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오은 / 캐나다 한국문협 기획
주말에 손자가 다녀갔다.
내가 감기를 앓아 거의 한 달 만이다. 알 수 없는 소리를 옹알거리더니
요즘은 저만의 즐겨 쓰는 단어 몇 개가 있다. 하지만 손자와 나 사이엔 말이 필요 없다.
“어, 또는 응?” 하면서 말꼬리를 올리면 모든 게 만사형통이다. 녀석의
가녀린 손끝이 가리키는 대로 몸을 낮추고 귀를 기울이면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
소리 나는 책도 가져다 주고 장난감 상자도 알아서 대령한다. 피아노를 바라보며
“어…”하면 냉큼 피아노 앞으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 우유가 마시고 싶은 거고, 뭔가
먹고 싶으면 단풍잎 같은 손을 입에 대고 계속 톡톡 두드린다. 반 가까이 흘리지만
먹여주는 건 질색이고 스스로 먹는 게 신통 방통하다.
기저귀를 바꿀 때, 고 귀여운 것(?)을 내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까꿍을 하며
놀잰다. 까꿍도 어찌나 크게 하는지 발레리나 강수진 폼이다. 기저귀만 두른 채 소파에
털썩 눕기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고 좀 놀아줘야 바지 입기가 허용된다.
팔다리를 추켜 올리고 끙끙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걸음마를 자랑하며 의기양양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며 분주 다망하다. 서랍을 열고 집어넣고 꺼내기를 반복하다가, 다른
흥미거리가 생기면 미련 없이 옮겨간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숨겨놓은 위험한 연장
가방까지 꺼낼 판이다. 가고 나면 서랍이나 구석에 안경, 자, 볼펜
등이 수두룩하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 같아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데. 녀석도 맹렬하게 몸을 일으켜, 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더니, 혼자 걷기를
삽시간에 해치웠다. 스스로 균형을 잡고 일어서는 것부터 시작해 어쩔 수 없이 인생이란
복잡 다단한 길에 들어섰다. 햇살은 나무를 부풀게 하고 지식과 배움은 사람을 지혜롭게
한다. 행동하는 것이 인생이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긴 삶을 산다고 한다. 문일지십(聞一知
十)하기 바라며 올곧고 현명하게 자라길 빌어 본다.
하루의 반을 갈랐다. 이제 낮잠 잘 시간, 잠투정이 심해 몸을 뒤로 젖히며 울어 재낄
때는 힘에 부쳐 내가 넘어갈 정도다. 아기 띠로 안아 재우려는데 내려놓으면 화들짝
깨고 또 깨고 ... 그대로 안은 채 거실을 두어 바퀴 돈다. 발그레한 얼굴을 갸웃하고 포옥
안겨 도리 없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든다. 눈도 찡긋하고 가끔 입술을 오물거리면
젖내가 폴폴 ... 내려놓지도 못하고 한 시간 넘게 재우다 보니, 내 어깨,
허리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어쩔 수 없이 나이 먹음에 포섭당하고 실꾸러미에 꿰어
가는 이 무정한 세월이여.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천사가 따로 없다.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초롱한 눈 속에
호수가 있고 하늘이 있고 온 우주가 들어 있다. 어느 별에서 뚝 떨어져 내게로 와 이렇듯
꼼짝 못하게 하니.’ 작년 가을 어느 날, 아들이 화상 전화로 꼬물거리는 생명체를 보여
주며 이 세상에 손자의 탄생을 알렸다. 눈도 못 뜨고 고사리 손을 꼭 쥔 채 입술을
오물거리며 잠든 모습이, 아들을 빼 닮았는가 했더니 얼핏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경이롭다. 이렇게 대를 잇는 것인가. 이른 새벽에 태어났거늘 엄마 잠 깨우지 않겠다고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은근히 알리는 아들. 기쁘고 가슴 벅찬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한나절을 놀고 이젠 작별의 시간. 차에 태우고 유아용 의자의 안전 벨트를 채우면
방글거리던 표정이 슬그머니 바뀐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환호하고 손뼉
쳐주고 절대적 팬인 나와 작별하는 게 저도 서운하다는 것을
... 하지만 포기도 빨라 방긋 웃으며 고사리 손을 흔든다.
그 조그만 몸으로 온 집안을 흔들어 놓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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