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경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어린 시절, 초등학교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문방구에서는 온갖 종류의 불량식품을
팔았다. 그 불량식품을 사기 위해 아침마다 ‘엄마, 백 원만!’을 간절히 외치곤 했다.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이제부터는 정말 착한 아이가 되겠다는 다짐을 거듭하며 반짝이는 은빛 동전
하나를 손에 넣었다. 책가방을 메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아이를 보며 엄마는 불량식품은
절대 사 먹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문방구 앞에 서서 무엇을 살지 고민하는 순간이면
기분 좋은 설렘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오독오독 씹을수록 고소한 밭두렁, 빨아먹는
재미가 있는 아폴로, 연탄불에 구우면 말랑말랑해지던 쫀드기, 너무 딱딱해서 씹고 나면
턱이 아프던 숏 다리….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불량식품은 어린
우리에게 맛의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 준 최고의 간식이었다. 백 원짜리 동전 하나면 원하던
불량식품 한두 개를 손에 넣고도 이십 원이나 십 원쯤 이 남곤 했으니 값도 무척 저렴했다.
거스름돈으로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를 받아 들면 바로 셈에 들어갔다. 십 원이면 돌사탕이
다섯 개, 이십 원이면 돌사탕이 열 개. 돌사탕은 돌처럼 볼품이 없고, 딱딱해서 깨물어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가장 값싼 불량 식품이었다.
주머니를 불룩하게 채웠던 돌 사탕 중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 학교 가는 길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거칠고, 밍밍했던 맛은 사탕이라고 부르기에도 무색했지만,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한 손 가득 잡히던 돌사탕은 그 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만족감을 주었다.
좁은 골목을 지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친구들과 발걸음을 맞출 때면 인심 좋게 돌 사탕
하나씩을 나누어 주곤 했다. 어느새 주머니는 가벼워지고, 우리는 학교에 이르렀다. 주머니
안에 있는 돌사탕이 마지막 남은 하나라는 것을 알고 나면, 그것은 싸구려 불량식품이 아닌
귀중한 그 무엇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선뜻 입에 넣지 못하고, 하루 내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며 돌사탕이 주었던 기쁨을 다시 한번 붙잡으려 했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삶
곳곳에서 나는 마지막 남은 돌사탕의 의미를 쉽게 찾곤 한다. 비웠을 때 채워지는 것, 놓았을
때 얻게 되는 것, 많이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알게 되는 작은 것에서 비롯되는 소중한 행복을
나는 매일 경험하며 산다.
냉장고가 텅 비었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으며
실망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이가 다시 냉장고 문을 열고
얼굴을 깊숙이 넣었다. 아이의 입에서 우아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냉장고 안에서
초콜릿 한 알을 발견한 것이었다. 언젠가 넣어두었던 초콜릿 상자에서 떨어져 나와 구석에
박혀 있던 빨간색 비닐에 싸인 초콜릿이었다. 아이는 초콜릿 한 알을 들고나오며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행복한 얼굴이었다. 동생의 손에 올려진 초콜릿을 보며 눈이 동그래진
큰아이는 입맛을 다셨다. 동생은 자신이 자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언니를 힐끗
내려다보고는 위풍당당하게 초콜릿의 비닐을 벗겼다. 동그란 초콜릿 한 알을 통째로 입안에
넣는가 싶었는데 앞니로 꽉 깨물어 반은 제가 먹고, 반은 언니에게 내밀었다. 언니는 웬
횡재냐는 얼굴로 초콜릿을 받아 들고는 연거푸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초콜릿 하나에 두 아이는 금세 천국의 아이들이 되었다. 마지막 남은 초콜릿 한 알은 넉넉할
때 느낄 수 없었던 감사의 마음과 나눔의 기쁨을 아이들에게 선물해 주었다. 내심 넘치지
않게 아이를 키우는 것이 마음 넉넉한 아이들을 만드는 비법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나는 이전에 비해 소박해진 일상을 즐기며 산다. 학교나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한 상
가득했던 엄마 표 밥상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달랑 국 하나에 김치 뿐인 밥상을 앞에
놓고 알게 되었다. 어쩌다 새로 한 반찬이 식탁에 두 개만 올라와도 오늘이 무슨 날이냐며
좋아하는 남편과 아이들. 간소하지만 따뜻한 밥상 앞에 모여 앉은 가족들은 참 복스럽게
음식을 먹고 미소를 내어놓는다. 넘치지 않는 단출한 생활은 언제나 작은 것에도 감격하고
감사하게 만든다. 비우려고 해도 비울 수 없던 욕심과 허영들…. 부모 형제 없는 먼 이국
땅에 살면서 마음이 가난해진 탓인지 움켜쥐고 있던 많은 것들을 하나 둘 내려놓게 된다.
비웠을 때 비로소 채울 수 있는 것들, 넘치게 소유해서가 아니라 딱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있을 때 찾아오는 행복은 생활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식구들과
마주하고 앉을 때의 편안함, 된장찌개 하나에 계란말이를 앞에 두고 느끼는 기분 좋은
포만감, 우리 말로 된 책 한 권을 받아 들었을 때의 감격, 언 발을 녹여주는 남편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소박한 삶 속에 찾아 드는 잔잔한 기쁨은 주머니 속에 종일 굴러다니던
손 떼 묻은 마지막 돌사탕을 통해 느꼈던 충족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단한 삶의
순간순간마다 휑한 마음을 달래주는 건 일상에서 접하는 작은 것에 깃들어 있음을 마음에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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