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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8-09-17 11:27

윤의정 / 캐나다 한국문협
“아야, 여기 좀 걸레로 훔쳐라.”
어린 시절 징그럽게 나를 따라다니던 망령과도 같은 말이다. 쪽진 머리의 할머니는
꽤 자주 저렇게 명령을 하시곤 했다. 그것도 나와 내 여동생에게만. 어른이 말하는데
토를 달수야 없으니, 어기적 기듯이 걸어가 할머니에게서 걸레를 받아 들어야만 하는
게 일상이었다. 맞벌이인 부모님 대신 할머니께서 우리 삼 남매를 돌보아 주셨는데,
나는 할머니와 지극히 사이가 나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저
‘걸레 훔치기’에 있었다.
  우리 남매는 오빠, 여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었는데도 할머니는 기어이 오빠를
제외한 나와 내 여동생, 그 중에서도 언니인 나에게 집요하리만치 저린 일들을 시키곤
하셨다. 그게 어린 나이에도 무척 싫었던 것 같다. 따박따박 말대꾸를 거리낌 없이
하던 나는 가끔은 반항도 했다.
“오빠는요? 왜 저희들만 해야 해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할머니는 꼬장꼬장한 분이셨다. 어디서 많이 들어
봤음직한 말도 통하지 않는 누군가의 시어머니. 전형적 이게도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니 할머니 눈에 나는 쓸 데 없이 말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큰 가시네’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유독 여자애를 좋아하지 않던 할머니께서는 그래서인지 처음 태어난
가족의 딸을 보러 오지도 않으셨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낳았다는 이유로 갖은 면박을
당하며,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쓸데없이 윤가 가시나를 낳았나?”
“윤가 여자는 발가벗겨 놓아 뻘 밭에 갖다 놔도 지가 알아서 산다. 드세서 영 키우기
힘들다. 쓸모도 없는 지집년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을 때부터 외면 받았던 나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할머니와 함께 할 수 없다고 몸으로 느꼈나 보다. 할머니는, 나는 도무지 접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멀었다. 
  자라면서 나는 더욱 배운 여자가 되어갔고, 할머니에 강한 반발심을 가졌다. 또
‘배운 여자’가 할머니 눈에 곱게 보일 리도 없었다. 하루는 할머니의 어깃장에 크게
대들었는데, 당시에 내가 갖고 있던 논리와 지식으로 무장해 하나부터 열까지
요목조목 반박했다. 나는 내가 꽤나 잘 했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께 혼나기 전까지는.

  부모님한테 혼이 나면서도 눈물을 뚝뚝 흘리던 나는 반성을 하지 않았다.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이런 부당함을 참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불평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빨리 자라서 독립하리라. 비이성적인 대우를 참고 살지 않으리라.
그때가 아마도 초등학교 몇 학년쯤 되었던 듯하다.
  조금씩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에 대한 요령이 생기던 나는 할머니와 직접적인
부딪힘을 줄이는 ‘무시’라는 대단한 대응법을 찾았다. 대꾸보다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이 훨씬 더 고급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또 중학생이 되면서 할머니와 더 이상 얼굴을
붉히며 함께 살지 않게도 되었다. 우리도 더 이상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편해지지 않더라. 세상이 할머니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아갔다. 나는 무기력한, 그것도 똑똑한 척하는 재수 없는 여자였다. 오히려
할머니와는 속 시원히 부딪히며 싸울 수 있었는데, 밖에선 알아도 모르는 척,
괜찮은 척해야만 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식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죽은 듯
고분고분한 여자가 되어갔다. 그 즈음 할머니의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치매가 오는
바람에 요양원으로 가셔야 한다는 것이다. 요양원 생활을 시작하신 할머니를 다른
가족들과는 다르게 나는 거의 찾아 뵙지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반감 같은
것이 있었다. 여전히 나는 할머니가 미웠고, 지금의 무기력함이 할머니의 저주에서
시작한 거라 생각했던 것도 같다. ‘가시나가 조용히 있을 것이지’ 주문처럼 귓가에
울리는 소리는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네가 첫째 것이구나.”
  그러다 문득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일종의 변덕이었으리라.
치매라 못 알아보신다고 하니 약간의 동정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를 보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에 여러 번 시나리오를 그렸다. 웃을까, 그냥 덤덤하게
굴까, 화를 낼까? 복잡한 마음에 마주한 할머니는 그런데 아주 잠시 ‘첫째 것’이라
보시고는 다시금 낯선 이를 대하듯 다른 소리를 늘어놓으셨다. 
“할머니, 나 기억 안 나? 나야 나! 빨리 윤가 가시나라고 해봐!”
  울화가 치밀었다. 왜 못 알아보는지, 나는 아직 화해를 한 것도 아니고 사과를 받은
것도 아닌데. 할머니한테 어떻게든 미안하단 소리를 받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무기력한 적이라니, 전의를 상실한 나는 싸울 수 없더라. 나의 분통을
터트릴만한 대상은 기억조차 없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면회 시간도 채
채우지 않고 튀어나왔다. 다시는 할머니를 보러 가지 않으리라.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약 2주간의 시간이 지난 후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나 때문에? 충격
받은 거야? 왜 가버린 거야?’ 현실감을 느낄 틈도 없이 급히 달려가 마주한 할머니는
차갑고 딱딱하고 푸르렀다. 나는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할머니를 응시하려
했다. 그렇게 노력했다. 눈에 차오르는 것들이 방해하지 않으면 성공했으리라. 짙은
선글라스를 꺼내 눈을 가려두고 어깨를 폈다. 당당하게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온몸으로 말했다.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을 담아 할머니의 주검 앞에서 소리 없이
질러댔다. 
  며칠은 멍하니 보내다, 휴대폰 속 마지막 면회에 함께 찍어둔 사진을 인화해
가져왔다.    차마 액자에 넣어두고 볼 수가 없어 몇 번 사진 속의 할머니를
손가락으로 훔치다 책상 서랍 속에 아무렇지 않게 던져두었다. ‘나는 용서할 수가 없어
할머니, 그래서 다시 따박따박 대드는 윤가 가시나가 되기로 했어.’ 그리고 눈가를
훔쳐댔다. 그게 눈물인지 기억인지 또 다른 전의일는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닦아냈다.
반질반질 빛나던 윤가 가시나가 돌아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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