저편에서 목련 꽃비만후두둑 후두둑
백철현
2024년으로 끝자리 숫자 하나가 바뀌며 엄청나게 쏟아지던 카톡의 홍수가 사라질 무렵에 나는 재미있는 톡 하나를 받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새해 덕담으로 주고받는 톡이 아닌 새롭게 단장한 문인협회 산문 분과의 새 방장님이 쏘아 올린 첫 신호탄으로 그것은 푸른 용의 꿈틀거림처럼 잔잔하던 방안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린 왕자’의 여우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한다는 신세대 방장님의 기발한 인사말과 함께 산문 방 한정 초미니 백일장을...
줄리아 헤븐 김
김밥 한 줄 2024.03.04 (월)
김밥 한 줄은 말줄임표(……)간단명료하다. 설명이나 사족을 붙이지 않는다. 말의 울림이다. 침묵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 함부로 말할 수 없어 가슴 속에서만 숨 띄는 함축언어이다.김밥 한 줄은 가장 간소한 한 끼이다. 30초 만에 차려진다. 김 한 장을 펴고 밥을 담은 다음 준비해둔 당근, 부친계란, 볶은 햄, 우엉, 시금치. 단무지를 넣고 말아 올리면 된다. 은박지를 깐 접시 위에 놓인 검은 김밥 한 줄….김밥 토막들은 대열을 벗어나지 않고...
정목일
새해 소원 2024.03.04 (월)
인생은 세월 따라 흐른다천천히 지나도 지나고 보니그 세월은 순간이었다인생은 머물지 않지만지나간 시간과 함께한소중했던 순간힘 겨워했던 시간모두 추억의 공간에 곱게 새겨져내 인생의 그림자가 되었다 많이 아쉽기도 했던 기억들함께 했던 즐거움의 흔적들같이 했던 시간 속의 기쁨들때론 야속하기도 한 아픔의 그 세월여러분을 만나서 여러분과 함께해서참 멋지고 행복한 좋은 시간이었다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2024년 또 다른 나의...
나영표
습작의 고뇌 2024.02.26 (월)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다진통 끝에 나의 자궁에서 나온 글이 걸음마를 배운다안아달라고 칭얼댄다나에게 말을 걸어온다그 글에 옷을 입혀 세상 밖으로 보내본다지나가는 이들이 내 글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잘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고 뒷얘기로 쑥덕거린다한 대 때리고 도망간다내 글이 운다내 마음이 차였다자랑스럽게 내보낸 나의 글은 그 흔한 목걸이 하나 없이누군가 길거리에 내던져 버린 옷을 걸쳐 입고 있었다그 글은 시체처럼 길거리...
김영선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