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목일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1) 수양버들
누가 가야금을 뜯고 있다.
맑은 진양조(調) 가락이 흐른다. 섬섬옥수가 그리움의 농현(弄絃)으로 떨고 있나 보다.
숨죽인 고요 속에 번져 나간 가락은 가지마다 움이 터서 파릇파릇 피어나고 있다.
누군가 촛불을 켜고 있다.
마음 한 가운데 촛불은 바람도 없이 파르르 떨고 있다. 뼈와 살을 태워서 한 줄기 빛이길
바라고 있다.
깊은 밤중에 한 땀 씩 수(繡)를 놓고 있다. 바늘귀로 임의 얼굴을 보며, 오색실로 사랑을
물들이면 별이 기울고 바람이 지나간다. 방문 앞 물에 젖은 주렴을 늘여 뜨려 놓았다. 금세
초록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듯하다. 축축 늘어뜨린 실가지가 오선지 인양, 그 위에 방울방울
찍어 놓은 음표(音標)에선 봄의 교향악이 흐른다. 목마른 지각을 뚫고 솟아오른 분수이다.
오랜 침묵에서 말들이 터져 나와 뿜어 오른다. 죽음을 뚫고 소생한 빛의 승천이다.
닿기만 하면 굳게 닫혔던 마음이 스르르 열리고 막혔던 말들이 샘물처럼 넘칠 것 같다.
다가가 손잡고 싶다. 먼 데서 온 설레는 편지다. 누가 보낸 것일까.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깨알같은 글씨의 편지……. 막 목욕하고 난 열 여섯 살 소녀가 웃고 있는 듯하다. 길게
늘어뜨린 머릿결에 윤기가 흐르고 사랑의 촉감이 느껴진다. 실비단보다 부드럽게 치렁치렁
휘날리는 머릿결에선 연록의 향기가 풍긴다. 물가에 닿을 듯 내려와 유유히 헤엄치는 오리를
보고 있다. 바람은 물 주름을 일으키고 개울 둑에선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어 오른다.
한가로워 졸음이 오는 초록빛 평화…….
창밖에 수양버들을 심어 두고 싶다. 봄이면 톡톡 노크하며 얼굴을 내밀 때, 봄의 창을 활짝
열어 입 맞추고 싶다. 아, 무엇인지 모를 은밀하고도 숨 막히는 속삭임, 생명의 뜨거운 숨결,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가슴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2) 푸른 손
3월엔 봄비가 되고 싶어.
얼어붙었던 나뭇가지에 내려서 말하고 싶어. 손잡고 싶어. 눈 맞춤 하고 싶어. 귀엣말로
부드럽게 속살거리며 …….
누구에게 라도 훅훅 입김을 불어넣으며 말하고 싶은 걸. 온 몸으로 뼈 속에 스민 한기를 녹여
줄게. 살갗이 시려 오는 추위와 외로움을 벗겨 줄게. 빗방울 하나 씩으로 가지에 꽃눈이 되고
잎눈이 되고 싶어. 그리운 말로, 설레는 말로 네 굳은 가지와 마음속으로 수액이 되어 흐르고
싶어.
사납게 울부짖던 바람에도 꿈쩍도 않던 나무에게 생명의 음표들을 달아 주고 싶어. 딱딱하고
차가운 마음을 풀어주고 목과 겨드랑이에 스며들어 간지럼을 태울 거야. 툭툭 깨어나 잎눈이
되는 생명의 말, 새롭게 피어나는 말, 감동으로 젖어 버리는 말……. 생명의 향유를 가져와
언 몸에 뿌리고 쓰다듬어 주고 싶어. 방울방울 가지에 맺혀 꽃눈이 되고 잎눈이 되어 산과
들판을 초록으로 물들이고 싶어. 봄비가 내린 후의 산 빛을 보렴. 얼굴을 씻고 난 숲을…. 갓
태어난 부드러운 빛깔들이 꿈틀거리며 펼치는 초록 향연. 막 몸을 푼 산모의 표정 속에 깃든
평화로움……. 산과 들에는 어머니의 젖내가 풍겨. 잠을 깬 흙들이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하고 있어. 바람은 아기의 머리 결처럼 부드럽게 닿아 와. 봄비가 내린 후면 눈맞춤 할 게
많지. 물기 머금은 거무죽죽한 땅의 틈새로 불쑥불쑥 솟아난 새싹들……. 아기의 잇몸을
뚫고 돋아난 새하얀 치아 같아. 구멍에서 나와 행렬을 지어 햇빛 속으로 기어가는
개미떼들을……. 아직도 겨울잠이 덜 깬 듯, 눈부신 햇빛에 취한 듯한 모습. 어린 풀숲에
벗어 놓은 뱀의 허물, 논 속으로 뒷다리가 생길락 말락한 올챙이들을 보렴. 나뭇가지를 물어
와 둥우리를 새로 고치는 까치부부, 나뭇가지에 가느다란 줄을 매달고 대롱거리며 꿈꾸는
곤충의 번데기들을 ……. 마른 잎을 돌돌 말아 알을 숨겨 놓은 걸 보렴. 모래알 같은
알들에서 들려오는 노래……. 날개가 푸드득거리고 있어. 말을 건네고 싶어 못 견디겠어.
세상이 새로움으로 눈뜨고 있어. 얼굴엔 맑은 미소가 피어 올라. 몇 만 년이고 봄이면 해마다
되풀이하는 대지가 깨어나는 숨소리. 여태까지 대수롭지 않게 무심히 보아 넘기고 말았어.
3월엔 봄비가 되고 싶어. 방울방울 움들이 피어나게… . 그 움들이 초록세상이 되게, 마른
가슴을 적셔 꽃눈과 잎눈이 되고 싶어. 한 번이라도 봄비가 되었으면 해. 따스한 입김,
부드러운 손길이 되어, 네 언 손과 굳은 몸을 녹여 주고 싶어. 어떻게 고통의 신음을 지워
주는 기도가 될까. 설움을 풀어주는 노래가 될까.
나는 남에게 슬픔을 주는 비였을 뿐이야. 몸을 떨게 한 찬 빗방울이었을 뿐이야. 이젠
봄비였으면 해. 훈훈한 봄비가 되어 외로운 이웃에게 푸른 손을 내밀고 싶어. 초록으로
떠오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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