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헤리티지 숲의 시간 -호랑가시 길

강은소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8-12-14 16:54

강은소 / 캐나다 한국문협 자문위원
포트 무디 호랑가시 길 6번지, 헤리티지 숲 속에 자리한 우리 집이다.
집을 구하러 다닐 때 마땅한 집이 빨리 나타나지 않으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 집을 고르면 집값이 터무니없이 예산을 뛰어넘고, 예산에 맞추어 고르면
오래된 집이거나 전주인의 특이한 음식 향을 걷어내는 추가 경비를 더 해야 할
집이다. 적당한 집을 찾는 일에 지칠 때쯤, 반듯하게 앉은 작은 집이 새로 매물
안내판을 안고 나타났다. 1년 반쯤 된 새집이라 손볼 것이 없어 청소만 하고 이사했다.
헤리티지 산길을 올라가다 한쪽 옆으로 계곡을 끼고 앉은 작은 주택단지. 마흔한 채의
신흥 주택이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반원 모양 골목에 줄을 지어 마주 보고 있다.
단지 사이 골목을 호랑가시 길로 이름하고 번지수를 이어 나가는데, 골목 좌우에는
단풍나무 가로수가 서 있고 주변은 쭉쭉 뻗은 삼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주변에 호랑가시나무는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아 길 이름을 왜 그렇게 붙였는지
궁금했지만, 그 근거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여하튼 숲속의 이 작은 동네가 낯선 땅에서
만난 첫 삶의 터전이다.

이사한 다음 날, 마주한 집과 좌우 이웃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오른쪽 옆집의 젊은
코캐시언 캐서린은 서너 살 돼 보이는 흑인 남자아이와 언뜻 보기에 할머니처럼
느껴지는 또 다른 백인 여자를 같이 사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왼쪽 옆집엔 중국계
부부가 어린 딸 아이를 키우고, 마주 보는 앞집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왔다는 영국계
젊은 부부가 산다. 신혼의 멜리사와 스튜어트는 둘 다 키가 훤칠하며 사람이 좋아 보여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마주 보는 집 왼쪽은 인도계 부부와 아이, 또 오른쪽은 타이완
계 여자와 백인 남자가 아들 하나와 살고 있다. 이웃과 인사를 나누며 새삼 깨달았다.
이곳은 다민족이 모여 살면서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타협과 화합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회다.
캐나다 국기는 한가운데 빨간 단풍잎이 하나 그려져 있다. 단풍잎 한 귀퉁이 작은
조각 하나라도 허투루 떨어져 나가지 않게 다 붙여 두어야 온전한 붉은 단풍잎이
완성된다. 이것이 캐나다의 정체성, 바로 이 나라의 모자이크 문화를 잘 보여주는
상징이다.
여기 인물 중에 테리 팍스와 데이비드 스스키가 있다. 국영방송 CBC의 여론조사에서
위대한 캐나다인 2위에 오른 테리 팍스. 그는 한쪽 다리를 절단한 채 암 연구를 위한
대륙횡단 자선 마라톤을 시작했으나 폐로 전이 된 암으로 한창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데이비드 스스키는 일본계 캐나다인 환경 운동가로 자신의 이상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하고 있는 사람이다. 캐나다의 진정한 가치는 비록 다리가 한쪽밖에 없다 하더라도
혹은 이민자이거나 소수 민족일지라도 다양하고 평범한 개인의 삶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꿈과 이상이 실현되는 사회라는 데 있다.
호랑가시 길엔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여 살고 있다. 대부분이 유치원생이나
초등생 학부모인데 우리는 유일하게 대학생 아들을 둔 부부다. 다양한 피부색의 젊은
그들과 어울리며 늘 사람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으려 애쓰고 진정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자 힘썼다. 할머니인 줄 알았던 제니퍼와 캐서린이 레즈비언 커플이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뀔 때, 그들은 흑인 계집아이를 둘째로 입양했다. 한 4년쯤 신혼을 즐기던
멜리사는 귀엽고 똘똘한 매튜에 이어 벌써 세 번째 배가 불러오고 있다. 십 년 세월,
호랑가시 골목길의 낯설고 다양한 인연과 함께한 시간은 아름다운 경험이다.
아픈 경험은 늘 골목길 밖에서 일어난다. 직장인이 된 아들처럼 바쁘고 활기찬 단지의
젊은 사람과 달리 마냥 한가로워 보일지도 모를 우리는 나름 낯설고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려 애를 쓰는 중이다. 속으로는 부딪쳐 멍들거나 깨지고 밖으로는 겉늙어가는
답답한 시간을 거치고 있다. 이민자로서 떠나온 땅덩이가 하나이고 어머니 말이 통하는
동병상련 동포인 줄, 친구인 줄 믿었던 인연은 자주 상처를 남긴다. 날카로운 손톱이
웃는 얼굴로 할퀴면 대책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빨간 단풍잎 모자이크 안에서 닮은
조각이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 일이 안타깝고 슬플 뿐이다.
호랑가시 길은 상처받은 우리를 따스하게 감싸주는 울타리다. 두 입양아, 흑인 남매의
재잘거리며 뛰노는 소리는 즐거운 울림이 되고, 매튜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키 자람은

흐르는 시간을 풍요롭게 한다. 골목길 아이들의 순진무구함이 우리 상처를 쓰다듬는다.
그래도 미처 잠들지 못하는 밤은 창 밖 훤한 달빛 아래 묵언 수행 삼나무와 함께
발밤발밤 오래도록 밤의 깊이를 밟기도 한다.
항상 생각의 끝은 하나다. 단풍잎 모자이크의 완성은 상대방을 인정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배려해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진심과 정성을 담아 상대를 배려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는 일이다. 진정성과 배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우리에게 진심으로 배려하는 마음을 길러준
골목을 떠나며 새로 마주할 길도 예禮가 살아 숨 쉬는 곳이기를 바란다.
이제, 마음의 고향 같은 호랑가시 길을 떠난다. 헤리티지 숲을 내려간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벌거숭이 산 2023.12.04 (월)
캐나다 로키에는 세 자매 봉이 다정하게 솟아있습니다. 요정이 살 것 같은 아름다운 산입니다. 세 자매 봉에는 일 년 내내 하얀 눈이 덮여 하늘에 닿을 듯했습니다. 하지만, 지구가 뜨거워지면서 세 자매 봉 꼭대기에는 더 이상 눈이 없습니다. 이제 세 자매 봉은 덩그러니 벌거벗은 바위산이 되어버렸습니다.“아이 추워! 언니들!”막내는 포근하던 눈옷이 벗겨지자 추웠습니다. 두꺼운 눈옷을 입고 있을 때는 춥지 않았습니다. 눈 속은 참 따뜻하고...
이정순
솔방울의 추억 2023.12.04 (월)
카톨릭을 국교로 하는 캐나다의 가장 큰 국경일은 당연히 크리스마스이다.다민족 다문화 국가이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에 따른 다양한 종교가 공존해 크리스마스보다만민의 신과 같은 어머니를 기리는 마더스데이가 실질적으로는 더 많은 국민들이 기리는날이기는 하다.한 해를 마무리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는 국경일이라 크리스마스 트리 등 많은 조명,장식과 선물, 음식, 종교적 문화가 발전되어 온 글로벌 축일이다.솔방울도 크리스마스 트리와...
이은세
자화상 2023.12.04 (월)
1 비춰보면스스로만 늘 추해 보이는모습이 있었다흰 여백으로 가득 찬언덕 위생명과 목숨이라는 두 인간이겹치듯 어른거렸고시작도 끝도 없는 기호들이표면에 기재되었다가물가물 아지랑이로피어나고 있었다 2 허기진 배물 채우듯냄새도 색깔도 없었다스스로에 대한 경고나결심 따위는 팽개치고오로지 자신에게만한없이 너그러워 보이는 그곳늘노릿한 바나나 향이 배어 있어서두통약을 찾다가결국 엉뚱한 소화제를 찾기도...
하태린
숨죽이고 2023.11.27 (월)
비는 내리고까맣게 어두움이 몰려왔을 때에도 나는불을 캐지 않으리창구멍 어디에도 머리카락 한 올을 보이지 않으리숨소리도 죽이고나는 꼭꼭 숨으리 그가 애타게 나를 찾고 찾아도그래도 나는 미동도 않으리 어느 날 그가 말하면몰랐다고 말하리정말 몰랐다고 말하리 당신도 애타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리더 탈 것 없어 하얗게 재가 되게 그냥 두리눈 헐기며 앙탈도 하리 세월의 옷자락이 너풀거릴 때그때에야 말하리한없이...
강숙려
빨리빨리, 천천히 2023.11.27 (월)
   자동판매기 버튼을 눌렀다. 캔 음료가 나오기 전 습관적으로 머리를 숙여 음료수가 나오는 통로로 손을 내밀었다. 조금 기다리니 덜컹하며 내 손에 잡힌 음료가 갈증을 풀어주었다. 자동판매기 앞에서 난 매번 필요 없는 동작을 한다. 커피 자동판매기에서도 버튼을 누른 후 커피가 다 채워지기 전에 손을 먼저 넣어 뜨거운 커피가 손 등에 흘러 데인 적도 있었다. 또 다른 습관은 공공기관 서비스 안내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안내 내용을...
정효봉
엄마의 힘 2023.11.27 (월)
   하루에도 몇 번을 오가는 거리가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스쳐 지나가는 낯선 이의 모습 속에서, 외국어로 채워진 상가 외벽의 간판을 보며 나는 누구이고, 내가 있는 곳은 어디 인지를 곱씹어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자메뷰(Jamais Vu), 즉 미시감(未視感) 현상을 말하는 걸까? 익숙한 장소가 낯설게 느껴지면 재빨리 눈을 감거나 하늘을 올려다본다.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이국의 정취에 스며들지 못하는 나는 공기 중에...
권은경
오로라 마주하기 2023.11.27 (월)
서막이 열리기 전 객석은 이미 만석반전 매력이 없는 공연은 싫다면서무대의 천정 끝에서 *스윙이 나타났다*오프닝 코러스로 별 똥이 지나간 뒤객석은 발아 되어 변주로 출렁이며수많은 빗살 무늬로 줄을 타는 아리아극한의 무대 위에 광량은 클라이 막스2막 3장 푸른 빛을 되감는 필름처럼오, 그대 다시 보고파 불러본다 *커튼 콜*스윙(Swing)-모든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배역으로 주 배우의 이동 시 역할을 맡는 배우*오프닝 코러스(Opening Chorus)-서곡이...
이상목
가을날 2023.11.20 (월)
하늘빛 깊어져가로수 이파리 물들어가면심연에 묻힌 것들이명치끝에서 치오른다단풍빛 눈빛이며뒤돌아 선 가랑잎 사람말씨 곱던 그녀랑두레박으로 퍼올리고 싶다다시 만난다면봄날처럼 웃을 수 있을까가을은 촉수를 흔들며 사냥감을 찾고나무 빛깔에 스며들며덜컥 가을의 포로가 되고 만다냄비에선 김치찌개가 보글거리고달님도 창문 안을 기웃거리는데.
임현숙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