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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인을 만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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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9-02-06 08:53

정숙인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불교에서는 우리가 속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아주 잠깐 머물다 가는 것이라고 했다.
영겁의 시간을 기다려 찰나를 살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삶의 질곡에서 우리는 울며 웃는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다. 오늘따라 무척이나 하루가 길고 고단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인생이 오늘 같기만 하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는 거라며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있다. 바닷가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되는
행복과 불행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이란 불행이 닥쳤을 때 과거에 행복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위로 받기도 하고 행복한 순간에 과거의 불행했던 때를 떠올리며 감사를 드리기도
한다.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이렇듯 최선의 방법으로
세상에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더군다나 그 최선을 다하는 현실에서 곤경에 빠진
어느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존경받아 마땅하다. 어느 화창한 봄날, 금방
싹을 틔운 화분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설레이며 귀가하는 날처럼 인생의 태엽을 잠시 뒤로
돌려 내 살아온 뒤안길에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은인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본다.
 
여의도 광장 건너편에 위치한 증권타운내의 서울증권(주)에서 책임영양사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사방이 통유리로 만들어져 아스라히 한강의 아름다운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직원
구내식당이 위치한 곳은 빌딩의 제일 상층부인 18층, 1994년에 오픈한 신 사옥 빌딩은
한강을 배경으로 전망이 무척이나 뛰어났다. 바로 옆에 위치한 빌딩들 대부분이

증권사들이어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활기 로워 보였고 그들에게서 풋풋한
젊음의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매일 아침 출근을 할 때가 오히려 퇴근 시간보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태양은 온 누리에 빛을 발하고 그 빛이 가서 닿는 곳마다 활력이
넘쳐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침시간이라 비춰지는 것들이 깨끗하고 신선해 보였다.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사옥 현관을 들어설 때면 경비 대장 아저씨가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건네는 것부터 가 내게는 무척 매력적으로 비쳐졌다. 여의도 신 사옥 오픈과 더불어 처음
생기는 구내식당인지라 그 곳의 대장인 나를 직원들은 경이롭고 색다르게 보고 있던 터였다.
우리 식당 식구들은 청소분야, 경비분야, 그리고 수리분야의 동료들과 당연히 친하게 지내야
하는 줄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나는 내 쪽에서 먼저 친근감 있게 경비대장에게 웃음을
건네곤 했다. 사실은 오히려 그들 쪽에서 먼저 내게 달려들어야 앞으로의 매사가 순탄할
지언 대 그 이유는 식당에서 공짜로 얻게 되는 간식거리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날 아침의 출근 역시 순조로웠다. 머리 손질도 잘 되었고 옷차림도 멋쟁이처럼 그 날 따라
코디가 잘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매일 들리는 가게에서 우유를 사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초록으로 불이 바뀌자 나는
핸드백을 고쳐 메고 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러다가 나는 그만 그 자리에 붙박이고 말았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웬일인지 나의 두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건너가고 건너오고 하는데 오직 나 혼자만이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질 못하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밑을 내려다보니 하이힐 뒷굽이 지하철 공사중이라 도로를 씌운 두꺼운
강철판의 뚫린 구멍에 꽉 끼어 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양쪽 모두가 말이다. 순간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입안에 침이 말라 겨우 숨을 꼴딱거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로 향해져 올 거란 생각에 너무나도
창피하였다. 그러기를 얼마 안 있어 노란 불이 빨간색으로 바뀌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
저기서 빵빵대며 경적이 울리기 시작했다. 괴로운 일생일대의 시간이 최대한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양쪽 신호등에 붙잡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시하여 각 종 차량안의 사람들까지
오로지 나 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든 움직여보려 했으나 도대체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바램은 오직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거였다.
 
여기저기서 기다리다 못해 터져 나오는 자동차 경적음으로 인해 나는 더욱 당황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이라고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미동도 없이 서있는 일이었다. 그런 내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겨우 고개를 들고 앞을 보니 회색 빛 지하철 작업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나타나 박힌 하이힐을 빼내고 그 위에 덮인 흙먼지를 장갑 낀 손으로 닦아주며 맨발로
서있는 내게 건네 주었다. 한껏 멋을 부린 채로 창피함에 어쩔 줄 모르던 나는 그에게 제대로
감사의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그저 황급히 신발을 받아 신고 재빨리 현장을 벗어나
달아나버렸다. 말없이 내게 하이힐을 내밀던 그는 나와 같은 청년의 모습이었고 그 옆의

동료는 뜻 모를 웃음을 건네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민망으로 붉어진 얼굴로 그 자리를
황망히 벗어났다. 그 역시 내게 신발을 건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이윽고 차들은 속력을 내며 제 갈 길로 흩어져버렸다. 분명 그는 나의 은인이었다.
적어도 그 때 그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어야 했다. 어디에서 인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그는 지금도 어느 누구를 위하여 도움을 베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도움을
받았던 나는 살면서 그 은혜를 갚아야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막상 도움의
순간이 주어지면 대부분 실천에 옮기기를 꺼려한다. 용기를 내어 앞장서기란 실제로
어렵다는 뜻이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이 새로운 해에 나는 용기를 내어 어느
누군가를 위하여 도움을 베풀 것이다. 새로운 날이 열리고 햇빛을 받아 지구 한 모퉁이의
온도가 달아올라가는 시간이다. 그 청년을 떠올리며 하늘을 향해 나는 맑은 웃음을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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