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뮌헨의 그녀들

강은소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9-03-15 17:03

강은소 / 캐나다 한국문협 자문위원
유방검진 서비스 안내장이 왔다.
유방 조영술은 처음 검사 받을 때보다는 불편함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망설여지는
검진이다. 차가운 기계와 낯선 손이 맨 살에 닿는 꺼림칙함이 싫고 X-선 노출에 대한
두려움에 늘 마음이 편치 않다. 한편 가슴살을 짓누르고 쥐어짜는 일을 여러 번 겪다
보니 가슴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기도 하여, 유방 조영술은 나이 들며 주름이
생기고 쪼그라든 젖가슴을 변명하는 좋은 핑계거리다. 주저하며 미루던 검진 날짜와
시간 예약을 하며 가슴에 얽힌 추억 하나 떠올려 본다. 
여행하다 보면 실물 크기의 청동상을 많이 만난다. 얕은 속설이나 오랜 전설 때문에
청동상의 중요 부위가 손을 타 속살이 훤히 드러나고 반질반질해져 보기에 민망할
때가 있다. 그중 오른쪽 젖가슴이 벗겨져 반짝거리던 뮌헨의 줄리엣 동상이 기억에
남는다.
뮌헨의 줄리엣은 이탈리아 베로나에 있는 줄리엣 상의 복제품이다. 1974년,
셰익스피어 비극의 배경인 베로나에서 은행 설립 150주년 기념을 위해,
뮌헨시에 기증됐다고 한다. 베로나의 줄리엣은 오른쪽 가슴을 만지면 연인들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뮌헨의 줄리엣은 왼손에 꽃을 쥐여주면 행운이 따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관광객에게는 꽃을 구하기보다 그냥 가슴을 만지는 것이 손쉬울 테니, 둘 다
오른쪽 젖가슴이 보기에 민망하도록 닳아 있어 안타깝다.
중앙역, U반을 빠져나오니 뮌헨 도심은 봄비로 촉촉이 젖고 있다. 마리엔 광장으로
향하는 길은 부슬부슬 흩어지는 빗줄기로 서투른 초행길에 계속 비를 맞기도, 우산을
쓰기도 어려웠다. 결국, 몇 번 골목을 돌아 광장에 들어서자 유명한 신 시청 청사
시계탑 속 인형들이 돌아가며 움직이고 있다. 별스럽지도 않은 쇼를 보겠다고 많은
관광객이 모여 비를 맞고 있더니 끝나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텅 빈 광장의

심리를 따라 동쪽 구시청사 아치형 통로를 건너가자, 한쪽 골목 옆 모퉁이에 아름다운
여인이 하나 우뚝 서 있다. 줄리엣 청동상이다.
비에 젖은 줄리엣은 관심을 얻지 못한 탓에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발걸음을
묶고 바라보니 속살이 완전히 드러난 오른쪽 가슴이 추워 보인다. 그나마 접힌 왼쪽
팔에 누군가 걸쳐 놓은 튤립 몇 송이가 아직 싱싱하여 다행이다 싶을 때, 비슷한 키의
앙증스러운 여자아이 둘이 다가왔다. 쌍둥이 형제인 듯 아닌 듯, 색깔 맞춤을 한
아이들의 옷차림에 힘을 얻어 갑자기 주위는 화 사해졌다. 어린 다리에 딱 붙는 스키니
청바지와 꽃분홍 발목 부츠, 녹색 패딩 후드 점퍼와 분홍과 하늘색으로 줄무늬 진 방수
후드 점퍼의 묘한 조화로 놓칠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아이들의 아빠는 사진을 찍고 난 뒤 멀찌감치 물러나 있다. 한 아이는 줄리엣 얼굴을
쳐다보며 그녀의 오른손 손가락을 살짝 잡고, 또 다른 아이는 그녀의 꽃을 만지작거리며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비를 맞는 줄리엣을 위로하는 것일까. 아이들 표정은 볼
수 없으나 동심에 답하는 그녀의 표정은 자애로운 어머니 같다.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
등을 돌린 아이들 모습과 마주 보는 그녀를 얼른 하나의 앵글 속에 담았다. 고정된 채
한참 머물러 있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더는 그녀의 몸이 몰지각한 나그네의 손을 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른들은 자신의
복이나 사랑을 기원하며 생각 없이 여인의 가슴살을 함부로 만지는 횡포를 저지르는데,
동심은 그저 순수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뮌헨에서의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줄리엣 상과 함께한 아이들을 만난 일이다. 나이
들면서 마음에 묻은 삶의 때를 느낄 때마다 마리엔 광장의 그녀들을 되새김질한다.
마음에 묻은 때는 몸에 독소를 뿜는 원천이다. 몸은 늙어가지만, 몸속에 찌꺼기가 묵지
않도록 쉬지 않고 가꾸어야 한다. 오늘 하루도, 뮌헨의 그녀들을 추억한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낙타 세 마리 2024.03.08 (금)
박정은 / 사)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복권이 윷놀이 상품으로 걸렸다. 구정을 맞아 주유소에서 일하는 한국인 직원들과 모여 윷놀이를 하는데, 남편이 복권을 상품으로 건 거였다. 주유소에서 복권을 팔기만 했지, 난 한 번도 복권을 사본 적이 없었다. 딱히 복권에 욕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기왕에 하는 윷놀이 열심히 해보지 싶었다. 열성껏 윷을 던진 결과 결국 몇 장의 복권이 손에 들어왔고, 난 그걸...
박정은
그리움 2024.03.08 (금)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전지를 갈아 끼워도 가지 않는 손목시계처럼 그는 그렇게 그녀라는 길 위에 멈추어 있다.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이 그에게는 여전히 아프고 쓰리다. 이별의 모서리는 언제나 날카로워 돌아볼 때마다 마음이 베이지만 그녀라는 모퉁이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는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진한 눈썹, 둥근 이마, 상큼하면서도 허스키한 탄산수 음색이 생각나 아직도 심장이 쿵, 떨어져 내린다 하였다....
최민자
밤의 날개 2024.03.08 (금)
이영춘 / 캐나다 한국문협 수석고문고요가 조용히 날개를 펼칩니다팔랑이는 이파리처럼, 이파리의 날개처럼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산비둘기들이 마을로 내려옵니다내려와 잠드는 내 집 처마 끝에달빛을 비춰줍니다고요의 숨소리가 들립니다달빛도 긴 그림자의 그늘을 접고나뭇가지에 어깨를 걸치고 앉아고요가 잠든 집을 지켜줍니다 고요가 조용히 일어나 잠들려는 나를살짝 깨웁니다눈뜬 별들의 바다가 깊습니다나도 살짝...
이영춘
송년엽서 2024.03.04 (월)
1년의 폭은 365미터비껴 간 10년, 또 10년 우리 까마득히 멀어져보이지도 들리지도 눈을 감아요깊숙이 자목련 한 그루씩 심어요 먼 날자색 빛 노을 물드는 저녁 바다 이편에서바다 저편에서 목련 꽃비만후두둑 후두둑
백철현
2024년으로 끝자리 숫자 하나가 바뀌며 엄청나게 쏟아지던 카톡의 홍수가 사라질 무렵에 나는 재미있는 톡 하나를 받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새해 덕담으로 주고받는 톡이 아닌 새롭게 단장한 문인협회 산문 분과의 새 방장님이 쏘아 올린 첫 신호탄으로 그것은 푸른 용의 꿈틀거림처럼 잔잔하던 방안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린 왕자’의 여우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한다는 신세대 방장님의 기발한 인사말과 함께 산문 방 한정 초미니 백일장을...
줄리아 헤븐 김
김밥 한 줄 2024.03.04 (월)
김밥 한 줄은 말줄임표(……)간단명료하다. 설명이나 사족을 붙이지 않는다. 말의 울림이다. 침묵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 함부로 말할 수 없어 가슴 속에서만 숨 띄는 함축언어이다.김밥 한 줄은 가장 간소한 한 끼이다. 30초 만에 차려진다. 김 한 장을 펴고 밥을 담은 다음 준비해둔 당근, 부친계란, 볶은 햄, 우엉, 시금치. 단무지를 넣고 말아 올리면 된다. 은박지를 깐 접시 위에 놓인 검은 김밥 한 줄….김밥 토막들은 대열을 벗어나지 않고...
정목일
새해 소원 2024.03.04 (월)
인생은 세월 따라 흐른다천천히 지나도 지나고 보니그 세월은 순간이었다인생은 머물지 않지만지나간 시간과 함께한소중했던 순간힘 겨워했던 시간모두 추억의 공간에 곱게 새겨져내 인생의 그림자가 되었다 많이 아쉽기도 했던 기억들함께 했던 즐거움의 흔적들같이 했던 시간 속의 기쁨들때론 야속하기도 한 아픔의 그 세월여러분을 만나서 여러분과 함께해서참 멋지고 행복한 좋은 시간이었다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2024년 또 다른 나의...
나영표
습작의 고뇌 2024.02.26 (월)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다진통 끝에 나의 자궁에서 나온 글이 걸음마를 배운다안아달라고 칭얼댄다나에게 말을 걸어온다그 글에 옷을 입혀 세상 밖으로 보내본다지나가는 이들이 내 글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잘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고 뒷얘기로 쑥덕거린다한 대 때리고 도망간다내 글이 운다내 마음이 차였다자랑스럽게 내보낸 나의 글은 그 흔한 목걸이 하나 없이누군가 길거리에 내던져 버린 옷을 걸쳐 입고 있었다그 글은 시체처럼 길거리...
김영선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