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소 / 캐나다 한국문협 자문위원
유방검진 서비스 안내장이 왔다.
유방 조영술은 처음 검사 받을 때보다는 불편함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망설여지는
검진이다. 차가운 기계와 낯선 손이 맨 살에 닿는 꺼림칙함이 싫고 X-선 노출에 대한
두려움에 늘 마음이 편치 않다. 한편 가슴살을 짓누르고 쥐어짜는 일을 여러 번 겪다
보니 가슴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기도 하여, 유방 조영술은 나이 들며 주름이
생기고 쪼그라든 젖가슴을 변명하는 좋은 핑계거리다. 주저하며 미루던 검진 날짜와
시간 예약을 하며 가슴에 얽힌 추억 하나 떠올려 본다.
여행하다 보면 실물 크기의 청동상을 많이 만난다. 얕은 속설이나 오랜 전설 때문에
청동상의 중요 부위가 손을 타 속살이 훤히 드러나고 반질반질해져 보기에 민망할
때가 있다. 그중 오른쪽 젖가슴이 벗겨져 반짝거리던 뮌헨의 줄리엣 동상이 기억에
남는다.
뮌헨의 줄리엣은 이탈리아 베로나에 있는 줄리엣 상의 복제품이다. 1974년,
셰익스피어 비극의 배경인 베로나에서 은행 설립 150주년 기념을 위해,
뮌헨시에 기증됐다고 한다. 베로나의 줄리엣은 오른쪽 가슴을 만지면 연인들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뮌헨의 줄리엣은 왼손에 꽃을 쥐여주면 행운이 따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관광객에게는 꽃을 구하기보다 그냥 가슴을 만지는 것이 손쉬울 테니, 둘 다
오른쪽 젖가슴이 보기에 민망하도록 닳아 있어 안타깝다.
중앙역, U반을 빠져나오니 뮌헨 도심은 봄비로 촉촉이 젖고 있다. 마리엔 광장으로
향하는 길은 부슬부슬 흩어지는 빗줄기로 서투른 초행길에 계속 비를 맞기도, 우산을
쓰기도 어려웠다. 결국, 몇 번 골목을 돌아 광장에 들어서자 유명한 신 시청 청사
시계탑 속 인형들이 돌아가며 움직이고 있다. 별스럽지도 않은 쇼를 보겠다고 많은
관광객이 모여 비를 맞고 있더니 끝나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텅 빈 광장의
심리를 따라 동쪽 구시청사 아치형 통로를 건너가자, 한쪽 골목 옆 모퉁이에 아름다운
여인이 하나 우뚝 서 있다. 줄리엣 청동상이다.
비에 젖은 줄리엣은 관심을 얻지 못한 탓에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발걸음을
묶고 바라보니 속살이 완전히 드러난 오른쪽 가슴이 추워 보인다. 그나마 접힌 왼쪽
팔에 누군가 걸쳐 놓은 튤립 몇 송이가 아직 싱싱하여 다행이다 싶을 때, 비슷한 키의
앙증스러운 여자아이 둘이 다가왔다. 쌍둥이 형제인 듯 아닌 듯, 색깔 맞춤을 한
아이들의 옷차림에 힘을 얻어 갑자기 주위는 화 사해졌다. 어린 다리에 딱 붙는 스키니
청바지와 꽃분홍 발목 부츠, 녹색 패딩 후드 점퍼와 분홍과 하늘색으로 줄무늬 진 방수
후드 점퍼의 묘한 조화로 놓칠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아이들의 아빠는 사진을 찍고 난 뒤 멀찌감치 물러나 있다. 한 아이는 줄리엣 얼굴을
쳐다보며 그녀의 오른손 손가락을 살짝 잡고, 또 다른 아이는 그녀의 꽃을 만지작거리며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비를 맞는 줄리엣을 위로하는 것일까. 아이들 표정은 볼
수 없으나 동심에 답하는 그녀의 표정은 자애로운 어머니 같다.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
등을 돌린 아이들 모습과 마주 보는 그녀를 얼른 하나의 앵글 속에 담았다. 고정된 채
한참 머물러 있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더는 그녀의 몸이 몰지각한 나그네의 손을 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른들은 자신의
복이나 사랑을 기원하며 생각 없이 여인의 가슴살을 함부로 만지는 횡포를 저지르는데,
동심은 그저 순수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뮌헨에서의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줄리엣 상과 함께한 아이들을 만난 일이다. 나이
들면서 마음에 묻은 삶의 때를 느낄 때마다 마리엔 광장의 그녀들을 되새김질한다.
마음에 묻은 때는 몸에 독소를 뿜는 원천이다. 몸은 늙어가지만, 몸속에 찌꺼기가 묵지
않도록 쉬지 않고 가꾸어야 한다. 오늘 하루도, 뮌헨의 그녀들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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