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명준 / 캐나다 한국문협
해방 직후 부산으로 이사 온 후 초등학교 2학년에 편입학
하였다. 부민초등학교 26회로 졸업할 때까지 즐겁게 학교에 다녔다. 4학년 때부터는
급장을 했다. 선생님 지시로 급우들에게 가끔 산수를 가르치기도 했다. 귀여움을 받아
선생님 댁에서 잘 때도 있었다. 선생님께서 해주신 기름기가 조르르 흐르는 이밥이
맛있었다는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자갈치 어시장 바닷가에 바람 쐬러 가셨다가 함경도에서
피난 온 가족들이 잘 곳이 없단다 고 하시며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서 빈방을 주셨는데
그들이 6·25 때 이북에서 온 첫 피난민이라는 사실을 후일에 알았다. 당시 큰 형은
정치범으로 잡혀가고 둘째 형은 일본에 가 있었고, 셋째 형은 헌병 7기생으로 지원했고,
넷째 형은 어릴 때 뇌막염을 심하게 앓아 욕창 후유증으로 걷기도 어려웠고, 다섯째인 나는
경남중학교에 갓 입학했다. 아래로 어린 동생 둘이 있었고, 일본에 간 둘째 형의 부인인
형수와 어린 조카가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님이 계셨지만, 시골 노인이라 생계를 위한
활동은 하실 수 없었다. 8식구 중 일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부득이 내가 소년
가장이 되어야 했다. 8식구의 삶이 나에게 달렸었다. 큰 형이
조봉암 등과 더불어 정치한다고 아버지가 시골서 가져오신 재산을 다 탕진하였다. 나의
중학교 입학금도 없어서 사촌 아저씨가 대납해주셨다. 장사 할 밑천이 없어 양담배
1보루(10갑) 살 수 있는 돈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6·25 전쟁으로 미군들이 부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때였다. 길목마다 검문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보따리를 뒤져
미제물건은 무조건 압수하였다. 우리는 보수동에 살았는데 시오리쯤 떨어진
초량초등학교가 미군보급 창이고 그 일대에 미제 물건이 많이 나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서 답사하고 양담배를 사와 부산 도떼기시장(국제시장) 소매상인에게 파는
중간도매(소규모)를 시작했다. 나는 워낙 왜소해서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자전거에 가방을
싣고 다녀도 조사하려는 사람이 없어 무사통과였다. 3부두에서 보급 창인 초량초등학교로
가는 길가에 미제물건을 견본만 나열해 놓고 파는 가게들이 몇몇 있었다. 거기서 껌이나
담배를 사서 도떼기시장 소상인들에게 조금 남기고 넘겼다. 새벽 4시에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바로 초량으로 가서 물건을 구입하여 시장 상인에게 넘기고 식사 후
등교했다. 방과 후 가방을 집어 던지고 또 물건 하러 갔다. 그런 식으로 하루 두
차례 장사하였다. 물건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져서 새벽에 먼저 물건을 사려고 가게들을
훑어가는 경쟁이 붙었다. 이북에서 피난 온 어떤 가족들과 내가 주로 경쟁했다. 치열한
경쟁에서 부지런했던 내가 항상 이겼다. 진열대에 물건 몇 개만 나열한 가게 주인이 내가
정직하고 물건값을 잘 쳐준다며 나에게 물건을 잘 주더니 드디어 차떼기로 산 물건을
나보고 다 팔라고 하였다. 학교에도 빠지고 종일 물건을 날랐다. 반장을 하고 모범생이었던
내가 학교에 빠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마음에 크게 부담이 되었지만, 하루에
버는 돈으로 8식구가 6개월은 살겠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그렇게 한 2년간은
재미를 봤는데 미군들이 서울로 환도하면서 물건이 아주 귀하였다. 한번은 햄이 한 차가
나왔는데 중국식당에서 많이 쓰일 것 같아서 자전거를 타지 않고 돼지 다리 하나를
보자기에 싸서 가다가 검문소에서 걸렸다. 보자기를 열어보라며 무엇이냐고 묻고 어디서
가져오냐고 물었다. 저기 철로 옆에서 어떤 아저씨한테서 샀는데 그 아저씨를 데려올까
라고 물으니 그러라고 하였다. 보자기 물건을 좀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물건 주인한테 가서
이야기하니 잘했다고 하였다.
3학년 2학기부터는 장사를 쉬고 내 공부만 열심히 하였다. 부산에서
6년제 중학교가 중·고등학교로 제일 먼저 시범적으로 분리된 학교가
부산고등학교였다. 피난 온 서울대학교 교수 11분이 부산고등학교에 강사로 초빙된
덕택으로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에서 부산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전국에서 제일 많이
합격했고 수석합격자도 부산고등학교 출신이었다. 경남고등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싶어서 새벽 4시 장사 나가는 시간에 일어나
교과서를 읽는데 얼마나 재미있는지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입학시험 후 면접시험을
보는데 시험관이 물구나무서기를 해 보라고 하였다. 나는 물구나무서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바짝 긴장하며 물구나무서기를 했는데 놀랄 정도로 똑바로
서서 넘어지지도 않았다. 너무 신기해서 집에 와서 다시 해보니 안되었다. 여러 번
다시 시도해 봐도 안 되었다.‘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을 몸소 체험했다. 그
이후 나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후로 가정교사로 고학하면서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다. 선교병원에서 수련하여 외과 전문의사가 되었다. 2007년에 여기
밴쿠버로 이민 와서 한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침술 전문의사가 되었다. 동·서 의학을 다
전공한 통합의학(Holistic Medicine)으로 서양 의술, 동양 의술, 민간의료를
총동원하여 난치성 질환과 난치성 통증을 주로 진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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