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열매에 대하여

최민자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8-10-22 16:43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익지 않은 열매는 왜 푸를까?
  답은 익지 않아서이다. 말장난하냐고? 아니, 진언이다. 무림의 고수에게 칼날의 광휘를
칼집 안에 감추고 내공을 다질 시간이 필요하듯, 열매들도 무르익기 전까지는 이파리와
비슷한 보호색으로 위장하여 본색을 감출 필요가 있다.
열매의 첫 번째 사명은 번식에 있으므로 씨가 여물기 전에 곤충이나 새에 먹혀서는 낭패다.
덩샤오핑의 대외 기조 정책이었던 도광양회韜光養晦가 식물들에게는 초 짜 상식인 셈이다.
열매가 나무에 붙어 있는 모양을 착실着實이라 하고, 번지 점프하듯 과단성 있게 가지를
버리고 뛰어내리는 행위를 과감이라 한다. 착실하지 않고는 과감할 수 없는 법. 부모가 될
준비도 없이 애부터 덜컥 만드는 인간들아, 기다려라. 어른이 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열매는 왜 둥글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고
오세영 시인이 설파했다. 스스로 익어 떨어지기 전에도 그러나 이미 사과는 둥글다. 꽃 진
자리마다 조롱조롱 맺혀 있는 둥그스름한 열매들, 직선을 싫어하는 신의 취향이신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의 마찰이나 저항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만 사과의 엉덩이가
둥글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나무는 애초 알고 있는 것이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함께 상자에 담겨 어깨를 부딪치며 기차를 타고 흔들흔들 종착역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날카롭게 각을 세워 폼을 잡아봤자 피차 상처 입고 멍이나 들고 말 것이다.

  젖가슴과 엉덩이가 둥근 여자 몇이 과일가게 앞을 서성거린다. 둥근 것들이 맛있고 둥근
것들이 섹시해 보이는 것 주구에겐가 먹히고 싶어서일까. 열매의 최종 목표는 먹히는
것이다. 먹혀 씨를 퍼뜨리는 것이다. 둥글둥글 굴러가 둥글게 먹혀 세상을 만드는 일,
그렇게 누군가의 말음을 빼앗고 몸을 빌리는 일이야 말로 씨를 품은 것들의 황홀한 음모이고
세상을 존속시켜 온 숭고한 비의祕義일 것이다.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 살라고, 너그럽게 내어
주고 원만하게 품으라고, 둥근 지구에 최적화된 열매들이 각지고 모난 인간들에게 삶의
양식을 환기시킨다. 미운 꽃이 없고 미운 열매가 없듯 미운 여자도 세상에 없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어린 시절 나는 눈을 참 좋아했다. 눈이 오는 날이면 동생과 뛰쳐나가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코끝과 손끝이 발개져서 집에 들어오면 갑작스레 따뜻해진 공기에 손발이 가려워 피가 맺힐 때까지 긁어 대곤 했다. 그래도 동네 친구들과 함께 눈을 굴려 가며 누가 더 큰 눈사람을 만들지를 겨루는 시간은 더없이 즐겁기만 했던 기억이다.  그 시절 눈이 오면 부모님이 “눈이 오네. 길 얼지...
윤의정
그림자 3 2024.02.05 (월)
한여름 고산의빙하를 감상하고내려오다 길을 잃었다초저녁부터브랜디와 와인을 걸친 산의 양 어깨는더욱 무거워 보였다어둠 속에서 혼자 싸우다 먹칠하다무사히 내려왔다​라면 끓여 허기 채우고산짐승 공포와 습기를 머금었던이슬 친 옷가지며 어두웠던 마음조차따사로운 모닥불에 털어 말렸다빠닥빠닥 말리고 훌훌 날려버렸다진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선애써 잠을 청했다산 그림자 서늘하다 못해오싹한 밤이었다​날카롭게 흘기던외 눈 달빛...
하태린
봄이 오는 밤 2024.01.29 (월)
조용한 호흡이크게 느껴지는안식의 긴장이무의식의 시간을날 선 칼같이 새롭게 한다대지의 핏줄은이미 봄을 바로 집터 밑까지밀어 오고밤은 내일 터질 성벽을벼르듯 턱 밑까지숨이 차다가느다란 비가적막의 커튼을 드리우고어둠의 너머에새봄의 생기가아가의 숨골 위에새록 인다긴 여정 끝지난 모든 과실은겨울 추위와 얼은 땅거죽아래에서 모두 해체되어 다시준비되었다땅 밑의 수로는물길을 뚫어바로 봄의 축제를 대비했다모든 생명은 이제이해...
김석봉
밴쿠버에서 남들은 거의 다 가보았다는 멕시코 캔쿤 여행은 갑작스럽게 결정이 났다. 막내 딸과 아내 세 식구가 비행기를 탄 것은 작년 12월 11일이었다. 근래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향할 때는 에어 캐나다 직원 가족으로 자리가 있어야 탈 수 있기 때문에 빈자리가 있으려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할인 가격으로 사기는 했지만 어쨌든 공짜는 아니다. 공짜가 아니면 당당해진다. 비행기는 이륙 후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콜로라도...
한힘 심현섭
골덴 바지 2024.01.29 (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나는 겨울이면 늘 어깨를 웅크리고 다녔다. 어머니는 내가 키가 크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며 자주 나무라셨다. 그게 마음에 걸렸던 지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골덴 바지를 한 벌 사오셨다.  바지에 대한 촉감은 허벅지까지 먼저 알아차린다. 병아리 털에 닿은 듯 부드럽고 포근하면서 약간 간지럽기도 했다. 그런데 길이가 길고 품이 컸다. 내 허리춤을 잡아보며 어머니도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성화
어미 2024.01.29 (월)
처음은 어둠이었다가다음은 점이다가그 다음은 점 점 점 선명해지는눈 코 입 손 그리고 발가락그렇게 생긴 꽃들이 내게 와서나는 저절로 꽃이 되고덩달아 꽃이 되어어미의 이름으로 사는꽃의 나날난얼마나 환하고뜨겁고겁 없이 용감했는지
어미
쏟아지는 모시빛의 햇살아래너는 눈이 부시게도 빛나고 있었지.누군가를 향한 너의 기다림은하얀 여백이 되어가고 있었고지울 수 없는 명징한 약속은까만 상흔이 되어 나부끼고 있었어.고결하게 새겨진 너의 이름은성실한 애달픔을 묵묵히 지우며무심한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지.하얗게 사무치는 천년의 침묵은한겹 두겹 수피를 벗겨 내었고,영혼을 향한 순백의 기도로 다시 태어났었어.빛과 어둠은 자리를 바꾸어 나갔지만너의 가녀린 뿌리는...
이봉란
황혼의 찬미 2024.01.22 (월)
J 에게,엊그제 이민 온 것 같은데 어언 30년이 훌쩍 지나고 이제는 성숙한 디아스포라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네. 내 인생에도 황혼의 자유가 찾아온 셈일세.자네가 보내 준 ‘황혼의 자유’ 라는 글 속에 보면 나이가 들어가면 노숙해지는 것도 있어 참 좋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글픈 일도 있다네. 오미크론이 지난 이즈음 아는 목사님의 거동이 불편한 모습을 보면서……그렇지만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웃고 싶으면 웃고 내...
이종구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