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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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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8-11-02 16:32

정목일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우리 나라 아침은 한지 방문으로부터 온다.
희끄무레한 여명이 물들어 있는 한지 방문을 보면서 아침이 온 것을 알게 된다. 한지 방문은
정결하고 고요롭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밝아오는 아침의 서기와 명상이 어려 있다.
유리창처럼 빛을 투과하지 않고 머물게 하는 것은 한지 방문밖에 없을 듯하다. 아침 빛을
맞아들이고 그 표정을 보여줌으로써 평화와 맑음을 준다.
 
한지 방문은 빛을 품어 광명을 안게 한다. 지난날의 어둠과 근심을 지워버리고 새 기분으로
하루를 열게 한다. 드러나지 않고 은근하게, 눈부시지 않고 환하게, 번쩍거리지 않고
삼삼하게, 마음을 채워준다. 한지 방문은 빛을 여과시키고 함축시켜 담담하게 드러낸다.
한지 방문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빛의 표정을 볼 수 있게 한 지혜의 꽃이 아닐까.
 유리창은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있게 한다면, 한지 방문은 빛의 표정과 숨결을 느끼며
사색의 시간을 갖게 만든다. 숨쉬고 있는 이 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며 빛의 미학을 펼쳐 보인다.
 
한지 방문엔 달빛이 찾아온다. 달빛을 머금는다고나 할까, 달빛에 젖는다고나 할까, 달빛과
만나 포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벌레는 무슨 말을 사방연속무늬로 늘어놓고,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댄다. 소리만 들리는 게 아니다. 신록 향기와 들꽃 향기도 스며온다.
 바깥을 내다 볼 순 없지만 더 세심하게 느끼고 교감할 수 있는 문이다. 안과 밖 만이 아니라
찰나와 영원, 자연과 인간의 통로가 된다. 차단과 밀폐가 아닌 조화와 교감을 위한 문이다.
빛의 표정에 눈맞추고 바람과 풀벌레의 소리에 귀대고 있는 한지 방문, 닫혀 있는 게 아니라
자연 속으로 열려 있으며 숨쉬고 있는 문이다. 바깥을 보는 게 아니라 마음을 보는 문이다.
 

조선 오백 년 동안 우리 겨레가 백자(白瓷)만을 추구해온 것은 한지 방문의 한없이 맑고
환한 표정 때문이리라. 우리 민족 이외엔 순백색만을 오백 년 동안 탐구한 민족은 없다.
백자, 한지 방문은 빛으로 반사 시키지 않고 안으로 머금어 품어내므로 그윽하고도
고요초롬하다. 다름 아닌 해와 달이 내는 영원의 빛깔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채색이지만
삼라만상의 모든 빛깔을 다 함축하고 있으며 정화된 빛이기에 한없이 빠져들었고 평안을
얻었다. 여명이 물든 한지 방문, 달빛 젖은 방문을 바라볼 때는 선(禪)의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 우리 마음을 채워주는 생명의 빛, 평화의 빛, 환희의 빛이기 때문이리라.
 
한지 방문엔 밤늦도록 주무시지 않고 나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내
발걸음 소리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며 책을 읽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내 가슴에 새겨져
있다. 잔기침을 하면서 책을 읽으시던 어머니의 방문 그림자가 내 열여섯 살 적 가을 달빛과
함께 남아 있다. 한지 방문이 비어있는 것처럼 너무 적적해 보여서일까. 한 쪽에 구절초
꽃잎이나 단풍잎을 붙여놓는 경우도 있다. 다닥다닥 붙이지 않고 한 켠에 한두 잎쯤 붙여
심심파적(深深破寂)으로 단조로움을 면해 보자는 심사일 것이다. 북풍한설(北風寒雪)에도
지지 않는 꽃과 단풍잎을 보면서 겨울을 보내자는 것이다.
 
한지 방문엔 문풍지가 운다. 겨울철의 문풍지는 '우는'것이 아닌 '떨림'이다. 한파에 떨고
있는 모든 것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하지만, 문풍지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온돌방의 안온함에
안기게 한다.
 한지 방문은 가로 세로 짜인 나무 문 살의 단아한 모습을 보여 준다. 직선들이 쭉쭉
뻗어나가 교차하면서 작은 정사각형들을 만든다. 한지 방문의 문 살엔 한글의 자모가
들어앉아 있다. ㄱ, ㄴ, ㄷ, ㄹ, ㅁ, ㅂ자가 눈에 띄며 'ㅅ'자를 찾기가 난감하지만 'ㅇ'자나
'ㅎ'자는 방문고리를 보면 수긍이 된다. 흰 방문에 검고 둥근 무쇠 문고리가 달려 있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직선미와 곡선미가 어울리고 흑과 백이 만나고 있으며, 누군가 금방이라도
문고리를 잡아당길 듯한 여운을 준다. 기다림의 미학과 은근함을 품고 있다.
 민족의 문자(文字)가 민족사상과 문화를 낳은 어머니라면, 한지 방문 또한 한국사상과
문화를 낳은 산파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고요한 아침의 나라, 맑고 깨끗함을 추구해온
민족정서의 바탕이 되게 한 한지 방문---.
 
언제나 맑고 성스런 마음으로 아침을 맞고 깨끗하고 밝은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표상이 아닐까. 한국인의 여유, 깨끗한 마음, 심오한 사상은 빛을 머금어 매화
꽃 빛 같은 표정을 지닌 한지 방문을 보면서 살아오는 동안 싹트고 피어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한지 방문을 물들이는 햇빛을 보면서 하루를 맞고, 한지 방문을 적시는 달빛의 명상을
보면서 하루를 거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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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이민을 선택해서 도착한 이후, 열 여덟 해 동안을 한 교회의 성가대 테너 파트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오케스트라와같이 하모니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에 있어서는 멤버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서로없어서는 안된다는 신뢰감이 거기에 있고, 칭찬이거나 혹평이거나 ‘내’가 아니요 ‘우리’가 함께받는다는 것은 피천득 선생이 그의 수필 ‘플루트 플레이어’에서얘기한 것처럼 오히려 마음 든든한 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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